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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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원래도 뜨거웠지만 일베나 소라넷과 같은 이슈 때문에 더욱 거세진 듯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주변에 관심(정서나 태도가 아닌, 학문으로서)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어 어디서부터 보아야 할 지 막막했고, 그런 주제로 대화를 나눌 기회도 없었다(보통 그런 주제는 대화에서 배척당한다). 말하자면 <이갈리아의 딸들>은 내가 페미니즘에 입문하기 위해 찾은 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내 마음대로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분류한다면, 나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페미니즘' 소설로서 이 책은 훌륭한 입문서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77년에 나온 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맨움'이 받는 억압과 차별은 현대 사회의 여성에게 주어지는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작가는 소설 곳곳에 현대 사회가 부여하는 차별의 모습을 심어두었다. 그런 모습들이 구시대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현재의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생각나게 한다.


누가 네가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니? 내 말은, 네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거야. 꿩도 먹고 알도 먹을 수는 없어. 네가 아이를 갖는다면, 아이를 키우는 일밖에 할 수 없는 거야. 잘 들어라, 페트로니우스. 어렸을 때 나도 뭐가 될 것인가에 대해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단다. 바다의 낭만, 그것 때문에 네가 괴로워하는 거지. 뱃사람의 위업에 대한 모험 이야기는 이제 그만 읽고 대신 소년들을 위한 책만 보도록 해라. 그러면 네 꿈이 좀더 현실적으로 될거다. 바다에 가고 싶어하는 맨움은 하나도 없어. (14쪽)


맨움을 억압하는 것은 소위 보수적이라고 불리는 움들만이 아니다. 하류 계층, 노동 계급을 지지하고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스파크스주의(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 역시 맨움을 신경쓰지 않는다. 소위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움들도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차별을 당연시해 왔다는 것이다. 소설은 성 역할을 뒤집어 보여주면서 역사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얼마나 멸시하고 차별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신체적 조건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 취사선택한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양성 간의 이런 불공평한 노동과 부의 분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현재의 우리 모권제 사회는 놀랍고도 자기모순적인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켰습니다. 자연의 불평등─그것은 사실상 맨움이 (자연적으로) 움에 비해 일반적으로 더 크고 더 힘이 세다는 사실에 근거한다고 여겨집니다─을 고치는 것이 문명의 임무라고 합니다. 이런 불공평을 개선한다는 문명이 실제로는 수세기 동안 맨움의 종속에 의해 존속해 왔습니다. 움은 더 강한 육체적 훈련과 더 나은 영양 상태로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양육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움보다 작고 약한 맨움들이 많아졌습니다. 다른 포유동물과 인간을 비교해 보면, 암컷과 수컷의 크기 차이가 움과 맨움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문명은─이른바 <문명>은─ 맨움을 불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움이 자연의 불공평함을 고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맨움이 움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을 계속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맨움에게 가장 힘든 일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288쪽)


의문이 잠시 들었던 것은, 과연 여성이 후천적으로 신체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페미니즘의 등장은, 인간이 문명을 구축해 자연으로부터의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기술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편견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역사적으로 여성 예술가가 등장하지 않은 이유를 자신만의 공간과 고정적 소득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었으니.


남성과 여성의 뒤집기, 이 시도 자체가 당시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은 분명하다. 현재 한국에서도 이런 식의 낯설게 하기가 전혀 친숙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므로. 내가 기대했던 페미니즘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은 찾기 어려웠지만(역자 후기에 보면 여성학의 쟁점과 역사에 대한 다양한 패러디가 있는 듯하지만 나는 그 중 일부만 발견한 것 같다), 너무 익숙해져 그것이 차별인지 몰랐던, 혹은 알면서도 무시해왔던 것들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입문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페미니즘 '소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작품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너무 '뻔하다'는 것에 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 뒤집기'라는 공식으로 이 책의 모든 것이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의미체계의 알레고리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소설에서 알레고리를 구사하는 것은 일종의 위험 부담을 내포한다. 말하려는 것이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 뻔한 이야기가 될 위험성이다. 더욱이 2부로 넘어가게 되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 강해서 서사를 압도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갈리아의 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해졌으나, 그것이 소설로서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나는 물음표를 남길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 책의 목적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페미니즘에 대한 일종의 삐라로써 기능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논의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겠지만.


더욱이 '남성과 여성의 역할 뒤집기'라는 공식마저 모호해지는 순간이 종종 오는데, 특히 그로와 페트로니우스의 관계에서 그렇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로가 페트로니우스의 아이를 가졌음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가 보이는 모습은 '맨움=여성'이 아닌 한 남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둘의 모습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두 인간의 모습이다. 물론 페트로니우스의 거부감이 맨움이 전통적으로 갖는 자녀양육에 대한 부담이나 거부감에서 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도피는 소위 저질러놓고 도망가는 남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꼈다. 오직 성적 권리만 쫓고 책임은 회피하는 움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맨움과 움의 정체성이 이 둘 사이에서 흐려졌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30여 년 전에 나온 책의 메시지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는 것은 비극으로 다가온다. 특히 최근의 이슈들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주어야 할 영역이며, 메시지가 변질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맨움해방주의는 인본주의(Huwomism)입니다!"라는 외침이 무색하지 않도록. 이 책 덕분에 나는 더 알아야겠다는 확신을 굳힐 수 있게 되었다.



덧붙임 1)

혹시나 현대 사회는 그래도 점점 성평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힐러리 여사가 현재 미국의 유력학 대권 후보로 지목받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최초로 여성 대통령(... 긴 말은 생략한다)이 나오지 않았느냐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겠다. 아직 개선할 점이 많지만 그래도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 아니냐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다음 글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페미니즘이 갈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


물론 오바마가 성취한 위업은, 좀더 야심차고 재능 있는 개인들로 하여금 차별받던 그 집단적 범주에서 벗어나서 한층 더 대담하게 오바마가 했던 일을 따라하려고 노력하게 만들 겁니다. 더구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저항을 완화시킬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어떤 이의제기도 불식시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성공한 사람들이 이룩한 진전이 곧 '그들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을 열등한 사회적 지위로부터 벗어나게 끌어올려서 그 범주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폭넓은 삶의 전망들을 열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마가렛 대처가 오랫동안 준-독재적인 통치를 행사했던 상황도 정작 여성의 사회적 평등을 가져왔던 것은 아니었죠. 오히려 당시 그 상황이 입증했던 점은, 어떤 여성들은 분명 스스로가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마초게임에 직접 참여해서 남성들을 물리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을 뿐이죠.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311-312쪽)


덧붙임 2)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는데,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그래. 여성이 남성을 앞서 우위를 차지하는 세상은 끔찍해. 그러니 여성이 사회에 나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 이름을 따온 메갈리아를 보며 그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굳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메갈리아의 등장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여성 차별의 극단적인 반작용이다. 내가 보기에 일베, 소라넷과 메갈리아의 전쟁은 이미 진흙탕 싸움이 되어 무엇이 먼저인지를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 되었지만, 왜 이 사회에서 메갈리아가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냥 뜬금없이 일부 '남혐'을 주장하는 여성들이 뭉친 것이라고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일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진흙탕을 정리하고 다시 물이 흐르게 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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