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노트북을 처음 샀을 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장하드를 구입했을 때, 나는 외장하드 안에 나만의 영화관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시리즈도 찾아보고, '세계 명작영화 100선' 같은 리스트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던 것 같다. 이때 영화를 구하는 데 돈을 되게 많이 썼는데, 정작 그 중에서 본 영화는 많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 나란 인간은 소장의 욕구가 더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는 외장하드 영화관을 만들던 초창기에 구입하고서 쟁여놓고 있던 영화 중 하나였는데, 이번에 소설을 읽으면서 몇 년만에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영화는 소설의 줄거리를 비교적 충실히 재현하고 있었지만 알렉스가 좋아하는 음악이 클래식 음악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으로 축소된 점은 좀 아쉬웠고, 특유의 강렬한 이미지들을 감상하며 '이래서 큐브릭, 큐브릭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큐브릭의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설로 돌아와서,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읽고난 뒤 역시 세계문학전집에 들어갈만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걸작이라는 칭호를 붙이기가 다소 망설여졌다. 그 이유는 이 작품에 드리워 있는 헉슬리와 오웰의 그림자가 나에게 너무 강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는데, 나는 이를 1부와 2,3부로 나누어서 말하고 싶다. 알렉스라는 개인과 그를 둘러싼 사회라는 두 대립항을 설정하며 읽은 나로서는, 1부와 2,3부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1부에 드리운 <멋진 신세계>의 그림자, 그리고 2,3부에 드리운 <1984>의 그림자를 보면 나는 이렇게 나누어볼 수밖에 없다.
먼저 1부에서, 알렉스와 그 일당들이 벌이는 행동들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끔찍하다. 길을 걷는 노인의 책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폭력을 행사하는가 하면,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여자를 겁탈하는 등 잔혹한 행위의 끝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다니는 사회에는 이들을 통제해야 할 권력의 모습(경찰이나 어른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거리는 이런 범행들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1부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어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소년들의 행동을 제대로 포착하지도 못한다. 결국 1부에서 등장하는 사회의 모습은 일정한 제도나 통제의 힘이 부재하는, 그래서 본능에 충실한 자유가 넘쳐나는 사회의 온상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이는 내게 <멋진 신세계> 에서 그려지는 방탕한 사회를 생각나게 했다(물론 그 사회는 신분이 존재하고, 출산마저 통제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더욱이 알렉스 일당이 코로바 밀크바에서 마시는 칼 탄 우유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소마'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모든 통제가 부재하는 세상에서 알렉스가 선택한 악한 행동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을 거란 이야기를 듣고 나는 격하게 공감했었다. 무질서의 공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 더 나아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알렉스가 보여주는 행동의 이중성이다. 그는 기성 세대의 질서와 규제, 지배를 거부하지만(그는 노인을 혐오했고, 노인의 책 중에서 '결정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갈가리 찢었다), 일당들 사이에선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보인다. 그리고 그는 일정한 형식을 거부하는 현대적인 음악을 혐오하고, 오히려 형식적인 규제가 가장 심한 클래식을 들으며 환희를 느낀다. 음악에 있어서는, 알렉스가 열망하는 음악들이 관현악단의 웅장한 연주가 요구되는 협주곡이나 교향곡이라는 점이 환희의 상태와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지만, 무리 안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태도는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길 원하는 자유의지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2부에서는 감옥생활 대신 치료요법을 받게 되는 알렉스의 모습이, 3부에서는 '치료'가 완료된 후 교도소를 나와 사회에서 살아가는 알렉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범죄자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한 치료는 철저하게 행동주의에 입각하여 소위 '악하다'고 불리는 모든 행위를 통제하고자 한다. 2부에 나타나는 정신병원에서의 치료 장면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윈스턴이 오브라이언에게 고문을 받다가 결국 빅브라더의 숭배자로 변하는 장면을 생각나게 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빅브라더의 모습이 이 책의 2,3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2부는 국가의 통제가 가장 강력한 교도소와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며, 3부에서 나타나는 사회의 모습은 1부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경찰이 된 깡패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통제하고 징벌하는 모습, 깔끔해진 거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1부가 규제, 통제의 부재로 인한 자유의지의 방종이 낳은 사회라면, 2, 3부는 국가의 강한 통제와 지배로 인해 자유의지가 거세된 사회인 것이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사회를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결국 중간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일까. 작가의 이런 중립적인 시선은 통제하는 정부에게서 자유를 되찾으려는 자들, 알렉산더의 무리 역시 알렉스라는 개인의 목소리는 무시한 채 그를 수단으로 인식하는 모습에서도 나타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통제하려는 쪽과 자유를 얻으려는 쪽 모두 그 속을 보면 다를 바 없다는 작가의 회의적인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자살 시도 이후의 알렉스는 다시 치료되어 원래의 성격을 되찾지만, 그를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정부와 결탁하고 그들의 체제에 순응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는 그가 듣던 음악이 웅장하고 화려한 교향곡에서 하나의 목소리와 피아노만 존재하는 가곡으로 변했다는 점(사회체제에 편입되면서 찾게 된 마음의 안정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부분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돈에 대해서 알렉스가 갖고 있던 시선의 변화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그래,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쩐을 가지고 뭘 하려고 그래? 네가 필요한 것들은 다 있지 않아? 네가 차가 필요하면 나무에서 과일 따듯이 구할 수 있어. 돈이 필요하면 뺏으면 돼. 그렇지? 왜 갑자기 돈이 된통 많은 자본가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야?"
- 제1부, 65p
그러나 그 며칠 사이 난 야비해졌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이쁜 쩐들을 긁어모아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충동이 대갈통 속에 생긴 거야.
- 제3부, 213p
제3부의 결말은 앞에서 보여주었던 자극적인 내용과 달리 도덕적이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비판받는 여지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큐브릭은 이 부분을 뺐을 거라는 이야기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1984>의 오마주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빅브라더를 찬양하는 자로 세뇌되어 죽어간 윈스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악한 행위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자유의지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 이런 묵직한 주제를 제시하면서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를 밀고나간다는 점(이는 화자인 알렉스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기인한다)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여러모로 선대의 디스토피아 소설에 빚진 부분이 많다는 점을 계속해서 느끼게 된다는 점, 소설의 제목이 갖는 주제의식이 드러나는 방식이 너무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점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느꼈던 아쉬움이기도 하다.
많은 부분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나에게는 자유의지와 통제 사이의 문제, 특히 자유의지의 범위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든 소설이기도 하다. 특히 자유의지라는 것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내 의표를 찔렀다는 점에서 아픈 소설이기도 했다. 결국 자유라는 것이 무언가를 선택하겠다는 목적의식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결국 이는 수단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데, 개체의 수단화를 피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여전히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 더 읽어볼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당장 생각나는 책은 <자유론>과 <자유로부터의 도피>인데, 언제쯤 구입해서 읽을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 같은 거야. (2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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