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최근에 읽었던 책들 중 하나는 '큐큐퀴어단편선'의 네 번째 책인 《팔꿈치를 주세요》였다. 이런저런 통로로 퀴어 문학을 읽은 적은 꽤 있었으나 단행본 전체가 퀴어 문학으로 이루어진 책을 읽은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황정은 작가의 단편이 실려있어서 구매한 책이었는데, 잘 몰랐던 작가들의 단편도 볼 수 있었고 현재 퀴어 문학이 어떤 흐름에 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독서였다. 읽으면서 눈에 띄었던 점은 '퀴어단편선'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다면 퀴어 문학인지 알 수 없을 법한 작품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이다. 성별을 특정할 수 없도록 서술된 것도 그렇고(물론 황정은의 소설에서 인물들의 성별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뉴스가 아니다), 적어도 소설 속의 세계에서 그들의 사랑은 '퀴어(queer)하다'는 시선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작품들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오래 전에 들었거나 떠올렸던 질문을, '퀴어 문학에서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떠올렸던 것이다.
〈2018, 퀴어전사─前史·戰史·戰士〉에서 김건형은 한국의 퀴어 서사를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1. 여성의 죽음을 겪은 남성이 여장을 통해 세계/여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서사(주로 90년대의 작품을 말한다). 2. 청춘기에 동성애를 거쳐 성장한 인물의 후일담. 3. 퀴어의 자리를 박탈하려는 적/담론들과의 윤리적 대립(필자는 황정은의 〈뼈 도둑〉과 윤이형의 〈루카〉를 예시로 든다). 4.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레즈비언 서사. 5. 퀴어 예술가가 삶을 서술하는 서사. 주로 요즈음 우리가 퀴어 문학이라고 접했던 것은 3, 4, 5번의 사례들일 것이다. 3번의 경우 퀴어라는 정체성이 자신의 사랑을 박탈당하는 이유가 되어 이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서사를 취하기 때문에 퀴어 서사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4번의 경우 인물들이 레즈비언이라는 점은 드러나지만 이 정체성은 소설 속 세계의 위기(주로 사회경제적 위기를 가리킨다)에서 인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불안정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달리 말하면 현실의 생존 문제나 경제적 위기가 성 정체성의 문제를 압도해버린다는 것. 5번의 경우는 "세계를 게이라는 인식론을 거쳐서 바라본다는 뚜렷한 자의식"의 서사이기 때문에 인물들의 성 정체성과 그들의 세속적인 일상을 전면에 드러내는 것을 가장 중요한 화제로 삼는 것처럼 보인다. 퀴어 서사의 흐름과 유형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내가 계속 해결하지 못한 질문은 '문학에서 퀴어의 사랑을 다룰 때, 그것은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로 다뤄야 하는가, 아니면 '퀴어'라는 정체성이 부각되도록 다뤄야 하는가?'인 것이다.
평론가 김은 심사평에서 오감독의 영화를 두고, 성적 소수자의 고통을 잘 형상화해 동성애를 보편적 사랑의 경지로 끌어올린 수작이라고 평했다.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하는 보편적인 사랑이 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동성애자들이 뭐 얼마나 특별한 사랑을 하고 산다는 건지, 동성애자인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이성애자가 연루되면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퀴어의 사랑을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로 다룰 때, 그것이 이루어낸 문학적 성취와 별개로 고민에 빠지게 되는 지점은, '퀴어의 사랑이 보편적 이성애와 다르지 않음을 호소해야만 사회가 인정하는 사랑의 담론에 편입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4번 유형의 작품들에서 세계의 재난과 계급적 위기가 성 정체성의 문제를 압도할 때, 사랑을 이뤄내고자 분투하는 과정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도 그 분투에서 보편적 사랑의 형태와 숭고함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다. 3번 유형의 작품들에선 퀴어라는 정체성이 사회 구조가 그들의 사랑을 위협하는 이유로 자리하지만, 거대 담론과의 투쟁에서 숭고한 비극의 주인공이자 윤리적 주체로 올라서는 결말은 퀴어가 치명적으로 취약하고 박탈된 존재로 그려져야 "이성애자의 소비욕을 만족시켜"(〈자이툰 파스타〉)줄 수 있다는 사실을 내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5번 유형과 같은 작품, 이토록 진솔하고 세속적인 퀴어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만이 퀴어의 사랑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일까? 여기에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건, 내가 종종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불만족 때문일 것이다. 지나치게 방만하다고 느껴지는 서사, 한껏 과잉된 감정들, 응축과 세공을 거치지 않은 것 같은 문장들에서 느꼈던 불만족들.
《팔꿈치를 주세요》에 담긴 이야기들 대부분도 퀴어 서사, 라는 것을 전면에 드러내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이 작품들이 김건형의 분류에 잘 들어맞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2018년의 분류였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소설에서 이들의 사랑은 보편적이지만 작가는 이들을 윤리적 숭고함의 자리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사랑의 시작, 연인의 일상, 위기 등을 심상하게 다루고 있을 뿐. 개인적으로 중년(혹은 노년)의 사랑을 특유의 담담한 서술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황정은의 단편을, 중년의 신체적 변화와 사랑, 그리고 소위 하위문화라고 일컬어지는 소재를 끌어왔다는 점에서 박서련의 단편을 눈여겨보았다. 두서없이 풀어놓았던 나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큐큐의 퀴어단편선은 계속될 것이고, 퀴어 문학도 꾸준히 나아갈 것이다. 퀴어 서사가 한국문학의 새로운 분기를 만들어내며 분출하기 시작한 만큼, 사랑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담은 서사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이는 퀴어 서사가 다루는 고민을 짚어내기 위해 나도 그만큼 시야를 넓혀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전히 현실은 그들의 자리를 흔쾌히 내어주려 하지 않고, 공고한 현실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이론과 이야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