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최근에 읽었던 책들 중 하나는 '큐큐퀴어단편선'의 네 번째 책인 《팔꿈치를 주세요》였다. 이런저런 통로로 퀴어 문학을 읽은 적은 꽤 있었으나 단행본 전체가 퀴어 문학으로 이루어진 책을 읽은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황정은 작가의 단편이 실려있어서 구매한 책이었는데, 잘 몰랐던 작가들의 단편도 볼 수 있었고 현재 퀴어 문학이 어떤 흐름에 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독서였다. 읽으면서 눈에 띄었던 점은 '퀴어단편선'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다면 퀴어 문학인지 알 수 없을 법한 작품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이다. 성별을 특정할 수 없도록 서술된 것도 그렇고(물론 황정은의 소설에서 인물들의 성별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뉴스가 아니다), 적어도 소설 속의 세계에서 그들의 사랑은 '퀴어(queer)하다'는 시선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작품들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오래 전에 들었거나 떠올렸던 질문을, '퀴어 문학에서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떠올렸던 것이다.















  〈2018, 퀴어전사─前史·戰史·戰士〉에서 김건형은 한국의 퀴어 서사를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1. 여성의 죽음을 겪은 남성이 여장을 통해 세계/여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서사(주로 90년대의 작품을 말한다). 2. 청춘기에 동성애를 거쳐 성장한 인물의 후일담. 3. 퀴어의 자리를 박탈하려는 적/담론들과의 윤리적 대립(필자는 황정은의 〈뼈 도둑〉과 윤이형의 〈루카〉를 예시로 든다). 4.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레즈비언 서사. 5. 퀴어 예술가가 삶을 서술하는 서사. 주로 요즈음 우리가 퀴어 문학이라고 접했던 것은 3, 4, 5번의 사례들일 것이다. 3번의 경우 퀴어라는 정체성이 자신의 사랑을 박탈당하는 이유가 되어 이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서사를 취하기 때문에 퀴어 서사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4번의 경우 인물들이 레즈비언이라는 점은 드러나지만 이 정체성은 소설 속 세계의 위기(주로 사회경제적 위기를 가리킨다)에서 인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불안정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달리 말하면 현실의 생존 문제나 경제적 위기가 성 정체성의 문제를 압도해버린다는 것. 5번의 경우는 "세계를 게이라는 인식론을 거쳐서 바라본다는 뚜렷한 자의식"의 서사이기 때문에 인물들의 성 정체성과 그들의 세속적인 일상을 전면에 드러내는 것을 가장 중요한 화제로 삼는 것처럼 보인다. 퀴어 서사의 흐름과 유형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내가 계속 해결하지 못한 질문은 '문학에서 퀴어의 사랑을 다룰 때, 그것은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로 다뤄야 하는가, 아니면 '퀴어'라는 정체성이 부각되도록 다뤄야 하는가?'인 것이다.















평론가 김은 심사평에서 오감독의 영화를 두고, 성적 소수자의 고통을 잘 형상화해 동성애를 보편적 사랑의 경지로 끌어올린 수작이라고 평했다.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하는 보편적인 사랑이 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동성애자들이 뭐 얼마나 특별한 사랑을 하고 산다는 건지, 동성애자인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이성애자가 연루되면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퀴어의 사랑을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로 다룰 때, 그것이 이루어낸 문학적 성취와 별개로 고민에 빠지게 되는 지점은, '퀴어의 사랑이 보편적 이성애와 다르지 않음을 호소해야만 사회가 인정하는 사랑의 담론에 편입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4번 유형의 작품들에서 세계의 재난과 계급적 위기가 성 정체성의 문제를 압도할 때, 사랑을 이뤄내고자 분투하는 과정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도 그 분투에서 보편적 사랑의 형태와 숭고함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다. 3번 유형의 작품들에선 퀴어라는 정체성이 사회 구조가 그들의 사랑을 위협하는 이유로 자리하지만, 거대 담론과의 투쟁에서 숭고한 비극의 주인공이자 윤리적 주체로 올라서는 결말은 퀴어가 치명적으로 취약하고 박탈된 존재로 그려져야 "이성애자의 소비욕을 만족시켜"(〈자이툰 파스타〉)줄 수 있다는 사실을 내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5번 유형과 같은 작품, 이토록 진솔하고 세속적인 퀴어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만이 퀴어의 사랑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일까? 여기에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건, 내가 종종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불만족 때문일 것이다. 지나치게 방만하다고 느껴지는 서사, 한껏 과잉된 감정들, 응축과 세공을 거치지 않은 것 같은 문장들에서 느꼈던 불만족들.














  《팔꿈치를 주세요》에 담긴 이야기들 대부분도 퀴어 서사, 라는 것을 전면에 드러내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이 작품들이 김건형의 분류에 잘 들어맞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2018년의 분류였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소설에서 이들의 사랑은 보편적이지만 작가는 이들을 윤리적 숭고함의 자리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사랑의 시작, 연인의 일상, 위기 등을 심상하게 다루고 있을 뿐. 개인적으로 중년(혹은 노년)의 사랑을 특유의 담담한 서술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황정은의 단편을, 중년의 신체적 변화와 사랑, 그리고 소위 하위문화라고 일컬어지는 소재를 끌어왔다는 점에서 박서련의 단편을 눈여겨보았다. 두서없이 풀어놓았던 나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큐큐의 퀴어단편선은 계속될 것이고, 퀴어 문학도 꾸준히 나아갈 것이다. 퀴어 서사가 한국문학의 새로운 분기를 만들어내며 분출하기 시작한 만큼, 사랑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담은 서사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이는 퀴어 서사가 다루는 고민을 짚어내기 위해 나도 그만큼 시야를 넓혀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전히 현실은 그들의 자리를 흔쾌히 내어주려 하지 않고, 공고한 현실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이론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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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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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의 서사는 독자에게 불친절하고, 미숙 자신을 향한 서사에서도 그러하다. 더 파고들면 더 아플 것을 알기 때문일까? 투박한 크로키 같은 묘사가 문턱을 만들어도, 씻어낼 수 없는 가난의 냄새와 가족의 폭력은 내용이 아닌 배경으로 배어들고, 거기에서 오는 묵직한 서글픔이 오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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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컬렉션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 전11권 - 가난한 사람들 + 죄와 벌 + 백치 + 악령 +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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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작정하고 쭉 읽어볼 수 있을까? 사놓은 《죄와 벌》도 그대로 있지만, 언제나 긴 분량과 이명들에 부담을 느끼지만, 그래도 항상 끌려하는 건 어릴 적 아침부터 밤까지 완주했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대한 기억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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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울리뷰오브북스 1호》의 이슈는 '안전의 역습'이었다. 'ISSUE RE-VIEW'의 처음을 장식한 것은 김홍중 교수의 〈무해의 시대〉였고, 이 글은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진희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196

















  김홍중의 진단으로 보면, '무해한 사회'에 대한 지향은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형성된 안전에 대한 욕망의 결과물이다. "사회적 삶은 '이웃에게 무해하라'라는 새로운 인륜적 명령으로 재구성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피해에 대한 공감, 가해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해에 대한 의지가 일상적 삶을 지배하고 있다."(24쪽) 안전과 무해에 대한 "강도 높은 욕망은 진실, 도덕, 미학의 규범 그 자체를 찢고 변형"(26쪽)시키고 운동을 이끌고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바꿔나간다.

  '우리' 중 누군가의 죽음은 광범위한 애도를 낳았고, 죽음을 야기한 유해의 구조에 책임을 묻는 분노 어린 집합 행위가 발생하였다. 이것은 반복적 파동으로 물결치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사회 공간에 풀어 놓았다.

  왜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왜 가난한 청년들이 부유한 부모를 만난 자들보다 더 많은 사고를 겪어야 하는가? 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쉽게 살해되어야 하는가? 왜 택배 노동자의, 콜센터 직원들의, 요양원 수용자의 호흡기는 바이러스에 더 쉽게 노출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사회적 평등을 '안전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신체가 몰래 촬영되어 불법 사이트에 공개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자유,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 연애를 할 수 있는 자유,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 연애를 할 수 있는 자유, 혹은 라돈에 의한 저선량 피폭을 걱정하지 않고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자유가 아닌가? 왜 안전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동시에 자유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안전으로부터의 자유' 혹은 '자유로부터의 안전'이라는 매우 독특한 관념에 도달했다.)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위험, 불안, 공포를 함께 겪는 자들의 연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안전이 결핍된 존재자들의 새로운 연대, '무해의 연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27~28)

















  이러한 관점에서 김홍중은 21세기의 정치를 '생명정치'의 시대, 위험사회의 틀로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기를, "신체에 가해지는 환경의 유해성을 통치"(24쪽)하기를 원하고, 전방위적인 안전망을 구축하기를 원한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는 데 실패한 권력에 우리는 완강히 저항하고 '탄핵'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안전을 향한 욕망은 더욱 증폭된 듯하고, 욕망하는 우리는 "관리되는 세계의 완벽한 합리성"(30쪽)을 기대하는 위험사회의 시민과 닮았다. 하지만 파놉티콘과 같은 위험사회를 비판해 온 유럽의 비판적 지성들과 달리(김홍중은 여기에 슬라보예 지젝과 조르조 아감벤을 포함시킨다), 김홍중은 '무해'라는 시대적 키워드에서 "유사한 위험을 공유하는 타자들과의 연대감"(33쪽)을 발견한다. '우리가 겪는 유해'에 대한 인식에서 '우리가 가하는 유해'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며 여러 형태의 유해와 위험을 걷어내기 위해 새로운 실천을 감행하는 것. 이 흐름 속에 페미니즘이 있고, 장애에 대한 이해와 권리투쟁이 있고, 비거니즘과 동물 해방이 있다. "무해를 향한 욕망이 강해질수록, 인간이 환경에 가하는 유해에 대한 윤리적 인식은 그만큼 더 선명해져 간다. 무해의 감각에 눈뜬 자는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 다른 존재의 삶이 삭감되어야 한다는 이 사태를 윤리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34쪽) 이러한 성찰에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윤리학이, "내가 있는 자리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었던 자리의 점유"(34쪽)라는 윤리적 인식이 있다. 윤리는 점차 인간 너머로 확장되어 가고, 내가 보장받는 무해가 타자에게도 보장되길 바라는 연대의식이 있다고 김홍중은 보는 것이다.
















  김홍중은 '무해의 시대'를 바라보며 윤리적 연대를 찾고 있지만 과연 우리 사회의 무해지향성은 거기로 나아가고 있을까?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시시때때로 보았던 뉴스들은 "봉쇄된 자아의 순수성에 대한 환상, 완벽한 면역 체계에 대한 비현실적 열망, 비자기非自己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과도한 '안전주의'"(33쪽)에 더 가까웠던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재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의료서비스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는지, 어떤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혐오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 어떤 형태의 가난을 겪었는지/겪고 있는지, 어떤 제도와 정책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어떤 정책이 부재한 채로 그 부재의 영향을 받으며 사는지 등등이 전부 명命의 조건"(황정은, 《일기》, 34쪽)인 사회에서 우리는 나의 안전만을, 나의 무해만을 신경쓰며 거리두기라는 이름 아래 울타리만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김홍중의 주장에 마냥 동의할 수 없는 것, 무해의 시대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나의 부정편향 때문일까? "팬데믹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 사회의 구조를 드러내는 재난"(황정은, 《일기》, 35쪽)이듯이, '안전'과 '무해'는 우리 사회의 인식론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임에는 틀림없다. 김홍중이 '무해'에서 발견한 낙관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타자를 향한 윤리적 예민함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만이 위험사회에서 "타자와의 건강한 관계를 맺을 능력을 상실한 '후기 자본주의의 나르시시즘적 주체'"(30쪽)로 전락하지 않는 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위험사회》를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비인간의 얼굴들, 도처에서 ‘우리도 살고 싶다, 죽이지 말라‘고 외치는 이 얼굴들도 이제 외면할 수 없다. 고통의 자리는 역동적으로 분열되어 간다. 거기에는 절대적 경계도 없고, 특권적 위치도 없다. 더 괴로워하는 존재는 언제나 어딘가에 있으며, 반드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무해의 시대는 고통이 회피되는 시대가 아니라, 이제껏 인정되지 못했던 새로운 고통을 기왕의 것들과 연결하는, 강인하고 질긴 망網이 엮어지는 그런 시대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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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1-13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이런 수준의 서평들이 올라오나보네요.... (..... 지적이긴 하지만 마음이 멀어진다...ㅋㅋㅋ..) 인용된 부분들로 김홍중님의 글 전체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듭니다. 아직 절판이 안되어 있다면 구해봐야겠어요. 지금 시점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인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시작한다니...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저는 최은영이 관계에서 무해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의 무의식을 들여다 보고 있다고 느꼈어요. 무해한 존재는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상처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배태하고 있는 나르시시즘에 대해서도 선명하게.. (그러니까 무해를 표방한 제목이고 표지이지만, 무해함을 비트는 소설로 읽었는 데... 이후의 담론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갸웃. 뭔가 유행처럼 무해무해 이렇게 간 건 아닐까 싶은.) 인물들은 계속 실패하고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렴풋이 알게되요. 소설을 읽는 내내 그 감정들이 너무 선명했고, 이 소설의 감정을 내가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거의 완벽하게 위로 받은 느낌이었다지요.(그렇지만 소설이 가리키는 방향은 ‘쉽게 이해하지 않을 것‘ 이라는 아이러니).. 이걸 어떻게 설명하려고 하니까 굉장히... (에효...) 어렵네요.......... 제가 감상적(?)으로 읽은 소설에서 ‘윤리적 연대‘라는 말을 끼우니 호기심이 매우 동하는군요. 그러니까 예민해진 나머지 관계자체로 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는 저는... 후기 자본주의의 나르시시즘적 주체 그 비슷한 걸까요?

아무 2021-11-14 17:31   좋아요 1 | URL
크게 이슈 리뷰와 책 리뷰, 에세이로 나뉘어져 있고, 이슈 리뷰에 저런 글들이 많이 올라오는 편입니다 ㅎㅎ 0호랑 1호에서 김홍중의 글을 보고 혹해서 《은둔기계》를 샀는데, 프롤로그만 읽어봤지만 도전하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키더라구요. 예전에 겨울서점에서도 다룬 적이 있어서 궁금해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김영민의 먹물누아르‘ 시리즈가 웃기고 재미있었는데, 2호부터는 나오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조금 아쉽...
김홍중이 《내게 무해한 사람》을 가지고 온 건 이 시기의 키워드가 ‘무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 그 후에는 전혀 다루질 않았습니다. 저도 예전에 읽었을 때 너무 좋았는데(개인적으론 《쇼코의 미소》보다 좋았던), 이 느낌은 너무나 감정적인 것이어서 어떻게 리뷰로 정리를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올리지 않았더니 내용이 차츰 가물가물해지고 있습니다 ㅎㅎ 그래도 처음으로 〈그 여름〉과 〈모래로 지은 집〉을 읽었을 때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어요..
˝후기 자본주의의 나르시시즘적 주체˝라는 건 위험사회의 시민을 향한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을 재인용한 것이었습니다. 김홍중은 부정하지만.. 저 비판은 어떤 점에선 한병철이 꾸준히 전개하는 논지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구조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기 쉽다는 뜻으로 저는 항상 읽는데, 그러니까 항상 읽는 사람으로 정신 바짝 차려라! 라는 뜻으로 저는 (제 맘대로) 해석합니다. 그게 꾸준히 읽는(또는 읽어야 할) 이유 중에 하나겠죠?😊

공쟝쟝 2021-11-14 20:13   좋아요 1 | URL
댓글로 인용해오신 학자분들 (한병철 등등)의 텍스트를 읽어본적이 없어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 아니까 ㅋㅋ) 김홍중의 낙관론에 던진 물음표에 제가 푹 찔렸거든요. 관계에서 조심스러워지려는 노력이 관계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제가 자꾸 나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 드는 바람에… 여튼, 저는 이 리뷰 읽고 동해서 리뷰오뷰북스 0권 1권 중고에서 구입해봅니다 ㅋㅋ
정신 바짝 차려라ㅋㅋㅋ 읽어야할 이유로 좋네요 ㅋㅋ
 
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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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플의 여러 기능 중에는 '지난 오늘'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활동량이 적은 편이었으므로 자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눈에 띄는데, 과거의 기록을 볼 때마다 낯뜨거운 얼굴이 되는 일이 잦았다. 과거의 나의 글에서 비치는 미숙함, 투박함, 어리석음이 '왜 그때의 나는 이렇게 썼을까', 또는 '왜 그때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을까'라는 질문을 피워내고 거기에서 부끄러움이 타오르는 것이다(이따금 내가 쓴 댓글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 드는 감정은 어린 시절에 썼던 일기(고등학생 이후로 쓰지 않았던 그것)를 다시 들춰보았을 때 느꼈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때로는 지우거나 비공개로 전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두는데, 아무리 부끄러운 일이었어도 그때의 내가 가졌던 감정과 생각들 역시 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공적인 공간에 게시하는 글이지만, 이런 글들도 내가 건너온 시간을 기록한 일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범람하는 에세이의 시대에 황정은이 첫 에세이로 《일기日記를 내놓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기야말로 에세이의 맹아(萌芽)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가장 사적이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 누구나 쓸 수 있었던 에세이, 텍스트의 외연을 확장시킬 가능성을 품고 있었을 에세이의 근원이 일기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일기'라는 제목과 형식에서 어떤 결의 같은 것을 느꼈다.  자신이 그동안 느꼈던 생각과 감정을 맹아의 형태로, 다시 말해 원형(原形)으로 담담히 써보겠다는 작가의 결의를.


가장 사적인 형식이기에 '나'라는 세계의 바깥으로 나온 일기는 빛을 보지 못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장 사적이어서 소중할 수 있는 감정과 상념이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감정을 말한다는 것"(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172쪽)이라는 말처럼, 일기는 가장 사적인 글이라는 사소함으로 바깥의 당신과 연결되고자 분투하는 글쓰기가 아닐까. 그리고 황정은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언어를 허투루 보지 않으려는 감각으로 자기 고유의 상념을 바깥과 연결하려는 듯하다. 그리고 오랜 독자로서 나는, 그 상념들이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었으면 바라는 것이다.


〈일기〉로 시작해 〈일기〉로 끝나는 열한 편의 일기에는 파주로 이사를 한 뒤 겪는 작가의 다양한 일상이 담겼다. 황정은의 오랜 독자는 읽으면서 작가의 일상을, 또는 작가의 소설이 발아(發芽)된 원체험을 새로이 알아가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오랫동안 내 눈을 붙잡아두었던 것은 언어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일상에서 쓰는 단어에 담긴 무심함을 포착해내던 작가의 시선은 일기에서도 여전하다. 특히 "안다"에 대한 서술을 보면서 나는, 오래 전 '이해한다'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던 일이 떠올라 흠칫 놀랐다.


내 이웃들이 반달터에 두고 있는 관심을 나는 안다고 썼지만 실은 '아니까'라고 쓰는 데 하루를 망설였다. '안다'고 쓰거나 말해야 할 때 나는 매우 축소된다. 내가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내가 그걸 모른다는 것을 안다. 알아버린 것을 모르는 척, 안다고 말해야 할 때 나는 순진한 척을 하며 무언가를 단념하고 있고 그래서 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는 늘 얼마간 책임을 지는 일로 느껴진다. (29쪽)


산보를 하고 식물을 기르는 장면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이효리가 고사리를 말리는 장면을 보며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164쪽) 하는 대목을 읽으면서 '내가 아는 황정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안도하기도, 매년 목포항을 찾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서 처연함에 젖어들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 일기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였다.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소년〉과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맹아가 된 경험과 《어린이라는 세계》를 거쳐 아동 학대의 현실로 이어지는 과정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이를 통해 작가는 에세이에 흐르는 정조를 서서히 독자에게 물들인다.  학대 당하는 어린이를 보호할 수 없는 구조(構造)와 어른의 상투성을 지적하는 작가의 말이 호소력을 갖는 것은 이러한 연결 때문일 것이다. 그 정조의 끝에서 "매번 미안하다는 손글씨 릴레이를 반복할 수는 없다. 몇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60~61쪽)라는 문장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자문하게 된다. 나도 혹시 아파하기만 했을 뿐, 어른의 상투성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쭉 읽으면서 나는 아마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보다 좋은 글은 없겠다고 짐작했었다. 〈흔痕〉을 읽기 전까지는.


〈흔痕〉은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쓴 독후감의 형식을 취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내용은 가장 내밀하고 아픈, 그래서 더욱 처절한 경험이다. 그래서 바깥으로 내놓을 때 가장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경험. 감추고 싶었던 흔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을 고통이었겠지만, 그래도 이를 내놓은 것은 《헝거》가 자신에게 전해준 용기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려는 마음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읽는다. 이 경험이 당신만의 것이 아니며, "그 수치심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183쪽) 그렇기에 더욱 용기를 내어 발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흔痕〉이 전하는 이야기는 가장 사적이고 깊숙한 경험이면서 동시에 그 힘으로 타인과 연결을 이루는, 그래서 감정의 울림이 독자에게 크게 닿는 일기이다. 거기에서 나는 근원적인 감정의 맹아를 보고, 처연한 문장에 담긴 고통을 느끼고, 그 상처를 생각하며 아파하는 것이다.


새로 지을 집터에 원래 살던 맹꽁이를, 아이들이 냅다 던져버린 가물치를, 6716번 버스에 탔던 트랜스젠더 여성을, "전에 거기 머물던 사람들과 그들이 겪은 일"(131쪽)을, 세월호 유가족을 생각하며 쓴 일기들을 읽으며, 여전히 작가는 이 세계가 '비-존재'로 만들어버리려는 존재들을 호명하고 있구나, 우리가 세계의 문법에 익숙해져 무심코 뱉는 혐오와 차별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소설보다 구체적인 체험의 모습으로 오는 감정은 더욱 곡진하고 처연하다. 앞으로 작가가 쓸 소설들도 이토록 폭력적이고 엄혹한 세계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분투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한 명의 독자로서 작품을 오래오래 만날 수 있도록 작가의 건강을 염려하고 희구한다. 언제나 독자들에게 건네는 인사처럼, 당신도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아직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 - P160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마음들을 나도 사랑합니다.

다들 평안하시기를.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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