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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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엄띄엄 읽다보니 두 달이 넘게 걸렸다. 중간에 책읽기를 아예 쉬었던 기간도 있고 해서 그런가... 천천히 읽는 것이 이 기록을 대하는 예의일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변명할 따름...


프리모 레비의 책을 사게 된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는데, 황정은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로 몇 번이나 꼽았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그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나는 그의 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 책을 샀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다 읽고 이렇게 글을 남기는데,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중구난방식의 글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고...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241쪽)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에 기록될 최대의 절망과 잔악함으로 여전히 맴돌고 있다. 얼마 전 EIDF에서 <홀로코스트의 아이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개봉하기도 했지만, 반백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도 끊임없이 환기되어야 하고 탐구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환기와 소환에 '지겹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광기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는 인식 때문일까. 하지만 정말 이 시대가 그런 광기에서 벗어난 시대인지는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 같다. 광기는 좀더 그럴듯하게 포장되었을 뿐,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맴돈다.


파시즘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면을 쓰고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파시즘은 새옷을 입고 다시 나타나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원래의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없게, 좀더 존경받을 수 있게, 그리고 파시즘으로 초래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에 걸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269쪽)


작가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저항하는 단체에서 활동하다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생활은 참담하고, 끔찍하기도 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두려워질 정도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공포와 분노의 감정으로 덧칠하지 않았다. 이성과 사유의 언어로 담담하게 써내려갈 따름이다. 이 기록이 가지고 있는 비극성은, 수용소 생활을 통해 이끌어내는 인간에 대한 성찰과 사유를 담담한 어조로 서술한다는 것에 있다.


1월 26일. 우리는 죽음과 유령들의 세계에 누워 있었다. 문명의 마지막 흔적은 우리 주위에서, 우리 내부에서 사라져버렸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인들이 시작했던, 인간을 동물로 만들려는 작업은 부패한 독일인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263쪽)


그러나 그들을 괴롭혔던 것은 나치 친위대뿐이 아니었다. 수용소는 울타리를 통해 외부 세계와 격리되었고, 그 안에서도 외부 세계와 격리된 새로운 세계와 질서가 생겨났다. 그 와중에 그들은 연대하지 못하고 붕괴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과 고통, 그리고 굶주림 때문이었다. 유대인이 유대인을 감독하며 통제하기도 하고, 더 편안하고 덜 허기진 삶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해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사람도 있었으며, 도둑질과 다툼, 밀거래가 끊이지 않았다. 수용소라는 '존재방식'이, 그들이 지금까지 품고 있던 '인간'에 대한 정의를 무너뜨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포를 배신한 유대인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지니고 있던 선을 넘은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걸까. 이 말은 위험한 말이지만, 결국 악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광기가 아니라 평범한 것임을, 악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고 멀쩡한 사람을 덮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작가의 말'에도 나오지만, 수용소 역시 광기의 산물이 아닌,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절도 행위나 배신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진 않는다. 다만 이렇게 쓰고 있을 뿐이다.


나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라는 단어가 수용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가 스케치한 그림과 위에 예시한 예들을 토대로 세상의 일반적인 도덕이 철조망 이쪽 편에서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각자 판단해보시기를. (130쪽)


이 책은 단순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담담한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방금 위에서 고통과 공포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며 담담히 서술한다고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 책은 문학적인 표현들로 가득하다. '작품 해설'을 쓴 서경식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의 줄기에는 단테의 <신곡>과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신곡>을 통해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테처럼, 아우슈비츠에서 나타나는 지옥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지옥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그 세계에도 그가 인간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것은, 로렌초나 알베르토와 같은 사람들이 '인간다움'이라는 의미의 생존을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렌초의 이야기는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그가 끝까지 지옥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작은 힘이 되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서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187쪽)


이 책에 대해서 아쉬운 점은 딱 한 가지다. 책에 자주 등장하는 수용소와 관련된 용어들에 대한 정리가 맨앞이나 뒤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용어가 최초에 등장할 때 설명을 붙인 뒤에는 따로 주를 달지 않았는데, 뒤로 갈수록 기억은 안 나고 그 용어에 대한 설명이 어디에 있었는지 찾지 못해 이해가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너무 띄엄띄엄 책을 읽어 기억이 희미해진 탓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 책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글을 쓰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책이 품고 있는 가치는 내가 쓴 것보다 훨씬 무궁무진하다. 아우슈비츠에서 이미 파괴되어 버린 '인간'의 척도를 다시 성찰하는 작가의 모습은 날카롭고, 그 자체로 인간적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인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상실한 지금에 서서, 이 책을 딛고 서서 묻고 싶다. 무엇이 인간인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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