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노트북을 처음 샀을 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장하드를 구입했을 때, 나는 외장하드 안에 나만의 영화관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시리즈도 찾아보고, '세계 명작영화 100선' 같은 리스트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던 것 같다. 이때 영화를 구하는 데 돈을 되게 많이 썼는데, 정작 그 중에서 본 영화는 많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 나란 인간은 소장의 욕구가 더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는 외장하드 영화관을 만들던 초창기에 구입하고서 쟁여놓고 있던 영화 중 하나였는데, 이번에 소설을 읽으면서 몇 년만에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영화는 소설의 줄거리를 비교적 충실히 재현하고 있었지만 알렉스가 좋아하는 음악이 클래식 음악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으로 축소된 점은 좀 아쉬웠고, 특유의 강렬한 이미지들을 감상하며 '이래서 큐브릭, 큐브릭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큐브릭의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설로 돌아와서,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읽고난 뒤 역시 세계문학전집에 들어갈만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걸작이라는 칭호를 붙이기가 다소 망설여졌다. 그 이유는 이 작품에 드리워 있는 헉슬리와 오웰의 그림자가 나에게 너무 강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는데, 나는 이를 1부와 2,3부로 나누어서 말하고 싶다. 알렉스라는 개인과 그를 둘러싼 사회라는 두 대립항을 설정하며 읽은 나로서는, 1부와 2,3부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1부에 드리운 <멋진 신세계>의 그림자, 그리고 2,3부에 드리운 <1984>의 그림자를 보면 나는 이렇게 나누어볼 수밖에 없다.


먼저 1부에서, 알렉스와 그 일당들이 벌이는 행동들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끔찍하다. 길을 걷는 노인의 책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폭력을 행사하는가 하면,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여자를 겁탈하는 등 잔혹한 행위의 끝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다니는 사회에는 이들을 통제해야 할 권력의 모습(경찰이나 어른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거리는 이런 범행들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1부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어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소년들의 행동을 제대로 포착하지도 못한다. 결국 1부에서 등장하는 사회의 모습은 일정한 제도나 통제의 힘이 부재하는, 그래서 본능에 충실한 자유가 넘쳐나는 사회의 온상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이는 내게 <멋진 신세계> 에서 그려지는 방탕한 사회를 생각나게 했다(물론 그 사회는 신분이 존재하고, 출산마저 통제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더욱이 알렉스 일당이 코로바 밀크바에서 마시는 칼 탄 우유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소마'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모든 통제가 부재하는 세상에서 알렉스가 선택한 악한 행동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을 거란 이야기를 듣고 나는 격하게 공감했었다. 무질서의 공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 더 나아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알렉스가 보여주는 행동의 이중성이다. 그는 기성 세대의 질서와 규제, 지배를 거부하지만(그는 노인을 혐오했고, 노인의 책 중에서 '결정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갈가리 찢었다), 일당들 사이에선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보인다. 그리고 그는 일정한 형식을 거부하는 현대적인 음악을 혐오하고, 오히려 형식적인 규제가 가장 심한 클래식을 들으며 환희를 느낀다. 음악에 있어서는, 알렉스가 열망하는 음악들이 관현악단의 웅장한 연주가 요구되는 협주곡이나 교향곡이라는 점이 환희의 상태와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지만, 무리 안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태도는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길 원하는 자유의지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2부에서는 감옥생활 대신 치료요법을 받게 되는 알렉스의 모습이, 3부에서는 '치료'가 완료된 후 교도소를 나와 사회에서 살아가는 알렉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범죄자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한 치료는 철저하게 행동주의에 입각하여 소위 '악하다'고 불리는 모든 행위를 통제하고자 한다. 2부에 나타나는 정신병원에서의 치료 장면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윈스턴이 오브라이언에게 고문을 받다가 결국 빅브라더의 숭배자로 변하는 장면을 생각나게 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빅브라더의 모습이 이 책의 2,3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2부는 국가의 통제가 가장 강력한 교도소와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며, 3부에서 나타나는 사회의 모습은 1부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경찰이 된 깡패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통제하고 징벌하는 모습, 깔끔해진 거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1부가 규제, 통제의 부재로 인한 자유의지의 방종이 낳은 사회라면, 2, 3부는 국가의 강한 통제와 지배로 인해 자유의지가 거세된 사회인 것이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사회를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결국 중간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일까. 작가의 이런 중립적인 시선은 통제하는 정부에게서 자유를 되찾으려는 자들, 알렉산더의 무리 역시 알렉스라는 개인의 목소리는 무시한 채 그를 수단으로 인식하는 모습에서도 나타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통제하려는 쪽과 자유를 얻으려는 쪽 모두 그 속을 보면 다를 바 없다는 작가의 회의적인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자살 시도 이후의 알렉스는 다시 치료되어 원래의 성격을 되찾지만, 그를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정부와 결탁하고 그들의 체제에 순응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는 그가 듣던 음악이 웅장하고 화려한 교향곡에서 하나의 목소리와 피아노만 존재하는 가곡으로 변했다는 점(사회체제에 편입되면서 찾게 된 마음의 안정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부분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돈에 대해서 알렉스가 갖고 있던 시선의 변화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그래,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쩐을 가지고 뭘 하려고 그래? 네가 필요한 것들은 다 있지 않아? 네가 차가 필요하면 나무에서 과일 따듯이 구할 수 있어. 돈이 필요하면 뺏으면 돼. 그렇지? 왜 갑자기 돈이 된통 많은 자본가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야?"

- 제1부, 65p


그러나 그 며칠 사이 난 야비해졌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이쁜 쩐들을 긁어모아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충동이 대갈통 속에 생긴 거야.

- 제3부, 213p


제3부의 결말은 앞에서 보여주었던 자극적인 내용과 달리 도덕적이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비판받는 여지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큐브릭은 이 부분을 뺐을 거라는 이야기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1984>의 오마주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빅브라더를 찬양하는 자로 세뇌되어 죽어간 윈스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악한 행위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자유의지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 이런 묵직한 주제를 제시하면서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를 밀고나간다는 점(이는 화자인 알렉스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기인한다)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여러모로 선대의 디스토피아 소설에 빚진 부분이 많다는 점을 계속해서 느끼게 된다는 점, 소설의 제목이 갖는 주제의식이 드러나는 방식이 너무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점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느꼈던 아쉬움이기도 하다.


많은 부분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나에게는 자유의지와 통제 사이의 문제, 특히 자유의지의 범위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든 소설이기도 하다. 특히 자유의지라는 것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내 의표를 찔렀다는 점에서 아픈 소설이기도 했다. 결국 자유라는 것이 무언가를 선택하겠다는 목적의식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결국 이는 수단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데, 개체의 수단화를 피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여전히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 더 읽어볼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당장 생각나는 책은 <자유론>과 <자유로부터의 도피>인데, 언제쯤 구입해서 읽을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 같은 거야. (2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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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16.1.2 - no.004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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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다. 정기구독은 하지 않았지만 나올 때마다 꾸준히 구매하고 있는 <Axt>는 어느덧 네 번째 책을 냈다. 그리고 신생 문학잡지의 수는 늘어나, 내 맘대로 정의하자면 2015년을 잡지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들 문예지의 앞날이 밝을 것인지는, 경제적인 여건만으로 따져도 장담할 수 없다. 이는 문학동네 겨울호에 실린 편집자들의 대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신간알리미 예약까지 해놓고 항상 구매하는 잡지이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70% 이상으로 만족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인상적인 서평이 적거나, 실려있는 단편들에 실망하거나 하는 이유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가 이 잡지를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미처 읽지도 못한 열댓 권의 책에 대한 서평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나는 내 리스트에 추가될 수 있는 책을 '소개'받기 위해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국내외 문학을 통틀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서평은 함성호 시인이 쓴 이제하의 『유자약전』에 대한 서평이었고(작품 전체를 드러내지는 않으면서 자신의 비평적 읽기를 잘 보여준 것 같다는 느낌), 조재룡의 서평은 서평 자체가 인상적이었다기보다는 한유주의 소설이 품은 주제의식이 내 관심의 영역이어서 구미가 당겼다(물론 나는 한유주의 소설을 단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다). 말하자면 상호텍스트성이라는 단어가 보내는 위험한 유혹 같은 것이다.


정영목 번역가가 한국소설의 서평을 써서 조금 놀랐고, 계간지 한 권에 대한 서평의 경우는 시도는 좋았으나, 계간지의 성격으로 인해 글이 약간 중구난방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금 이 글처럼). 북클럽의 대담은 여전히 나에겐 별로였고, 몇몇 서평은 줄거리 소개가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해외문학 서평 중에 내가 관심이 갔던 것은 『붉은 밤의 도시들』 서평이었는데, 엄청나게 난해할 것 같은, 후장사실주의급으로 서사가 해체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풍기는 흑마술 같았다(서평 제목도 '후장 유토피아'다).


<원펀맨>이라는 만화가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안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싱글 몰트 같은 술은 마셔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으므로 나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근데 확실히 주변에 물어보면, <원펀맨>은 확실히 크게 유행하는 게 맞는 듯하다.


<Axt>를 계속 읽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는 바로 작가 인터뷰일 것이다. 이번 잡지의 커버를 보고 '아 이 사람들이 제때에 인터뷰할 작가를 고르는 게 탁월하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까. '듀나'라는 이름을 들어보긴 했지만 그의 작품이나 글들을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나는 호기심에라도 잡지를 살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는 아무래도 듀나가 갖는 익명성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 얘기를 백가흠, 배수아, 정용준 작가가 다 한 번씩 물어보니 약간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듀나도 뒤에 실린 이메일에서 그 부분을 지적하기도 한다). 흥미로웠던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Axt>의 세 작가에게 말하는 듀나가 각각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백가흠 작가의 의문제기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랬다. 후반부에 나오는 듀나의 <Axt>에 대한 문제제기는 더이상 보편적 교양이라는 것이 장점이 되지 못하고, 개인이 관심을 갖는 교양의 영역이 산발적으로 변한 시대에 대한 일침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보편적인 교양'이나마 갖고자 발버둥치는 나로서는 이 정도의 인터뷰도 한때 SF에 가졌던 관심에 불씨를 던져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에게 SF는 항상 나가야 할 개척지 같은 영역인 데다, 언젠가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벽돌 책들 중엔 항상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와 <듄>이 있기 때문에..


윤고은은 과거 <무중력 증후군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았을 때 처음 읽었고, 이후 잊고 지내다가 한 달 전에 단편 '월리를 찾아라'를 읽어야 할 일이 있어 다시 기억하게 된 작가다. 내가 읽은 이 두 개의 작품만으로 생각했을 때, 윤고은 소설의 매력은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 힘을 잃지 않는 가벼운 경쾌함에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통통 튀는' 느낌이 제일 가까운 것인데, '된장이 된'은 여전히 술술 읽히긴 했지만 통통 튀는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굉장히 묵직한 체념이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빌려준 돈을 받아와야 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는 화자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려는지가 흐릿해서 아쉬운 감이 있었다. 아마 괜히 된장을 고른 건 아닐 테다. 그 이유는 뭐... 된장이니까.


박솔뫼의 단편은 여전히 난해했다. 읽어나가면서 나 스스로가 박솔뫼의 소설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열두 명의 여자를 죽인(사실 다섯 명이다) 김산희는 교통사고로 죽은 후에 그 여자들에게 다시 죽고 죽고 죽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며 그걸 목격하고 기록하는 조한이는 실재하긴 하는 건지 화자는 왜 조한이를 찾는지 왜 조한이처럼 기록하기 시작하는 건지 도대체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죽이고 스스로 죽는 것을 보게 하는 건 무슨 의미인지 이건 결국 지적 유희를 위한 소설인가... 더 쓰면 머릿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 이만 줄인다.


황현진의 'diary fiction'의 화자를 보면서 <소각의 여왕>이 생각난 건 기분 탓인가. 쿨함을 너머 어떻게 되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의 방식을 문득 생각했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도 사치인 시대에 살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장편연재의 경우, 이기호의 아이도스는 안 읽은지가 너무 오래된 느낌이라 앞부분을 기억하는 데 애를 먹었고(몇 번 휴재를 했었나?) 최정화의 도트는 그래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어 금방 읽었다. 개인적으로 연재될 때 읽는 것보다 완성본을 읽는 것을 선호하는데, 아마 <Axt>에 연재되고 있는 이 세 소설이 내가 연재로 읽게 되는 최초의 작품이 될 듯하다.


끝에 가서 조금 급하게 읽은 것도 있고, 생각나는 대로 급하게 써서(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굉장히 긴 중구난방의 글이 된 것 같다. 이번 <Axt>를 읽으면서 느꼈던 건, 역시 이 잡지의 가장 큰 힘은 작가 인터뷰에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들도 알고 있겠지. 다음 작가를 누구로 할 지가 가장 큰 고민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두번째는, 새로운 작품을 찾고 싶어서, 이라고 하고 싶다. 물론 소설리스트 같은, 스마트폰으로도 쉽게 볼 수 있는 페이지가 있지만, 활자의 매력이라는 것은 여전히 무시못할 일이기도 하며, 그 자체가 힘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아마 난 정기구독 신청은 안 하겠지만, 그리고 이번 호 역시 70% 이상의 만족을 얻진 못했지만, 다음 호가 나왔다고 문자가 오면 또 구매를 할 것 같다. 읽을 때마다 증식하는 리스트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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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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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의 역사는 어둡다. 수능 공부를 위해 열심히 들여다 보았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만 훑어도 한숨이 절로 내쉬어지는 역사다. 그리고 그 역사는 자기도 나름 역사라며, 자신의 몸에 난 잔가지들을 쳐냈다. 그렇게 개별자로서의 인생은, 잔가지로 치부되어 내동댕이쳐졌다.


<검은 꽃>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버려져있던 잔가지들 중 멕시코 노동자로 떠난 이주민들의 인생역정을 소환한다. 이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들의 사연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내가 학생 시절 공부했던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는, 이들의 애환을 '애니깽'이라는 이름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연은 한쪽에 담을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종도, 조장윤, 김석철, 박광수, 이진우, 최선길, 박정훈, 이연수, 그리고 김이정의 삶이 보여주는 모습은, 저 짧은 글의 행간에 담긴 애환들, 그리고 인생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들 중 누군가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채 구질서를 고집했고, 누군가는 다른 동포를 등처먹으며 영화를 누렸으며, 누군가는 동포를 모아 저항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다. 대서사의 그림자에 감춰져 있던 소서사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꿈틀대는 것을 지켜보며, 이 책에 진짜 악인은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서반아어를 배워 영화를 누리려 했던 권용준과 이진우를, 아시엔다 편에 붙어 같은 동포를 핍박하던 제물포 도둑 최선길을 과연 비판할 수 있는 것일까. 결국 그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서사가 집어삼켜지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을 뿐이다. 그런 입장에서 같은 조선인을 챙기지 않은 죄를 묻는 것은 내 몫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살아남기 위한 방법의 결이 달랐을 뿐이다. 어떤 인물도 악인처럼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 그저 그들이 운명에 맞서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첫 번째 미덕이 되시겠다.


제1부에서부터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독자의 눈길을 가장 사로잡는 것은 김이정과 이연수의 불꽃 같은 사랑이야기일 터이다. 1900년대에도 사랑은 있었고, 씻지도 못해 냄새나는 뱃전에도 청춘남녀의 사랑은 꽃을 피웠으니... 그러나 여기서도 그들의 애정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소설은 함께 배를 탄 다른 여러 인물들을 설명하는 데 훨씬 큰 공을 들이고 있으며, 두 인물의 사랑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보다 그 비중이 크지는 않다. 다만 제1부까지 보이는 이들의 사랑은 사뭇 진지한 '천생연분'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어, 흔히 요즘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는 로맨스의 문법을 찾아볼 수 있다. 1부의 마지막에서 용준을 찾아간 연수의 결연한 모습은 사극과 TV 드라마를 생각나게 해 뜨악하기도 했다. 그래도 1900년대니까...


그는 퍼뜩 깨달았다. 그녀가 왜 거기에 있는지, 이 밤중에 왜 자기에게 다가와 저토록 고고하게, 그러나 한편으론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가를. 그러나 그는 그녀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길고 긴 침묵 끝에, 혼돈 속에서 거듭한 숙고와 숙고 끝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와주신다면, 입은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242쪽)


그러나 2부로 넘어가면 이들은 애타게 서로를 찾지 않는다. 애정이 식진 아니하였으나 '운명 같은 사랑'보다 '운명' 그 자체가 주는 무게가 너무 커서다. '천생연분'은커녕 '일생'도 살아내기가 처절하고 고달퍼서다. 그래서 이들의 로맨스는 통속으로 흐르지 않고 운명이라는 파도에 휩쓸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더 돋보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내내 내가 생각했던 것은 역사, 또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대서사 속에서 어떻게든 견뎌내고자 투쟁하는 소서사의 삶들이었다. 그러나 그 파도는 잔가지들이 모여도 버텨낼 수 없는 해일 같은 것이었고, 파도의 흐름에 따르려 해도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덮침이었다. 그리고 그 파도에는 국가라는 이름의 거대한 운명이, 권력이 존재했다. 이정이 과테말라의 띠깔에서 신대한(新大韓)을 선포한 것은 국가라는 파도, 운명이라는 파도에서 어떻게든 버텨내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무력한 것, 파도에 절은 나비의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그건 몰랐군요. 그렇지만 나는 일본인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정의 말에 요시다가 웃었다.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 거야. 요시다는 이정의 어깨를 툭 치고는 대통령궁으로 걸어들어갔다. (298쪽)

 

운명이라는 해일 앞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운명을 만들고자 몸부림치는 삶들의 향연이라는 이름으로 이 작품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마지막 마무리가 성급하게 매듭지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 그리고 구축한 작품의 스케일에 비해 내용이 빈약해보인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정도면 두 권 정도의 분량으로 끌고 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난 왜 이 작품을 '뇌쇄적'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점이 뇌쇄적이라는 것일까. 아니, 소설이 뇌쇄적이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역사라는 대서사의 파도는 여전히 거세다. 1900년대의 파도는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이것을 견뎌내는 것은, 아니 내가 견디고 있었다는 흔적이라도 남기는 것은 여전히 무력한 것인가. 이 소설은 결국 그것이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1956년이 되어서야 밀림으로 뒤덮인 띠깔의 마야 유적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탐사가 시작됐다. 펜실베니아 대학과 과테말라 정부는 고고학적 연구와 복원작업을 시작하였다. 1991년 과테말라와 스페인 정부는 흙과 나무뿌리로 뒤덮인 제1신전과 제4신전을 원래의 형태대로 재현하기로 결정하였다. 연구팀들은 신전의 정상과 주변에서 몇 구의 해골을 발견하였고 이를 박물관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곳을 거쳐간 일단의 용병들과 그들이 세운 작고 초라한 나라의 흔적은 발굴되지 않았다. (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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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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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원래도 뜨거웠지만 일베나 소라넷과 같은 이슈 때문에 더욱 거세진 듯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주변에 관심(정서나 태도가 아닌, 학문으로서)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어 어디서부터 보아야 할 지 막막했고, 그런 주제로 대화를 나눌 기회도 없었다(보통 그런 주제는 대화에서 배척당한다). 말하자면 <이갈리아의 딸들>은 내가 페미니즘에 입문하기 위해 찾은 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내 마음대로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분류한다면, 나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페미니즘' 소설로서 이 책은 훌륭한 입문서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77년에 나온 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맨움'이 받는 억압과 차별은 현대 사회의 여성에게 주어지는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작가는 소설 곳곳에 현대 사회가 부여하는 차별의 모습을 심어두었다. 그런 모습들이 구시대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현재의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생각나게 한다.


누가 네가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니? 내 말은, 네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거야. 꿩도 먹고 알도 먹을 수는 없어. 네가 아이를 갖는다면, 아이를 키우는 일밖에 할 수 없는 거야. 잘 들어라, 페트로니우스. 어렸을 때 나도 뭐가 될 것인가에 대해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단다. 바다의 낭만, 그것 때문에 네가 괴로워하는 거지. 뱃사람의 위업에 대한 모험 이야기는 이제 그만 읽고 대신 소년들을 위한 책만 보도록 해라. 그러면 네 꿈이 좀더 현실적으로 될거다. 바다에 가고 싶어하는 맨움은 하나도 없어. (14쪽)


맨움을 억압하는 것은 소위 보수적이라고 불리는 움들만이 아니다. 하류 계층, 노동 계급을 지지하고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스파크스주의(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 역시 맨움을 신경쓰지 않는다. 소위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움들도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차별을 당연시해 왔다는 것이다. 소설은 성 역할을 뒤집어 보여주면서 역사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얼마나 멸시하고 차별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신체적 조건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 취사선택한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양성 간의 이런 불공평한 노동과 부의 분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현재의 우리 모권제 사회는 놀랍고도 자기모순적인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켰습니다. 자연의 불평등─그것은 사실상 맨움이 (자연적으로) 움에 비해 일반적으로 더 크고 더 힘이 세다는 사실에 근거한다고 여겨집니다─을 고치는 것이 문명의 임무라고 합니다. 이런 불공평을 개선한다는 문명이 실제로는 수세기 동안 맨움의 종속에 의해 존속해 왔습니다. 움은 더 강한 육체적 훈련과 더 나은 영양 상태로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양육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움보다 작고 약한 맨움들이 많아졌습니다. 다른 포유동물과 인간을 비교해 보면, 암컷과 수컷의 크기 차이가 움과 맨움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문명은─이른바 <문명>은─ 맨움을 불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움이 자연의 불공평함을 고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맨움이 움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을 계속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맨움에게 가장 힘든 일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288쪽)


의문이 잠시 들었던 것은, 과연 여성이 후천적으로 신체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페미니즘의 등장은, 인간이 문명을 구축해 자연으로부터의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기술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편견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역사적으로 여성 예술가가 등장하지 않은 이유를 자신만의 공간과 고정적 소득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었으니.


남성과 여성의 뒤집기, 이 시도 자체가 당시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은 분명하다. 현재 한국에서도 이런 식의 낯설게 하기가 전혀 친숙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므로. 내가 기대했던 페미니즘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은 찾기 어려웠지만(역자 후기에 보면 여성학의 쟁점과 역사에 대한 다양한 패러디가 있는 듯하지만 나는 그 중 일부만 발견한 것 같다), 너무 익숙해져 그것이 차별인지 몰랐던, 혹은 알면서도 무시해왔던 것들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입문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페미니즘 '소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작품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너무 '뻔하다'는 것에 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 뒤집기'라는 공식으로 이 책의 모든 것이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의미체계의 알레고리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소설에서 알레고리를 구사하는 것은 일종의 위험 부담을 내포한다. 말하려는 것이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 뻔한 이야기가 될 위험성이다. 더욱이 2부로 넘어가게 되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 강해서 서사를 압도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갈리아의 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해졌으나, 그것이 소설로서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나는 물음표를 남길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 책의 목적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페미니즘에 대한 일종의 삐라로써 기능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논의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겠지만.


더욱이 '남성과 여성의 역할 뒤집기'라는 공식마저 모호해지는 순간이 종종 오는데, 특히 그로와 페트로니우스의 관계에서 그렇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로가 페트로니우스의 아이를 가졌음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가 보이는 모습은 '맨움=여성'이 아닌 한 남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둘의 모습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두 인간의 모습이다. 물론 페트로니우스의 거부감이 맨움이 전통적으로 갖는 자녀양육에 대한 부담이나 거부감에서 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도피는 소위 저질러놓고 도망가는 남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꼈다. 오직 성적 권리만 쫓고 책임은 회피하는 움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맨움과 움의 정체성이 이 둘 사이에서 흐려졌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30여 년 전에 나온 책의 메시지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는 것은 비극으로 다가온다. 특히 최근의 이슈들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주어야 할 영역이며, 메시지가 변질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맨움해방주의는 인본주의(Huwomism)입니다!"라는 외침이 무색하지 않도록. 이 책 덕분에 나는 더 알아야겠다는 확신을 굳힐 수 있게 되었다.



덧붙임 1)

혹시나 현대 사회는 그래도 점점 성평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힐러리 여사가 현재 미국의 유력학 대권 후보로 지목받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최초로 여성 대통령(... 긴 말은 생략한다)이 나오지 않았느냐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겠다. 아직 개선할 점이 많지만 그래도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 아니냐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다음 글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페미니즘이 갈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


물론 오바마가 성취한 위업은, 좀더 야심차고 재능 있는 개인들로 하여금 차별받던 그 집단적 범주에서 벗어나서 한층 더 대담하게 오바마가 했던 일을 따라하려고 노력하게 만들 겁니다. 더구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저항을 완화시킬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어떤 이의제기도 불식시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성공한 사람들이 이룩한 진전이 곧 '그들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을 열등한 사회적 지위로부터 벗어나게 끌어올려서 그 범주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폭넓은 삶의 전망들을 열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마가렛 대처가 오랫동안 준-독재적인 통치를 행사했던 상황도 정작 여성의 사회적 평등을 가져왔던 것은 아니었죠. 오히려 당시 그 상황이 입증했던 점은, 어떤 여성들은 분명 스스로가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마초게임에 직접 참여해서 남성들을 물리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을 뿐이죠.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311-312쪽)


덧붙임 2)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는데,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그래. 여성이 남성을 앞서 우위를 차지하는 세상은 끔찍해. 그러니 여성이 사회에 나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 이름을 따온 메갈리아를 보며 그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굳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메갈리아의 등장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여성 차별의 극단적인 반작용이다. 내가 보기에 일베, 소라넷과 메갈리아의 전쟁은 이미 진흙탕 싸움이 되어 무엇이 먼저인지를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 되었지만, 왜 이 사회에서 메갈리아가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냥 뜬금없이 일부 '남혐'을 주장하는 여성들이 뭉친 것이라고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일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진흙탕을 정리하고 다시 물이 흐르게 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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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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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엄띄엄 읽다보니 두 달이 넘게 걸렸다. 중간에 책읽기를 아예 쉬었던 기간도 있고 해서 그런가... 천천히 읽는 것이 이 기록을 대하는 예의일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변명할 따름...


프리모 레비의 책을 사게 된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는데, 황정은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로 몇 번이나 꼽았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그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나는 그의 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 책을 샀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다 읽고 이렇게 글을 남기는데,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중구난방식의 글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고...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241쪽)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에 기록될 최대의 절망과 잔악함으로 여전히 맴돌고 있다. 얼마 전 EIDF에서 <홀로코스트의 아이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개봉하기도 했지만, 반백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도 끊임없이 환기되어야 하고 탐구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환기와 소환에 '지겹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광기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는 인식 때문일까. 하지만 정말 이 시대가 그런 광기에서 벗어난 시대인지는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 같다. 광기는 좀더 그럴듯하게 포장되었을 뿐,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맴돈다.


파시즘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면을 쓰고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파시즘은 새옷을 입고 다시 나타나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원래의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없게, 좀더 존경받을 수 있게, 그리고 파시즘으로 초래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에 걸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269쪽)


작가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저항하는 단체에서 활동하다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생활은 참담하고, 끔찍하기도 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두려워질 정도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공포와 분노의 감정으로 덧칠하지 않았다. 이성과 사유의 언어로 담담하게 써내려갈 따름이다. 이 기록이 가지고 있는 비극성은, 수용소 생활을 통해 이끌어내는 인간에 대한 성찰과 사유를 담담한 어조로 서술한다는 것에 있다.


1월 26일. 우리는 죽음과 유령들의 세계에 누워 있었다. 문명의 마지막 흔적은 우리 주위에서, 우리 내부에서 사라져버렸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인들이 시작했던, 인간을 동물로 만들려는 작업은 부패한 독일인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263쪽)


그러나 그들을 괴롭혔던 것은 나치 친위대뿐이 아니었다. 수용소는 울타리를 통해 외부 세계와 격리되었고, 그 안에서도 외부 세계와 격리된 새로운 세계와 질서가 생겨났다. 그 와중에 그들은 연대하지 못하고 붕괴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과 고통, 그리고 굶주림 때문이었다. 유대인이 유대인을 감독하며 통제하기도 하고, 더 편안하고 덜 허기진 삶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해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사람도 있었으며, 도둑질과 다툼, 밀거래가 끊이지 않았다. 수용소라는 '존재방식'이, 그들이 지금까지 품고 있던 '인간'에 대한 정의를 무너뜨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포를 배신한 유대인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지니고 있던 선을 넘은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걸까. 이 말은 위험한 말이지만, 결국 악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광기가 아니라 평범한 것임을, 악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고 멀쩡한 사람을 덮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작가의 말'에도 나오지만, 수용소 역시 광기의 산물이 아닌,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절도 행위나 배신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진 않는다. 다만 이렇게 쓰고 있을 뿐이다.


나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라는 단어가 수용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가 스케치한 그림과 위에 예시한 예들을 토대로 세상의 일반적인 도덕이 철조망 이쪽 편에서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각자 판단해보시기를. (130쪽)


이 책은 단순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담담한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방금 위에서 고통과 공포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며 담담히 서술한다고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 책은 문학적인 표현들로 가득하다. '작품 해설'을 쓴 서경식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의 줄기에는 단테의 <신곡>과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신곡>을 통해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테처럼, 아우슈비츠에서 나타나는 지옥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지옥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그 세계에도 그가 인간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것은, 로렌초나 알베르토와 같은 사람들이 '인간다움'이라는 의미의 생존을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렌초의 이야기는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그가 끝까지 지옥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작은 힘이 되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서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187쪽)


이 책에 대해서 아쉬운 점은 딱 한 가지다. 책에 자주 등장하는 수용소와 관련된 용어들에 대한 정리가 맨앞이나 뒤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용어가 최초에 등장할 때 설명을 붙인 뒤에는 따로 주를 달지 않았는데, 뒤로 갈수록 기억은 안 나고 그 용어에 대한 설명이 어디에 있었는지 찾지 못해 이해가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너무 띄엄띄엄 책을 읽어 기억이 희미해진 탓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 책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글을 쓰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책이 품고 있는 가치는 내가 쓴 것보다 훨씬 무궁무진하다. 아우슈비츠에서 이미 파괴되어 버린 '인간'의 척도를 다시 성찰하는 작가의 모습은 날카롭고, 그 자체로 인간적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인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상실한 지금에 서서, 이 책을 딛고 서서 묻고 싶다. 무엇이 인간인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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