잔혹함에 대하여 - 악에 대한 성찰 철학자의 돌 2
애덤 모턴 지음, 변진경 옮김 / 돌베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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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폭력'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어떤 분명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복잡다단한 성질과 특징들이 '악'이라는 이름 안에 뭉뚱그려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를 고민하던 와중에 내가 구입했던 책이 애덤 모턴의 <잔혹함에 대하여>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제의식의 제기 자체는 좋았으나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한, 그래서 많이 아쉬웠던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반에 저자가 제시하는 문제의식은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일반화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우리 주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잔혹한 행위의 원인을 '악'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특수한 것으로, 우리와 별개의 것으로 규정한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악 또는 잔혹성의 이면에 숨겨진 특수한 측면과 일반적인 측면을 규명하고 악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자신의 논지를 이끌어가는데, 처음에 제시하는 것이 흔히 악이라는 개념에 씌워진 이미지들의 진위를 규명하는 일이다.


본질적으로 나쁜 인간이나 인간을 유혹하는 불가사의한 힘 등을 가정하는 식으로 악을 설명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잘못된 방향에서 악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악행자들의 욕망에 주목하는 것도 실수다. 일반적으로 악행자들의 욕망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유사하다. 그 대신에 우리는 악행자들의 욕망이 행동으로 전환되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52-53쪽)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뚜렷하게 구분짓지 않고 사용하는 언어들을 재규정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돋보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잘못'과 '악'이 각기 다른 반응을 불러올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잘못과 구별되는 악의 특징을 혐오감, 잔혹성, 이해 불가능성으로 규정한다. 마지막 장에서 역시 '화해'와 '용서'의 차이를 구분짓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언어들의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시도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잘못'과 '악'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뒤로 갈수록 흐려지게 되는데, 이는 잘못된 행동과 악한 행동 사이의 연속성,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과 악한 행동 사이의 연속성을 규명하려는 과정에서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악의 장벽 이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해보았던 일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와닿고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선을 넘는다'는 관용 표현이 있듯이, 우리는 흔히 금지된 행위나 생각의 선, 또는 장벽을 상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이 이론을 통해 정의되는 '악'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수많은 행동들은 과연 '악'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품게 된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저자는 '악'의 개인적, 미시적 측면보다 거시적, 구조적 측면에서 실현되는 악에 대한 설명에 초점을 맞춘다. 구조적인 악을 설명함에 있어서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논의, 즉 '악의 평범성'이라는 측면에 많이 기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수용하면서도 악의 한 가지 측면으로만 수용하며 거리를 유지하는데, 정작 논의되는 내용을 보면 악의 평범성의 측면을 장벽 이론에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심리적, 도덕적 측면에서 악을 규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 아렌트가 집어내는 정치적인 측면이나 구조적 차원에서 행해지는 잔혹행위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다양한 사례를 인용하고, 가정적 상황들을 즐겨 사용해 독자의 이해를 쉽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 사례와 소설, 영화가 예시로 제시되기 때문에 딱딱하다는 느낌 없이 술술 읽힌다는 점도 하나의 장점일 터다. 하지만 그 사례가 정말 적절한 건지는 의문이 들었는데, 특히 <시계태엽 오렌지>를 폭력 억제 기제(VIM)의 사례로 제시한다든가, 스타워즈나 한니발 렉터를 활용해 논지를 전개하는 내용에서는 예시를 축소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악'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답안은 상상력과 직관적 이해다. 악한 행동의 동기와 그들이 잔혹 행위 금지 장벽을 어떻게 넘을 수 있었는지를 상상하고, 이를 직관적 이해를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잔혹 행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예시로 드는 것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 저자가 앞에서 제시했던 '근본적 귀인 오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적 요인을 과대평가하는 귀인 오류에 빠지면 안 된다고 말해놓고 상상력을 제시하는 건 결국 상상력이라는 내적 요인이 오늘날 허구적인 악의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결론이 내려지게 된 것은 정치경제적인 측면의 분석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결국 시스템인가...


하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며,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관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자신과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들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분명히 도움이 되었고, '악'이라는 주제를 탐구할 수 있는 좋은 입문서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개인적으로는 이 책 덕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게 되었다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책 하나만 읽고 끝나는 것은 위험하다. 악의 문제를 상상력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너무 국소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화해'라는 대안이 현실적으로 실행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된다. 질문을 던져주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마무리해야겠다. 이제 다른 책을 찾아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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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열린책들은, 흠.. 내가 책읽기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도록 해준 <개미>를 출간해준 출판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멀리 가면 나는 지금은 이름도 기억 못하는, 90권짜리 동화책 세트를 내준 출판사에 고마워해야겠지만, 본격적으로 읽고 모으기 시작한 것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덕분이었으니... (덧붙여 <개미제국의 발견>을 쓰신 최재천 교수께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이후에 베르베르의 책들을 미친듯이 모으면서, 나는 열린책들을 통해 쥐스킨트를 알았고, 에코를 알게 되었고, 아멜리 노통브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여러 외국 작가들의 책을 접하면서, '열린책들'이라는 출판사의 이름에 신뢰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열린책들이 고집하는 전작주의에 대한 믿음인 것 같기도 하고... 어찌됐든 열린책들의 책들이 내 청소년 시절의 독서 체험에서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하루종일, 야자 시간까지 투자한 끝에 다 읽어버린 일이라든가... 그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페이스북에는 30주년 이벤트가 올라온 지 꽤 되었는데(끝난지도 꽤 되었다), 그 때는 한 번도 응모를 안하다가 알라딘에서 보고 책장을 정리한다. 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굳이 양장본을 할 정도의 분량이 아닌데 양장본으로 책을 낸다든가, 줄 간격이라든가, 하는 것들), 정리를 하고 나니 여전히 나에게는 출판사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나보다. 물론 저 중에 여전히 다 읽지 않은 것들도 많지만...


저의 일천한 책읽기의 시작을 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30주년 축하드려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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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노트북을 처음 샀을 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장하드를 구입했을 때, 나는 외장하드 안에 나만의 영화관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시리즈도 찾아보고, '세계 명작영화 100선' 같은 리스트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던 것 같다. 이때 영화를 구하는 데 돈을 되게 많이 썼는데, 정작 그 중에서 본 영화는 많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 나란 인간은 소장의 욕구가 더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는 외장하드 영화관을 만들던 초창기에 구입하고서 쟁여놓고 있던 영화 중 하나였는데, 이번에 소설을 읽으면서 몇 년만에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영화는 소설의 줄거리를 비교적 충실히 재현하고 있었지만 알렉스가 좋아하는 음악이 클래식 음악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으로 축소된 점은 좀 아쉬웠고, 특유의 강렬한 이미지들을 감상하며 '이래서 큐브릭, 큐브릭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큐브릭의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설로 돌아와서,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읽고난 뒤 역시 세계문학전집에 들어갈만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걸작이라는 칭호를 붙이기가 다소 망설여졌다. 그 이유는 이 작품에 드리워 있는 헉슬리와 오웰의 그림자가 나에게 너무 강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는데, 나는 이를 1부와 2,3부로 나누어서 말하고 싶다. 알렉스라는 개인과 그를 둘러싼 사회라는 두 대립항을 설정하며 읽은 나로서는, 1부와 2,3부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1부에 드리운 <멋진 신세계>의 그림자, 그리고 2,3부에 드리운 <1984>의 그림자를 보면 나는 이렇게 나누어볼 수밖에 없다.


먼저 1부에서, 알렉스와 그 일당들이 벌이는 행동들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끔찍하다. 길을 걷는 노인의 책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폭력을 행사하는가 하면,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여자를 겁탈하는 등 잔혹한 행위의 끝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다니는 사회에는 이들을 통제해야 할 권력의 모습(경찰이나 어른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거리는 이런 범행들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1부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어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소년들의 행동을 제대로 포착하지도 못한다. 결국 1부에서 등장하는 사회의 모습은 일정한 제도나 통제의 힘이 부재하는, 그래서 본능에 충실한 자유가 넘쳐나는 사회의 온상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이는 내게 <멋진 신세계> 에서 그려지는 방탕한 사회를 생각나게 했다(물론 그 사회는 신분이 존재하고, 출산마저 통제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더욱이 알렉스 일당이 코로바 밀크바에서 마시는 칼 탄 우유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소마'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모든 통제가 부재하는 세상에서 알렉스가 선택한 악한 행동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을 거란 이야기를 듣고 나는 격하게 공감했었다. 무질서의 공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 더 나아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알렉스가 보여주는 행동의 이중성이다. 그는 기성 세대의 질서와 규제, 지배를 거부하지만(그는 노인을 혐오했고, 노인의 책 중에서 '결정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갈가리 찢었다), 일당들 사이에선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보인다. 그리고 그는 일정한 형식을 거부하는 현대적인 음악을 혐오하고, 오히려 형식적인 규제가 가장 심한 클래식을 들으며 환희를 느낀다. 음악에 있어서는, 알렉스가 열망하는 음악들이 관현악단의 웅장한 연주가 요구되는 협주곡이나 교향곡이라는 점이 환희의 상태와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지만, 무리 안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태도는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길 원하는 자유의지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2부에서는 감옥생활 대신 치료요법을 받게 되는 알렉스의 모습이, 3부에서는 '치료'가 완료된 후 교도소를 나와 사회에서 살아가는 알렉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범죄자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한 치료는 철저하게 행동주의에 입각하여 소위 '악하다'고 불리는 모든 행위를 통제하고자 한다. 2부에 나타나는 정신병원에서의 치료 장면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윈스턴이 오브라이언에게 고문을 받다가 결국 빅브라더의 숭배자로 변하는 장면을 생각나게 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빅브라더의 모습이 이 책의 2,3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2부는 국가의 통제가 가장 강력한 교도소와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며, 3부에서 나타나는 사회의 모습은 1부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경찰이 된 깡패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통제하고 징벌하는 모습, 깔끔해진 거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1부가 규제, 통제의 부재로 인한 자유의지의 방종이 낳은 사회라면, 2, 3부는 국가의 강한 통제와 지배로 인해 자유의지가 거세된 사회인 것이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사회를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결국 중간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일까. 작가의 이런 중립적인 시선은 통제하는 정부에게서 자유를 되찾으려는 자들, 알렉산더의 무리 역시 알렉스라는 개인의 목소리는 무시한 채 그를 수단으로 인식하는 모습에서도 나타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통제하려는 쪽과 자유를 얻으려는 쪽 모두 그 속을 보면 다를 바 없다는 작가의 회의적인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자살 시도 이후의 알렉스는 다시 치료되어 원래의 성격을 되찾지만, 그를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정부와 결탁하고 그들의 체제에 순응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는 그가 듣던 음악이 웅장하고 화려한 교향곡에서 하나의 목소리와 피아노만 존재하는 가곡으로 변했다는 점(사회체제에 편입되면서 찾게 된 마음의 안정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부분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돈에 대해서 알렉스가 갖고 있던 시선의 변화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그래,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쩐을 가지고 뭘 하려고 그래? 네가 필요한 것들은 다 있지 않아? 네가 차가 필요하면 나무에서 과일 따듯이 구할 수 있어. 돈이 필요하면 뺏으면 돼. 그렇지? 왜 갑자기 돈이 된통 많은 자본가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야?"

- 제1부, 65p


그러나 그 며칠 사이 난 야비해졌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이쁜 쩐들을 긁어모아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충동이 대갈통 속에 생긴 거야.

- 제3부, 213p


제3부의 결말은 앞에서 보여주었던 자극적인 내용과 달리 도덕적이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비판받는 여지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큐브릭은 이 부분을 뺐을 거라는 이야기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1984>의 오마주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빅브라더를 찬양하는 자로 세뇌되어 죽어간 윈스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악한 행위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자유의지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 이런 묵직한 주제를 제시하면서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를 밀고나간다는 점(이는 화자인 알렉스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기인한다)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여러모로 선대의 디스토피아 소설에 빚진 부분이 많다는 점을 계속해서 느끼게 된다는 점, 소설의 제목이 갖는 주제의식이 드러나는 방식이 너무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점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느꼈던 아쉬움이기도 하다.


많은 부분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나에게는 자유의지와 통제 사이의 문제, 특히 자유의지의 범위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든 소설이기도 하다. 특히 자유의지라는 것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내 의표를 찔렀다는 점에서 아픈 소설이기도 했다. 결국 자유라는 것이 무언가를 선택하겠다는 목적의식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결국 이는 수단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데, 개체의 수단화를 피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여전히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 더 읽어볼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당장 생각나는 책은 <자유론>과 <자유로부터의 도피>인데, 언제쯤 구입해서 읽을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 같은 거야. (2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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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16.1.2 - no.004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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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다. 정기구독은 하지 않았지만 나올 때마다 꾸준히 구매하고 있는 <Axt>는 어느덧 네 번째 책을 냈다. 그리고 신생 문학잡지의 수는 늘어나, 내 맘대로 정의하자면 2015년을 잡지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들 문예지의 앞날이 밝을 것인지는, 경제적인 여건만으로 따져도 장담할 수 없다. 이는 문학동네 겨울호에 실린 편집자들의 대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신간알리미 예약까지 해놓고 항상 구매하는 잡지이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70% 이상으로 만족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인상적인 서평이 적거나, 실려있는 단편들에 실망하거나 하는 이유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가 이 잡지를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미처 읽지도 못한 열댓 권의 책에 대한 서평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나는 내 리스트에 추가될 수 있는 책을 '소개'받기 위해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국내외 문학을 통틀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서평은 함성호 시인이 쓴 이제하의 『유자약전』에 대한 서평이었고(작품 전체를 드러내지는 않으면서 자신의 비평적 읽기를 잘 보여준 것 같다는 느낌), 조재룡의 서평은 서평 자체가 인상적이었다기보다는 한유주의 소설이 품은 주제의식이 내 관심의 영역이어서 구미가 당겼다(물론 나는 한유주의 소설을 단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다). 말하자면 상호텍스트성이라는 단어가 보내는 위험한 유혹 같은 것이다.


정영목 번역가가 한국소설의 서평을 써서 조금 놀랐고, 계간지 한 권에 대한 서평의 경우는 시도는 좋았으나, 계간지의 성격으로 인해 글이 약간 중구난방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금 이 글처럼). 북클럽의 대담은 여전히 나에겐 별로였고, 몇몇 서평은 줄거리 소개가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해외문학 서평 중에 내가 관심이 갔던 것은 『붉은 밤의 도시들』 서평이었는데, 엄청나게 난해할 것 같은, 후장사실주의급으로 서사가 해체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풍기는 흑마술 같았다(서평 제목도 '후장 유토피아'다).


<원펀맨>이라는 만화가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안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싱글 몰트 같은 술은 마셔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으므로 나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근데 확실히 주변에 물어보면, <원펀맨>은 확실히 크게 유행하는 게 맞는 듯하다.


<Axt>를 계속 읽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는 바로 작가 인터뷰일 것이다. 이번 잡지의 커버를 보고 '아 이 사람들이 제때에 인터뷰할 작가를 고르는 게 탁월하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까. '듀나'라는 이름을 들어보긴 했지만 그의 작품이나 글들을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나는 호기심에라도 잡지를 살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는 아무래도 듀나가 갖는 익명성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 얘기를 백가흠, 배수아, 정용준 작가가 다 한 번씩 물어보니 약간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듀나도 뒤에 실린 이메일에서 그 부분을 지적하기도 한다). 흥미로웠던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Axt>의 세 작가에게 말하는 듀나가 각각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백가흠 작가의 의문제기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랬다. 후반부에 나오는 듀나의 <Axt>에 대한 문제제기는 더이상 보편적 교양이라는 것이 장점이 되지 못하고, 개인이 관심을 갖는 교양의 영역이 산발적으로 변한 시대에 대한 일침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보편적인 교양'이나마 갖고자 발버둥치는 나로서는 이 정도의 인터뷰도 한때 SF에 가졌던 관심에 불씨를 던져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에게 SF는 항상 나가야 할 개척지 같은 영역인 데다, 언젠가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벽돌 책들 중엔 항상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와 <듄>이 있기 때문에..


윤고은은 과거 <무중력 증후군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았을 때 처음 읽었고, 이후 잊고 지내다가 한 달 전에 단편 '월리를 찾아라'를 읽어야 할 일이 있어 다시 기억하게 된 작가다. 내가 읽은 이 두 개의 작품만으로 생각했을 때, 윤고은 소설의 매력은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 힘을 잃지 않는 가벼운 경쾌함에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통통 튀는' 느낌이 제일 가까운 것인데, '된장이 된'은 여전히 술술 읽히긴 했지만 통통 튀는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굉장히 묵직한 체념이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빌려준 돈을 받아와야 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는 화자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려는지가 흐릿해서 아쉬운 감이 있었다. 아마 괜히 된장을 고른 건 아닐 테다. 그 이유는 뭐... 된장이니까.


박솔뫼의 단편은 여전히 난해했다. 읽어나가면서 나 스스로가 박솔뫼의 소설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열두 명의 여자를 죽인(사실 다섯 명이다) 김산희는 교통사고로 죽은 후에 그 여자들에게 다시 죽고 죽고 죽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며 그걸 목격하고 기록하는 조한이는 실재하긴 하는 건지 화자는 왜 조한이를 찾는지 왜 조한이처럼 기록하기 시작하는 건지 도대체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죽이고 스스로 죽는 것을 보게 하는 건 무슨 의미인지 이건 결국 지적 유희를 위한 소설인가... 더 쓰면 머릿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 이만 줄인다.


황현진의 'diary fiction'의 화자를 보면서 <소각의 여왕>이 생각난 건 기분 탓인가. 쿨함을 너머 어떻게 되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의 방식을 문득 생각했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도 사치인 시대에 살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장편연재의 경우, 이기호의 아이도스는 안 읽은지가 너무 오래된 느낌이라 앞부분을 기억하는 데 애를 먹었고(몇 번 휴재를 했었나?) 최정화의 도트는 그래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어 금방 읽었다. 개인적으로 연재될 때 읽는 것보다 완성본을 읽는 것을 선호하는데, 아마 <Axt>에 연재되고 있는 이 세 소설이 내가 연재로 읽게 되는 최초의 작품이 될 듯하다.


끝에 가서 조금 급하게 읽은 것도 있고, 생각나는 대로 급하게 써서(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굉장히 긴 중구난방의 글이 된 것 같다. 이번 <Axt>를 읽으면서 느꼈던 건, 역시 이 잡지의 가장 큰 힘은 작가 인터뷰에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들도 알고 있겠지. 다음 작가를 누구로 할 지가 가장 큰 고민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두번째는, 새로운 작품을 찾고 싶어서, 이라고 하고 싶다. 물론 소설리스트 같은, 스마트폰으로도 쉽게 볼 수 있는 페이지가 있지만, 활자의 매력이라는 것은 여전히 무시못할 일이기도 하며, 그 자체가 힘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아마 난 정기구독 신청은 안 하겠지만, 그리고 이번 호 역시 70% 이상의 만족을 얻진 못했지만, 다음 호가 나왔다고 문자가 오면 또 구매를 할 것 같다. 읽을 때마다 증식하는 리스트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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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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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의 역사는 어둡다. 수능 공부를 위해 열심히 들여다 보았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만 훑어도 한숨이 절로 내쉬어지는 역사다. 그리고 그 역사는 자기도 나름 역사라며, 자신의 몸에 난 잔가지들을 쳐냈다. 그렇게 개별자로서의 인생은, 잔가지로 치부되어 내동댕이쳐졌다.


<검은 꽃>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버려져있던 잔가지들 중 멕시코 노동자로 떠난 이주민들의 인생역정을 소환한다. 이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들의 사연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내가 학생 시절 공부했던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는, 이들의 애환을 '애니깽'이라는 이름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연은 한쪽에 담을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종도, 조장윤, 김석철, 박광수, 이진우, 최선길, 박정훈, 이연수, 그리고 김이정의 삶이 보여주는 모습은, 저 짧은 글의 행간에 담긴 애환들, 그리고 인생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들 중 누군가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채 구질서를 고집했고, 누군가는 다른 동포를 등처먹으며 영화를 누렸으며, 누군가는 동포를 모아 저항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다. 대서사의 그림자에 감춰져 있던 소서사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꿈틀대는 것을 지켜보며, 이 책에 진짜 악인은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서반아어를 배워 영화를 누리려 했던 권용준과 이진우를, 아시엔다 편에 붙어 같은 동포를 핍박하던 제물포 도둑 최선길을 과연 비판할 수 있는 것일까. 결국 그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서사가 집어삼켜지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을 뿐이다. 그런 입장에서 같은 조선인을 챙기지 않은 죄를 묻는 것은 내 몫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살아남기 위한 방법의 결이 달랐을 뿐이다. 어떤 인물도 악인처럼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 그저 그들이 운명에 맞서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첫 번째 미덕이 되시겠다.


제1부에서부터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독자의 눈길을 가장 사로잡는 것은 김이정과 이연수의 불꽃 같은 사랑이야기일 터이다. 1900년대에도 사랑은 있었고, 씻지도 못해 냄새나는 뱃전에도 청춘남녀의 사랑은 꽃을 피웠으니... 그러나 여기서도 그들의 애정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소설은 함께 배를 탄 다른 여러 인물들을 설명하는 데 훨씬 큰 공을 들이고 있으며, 두 인물의 사랑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보다 그 비중이 크지는 않다. 다만 제1부까지 보이는 이들의 사랑은 사뭇 진지한 '천생연분'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어, 흔히 요즘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는 로맨스의 문법을 찾아볼 수 있다. 1부의 마지막에서 용준을 찾아간 연수의 결연한 모습은 사극과 TV 드라마를 생각나게 해 뜨악하기도 했다. 그래도 1900년대니까...


그는 퍼뜩 깨달았다. 그녀가 왜 거기에 있는지, 이 밤중에 왜 자기에게 다가와 저토록 고고하게, 그러나 한편으론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가를. 그러나 그는 그녀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길고 긴 침묵 끝에, 혼돈 속에서 거듭한 숙고와 숙고 끝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와주신다면, 입은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242쪽)


그러나 2부로 넘어가면 이들은 애타게 서로를 찾지 않는다. 애정이 식진 아니하였으나 '운명 같은 사랑'보다 '운명' 그 자체가 주는 무게가 너무 커서다. '천생연분'은커녕 '일생'도 살아내기가 처절하고 고달퍼서다. 그래서 이들의 로맨스는 통속으로 흐르지 않고 운명이라는 파도에 휩쓸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더 돋보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내내 내가 생각했던 것은 역사, 또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대서사 속에서 어떻게든 견뎌내고자 투쟁하는 소서사의 삶들이었다. 그러나 그 파도는 잔가지들이 모여도 버텨낼 수 없는 해일 같은 것이었고, 파도의 흐름에 따르려 해도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덮침이었다. 그리고 그 파도에는 국가라는 이름의 거대한 운명이, 권력이 존재했다. 이정이 과테말라의 띠깔에서 신대한(新大韓)을 선포한 것은 국가라는 파도, 운명이라는 파도에서 어떻게든 버텨내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무력한 것, 파도에 절은 나비의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그건 몰랐군요. 그렇지만 나는 일본인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정의 말에 요시다가 웃었다.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 거야. 요시다는 이정의 어깨를 툭 치고는 대통령궁으로 걸어들어갔다. (298쪽)

 

운명이라는 해일 앞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운명을 만들고자 몸부림치는 삶들의 향연이라는 이름으로 이 작품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마지막 마무리가 성급하게 매듭지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 그리고 구축한 작품의 스케일에 비해 내용이 빈약해보인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정도면 두 권 정도의 분량으로 끌고 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난 왜 이 작품을 '뇌쇄적'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점이 뇌쇄적이라는 것일까. 아니, 소설이 뇌쇄적이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역사라는 대서사의 파도는 여전히 거세다. 1900년대의 파도는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이것을 견뎌내는 것은, 아니 내가 견디고 있었다는 흔적이라도 남기는 것은 여전히 무력한 것인가. 이 소설은 결국 그것이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1956년이 되어서야 밀림으로 뒤덮인 띠깔의 마야 유적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탐사가 시작됐다. 펜실베니아 대학과 과테말라 정부는 고고학적 연구와 복원작업을 시작하였다. 1991년 과테말라와 스페인 정부는 흙과 나무뿌리로 뒤덮인 제1신전과 제4신전을 원래의 형태대로 재현하기로 결정하였다. 연구팀들은 신전의 정상과 주변에서 몇 구의 해골을 발견하였고 이를 박물관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곳을 거쳐간 일단의 용병들과 그들이 세운 작고 초라한 나라의 흔적은 발굴되지 않았다. (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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