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술 마시는 걸 싫어하는 이유는, 술만 마시면 잠깐 졸았다가 깨고 나서 불면증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주량은 대한민국 평균 이하보다 낮은 밑바닥이라 누구에게는 마신 것도 아닐 테지만, 그 정도의 양만으로도 나는 치사량에 도달한다. 오늘 역시 잠이 오지 않아서, 머리는 계속 띵하고 쿵쿵하고 누군가 머리를 두드리는 기분이다. 그러므로 이 리뷰는, 취중리뷰 정도 되겠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맨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걸 왜 영화로 안 만들었지?'였다. 영화로 잘 만들면 선풍적인 인기를 끌 거 같은데... 그러면서 내 마음대로 영화를 구상하고 있었다. 와이두유리브닷컴의 메시지는 내레이션으로 처리하고... 이런 식으로.

 

이 작품에 대한 안 좋은 평가 중 하나는, 자살이라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오는 불쾌함에 있다. 실제로 공감할 수 없었다는 평가 중에는 자살 선언과 연쇄 자살로 인한 것이 많았는데, 사실 이것은 이 소설의 논점을 벗어난 평가라고 생각한다. 자살은 청년 세대의 극단적인 선택의 방편이었을 뿐, 정말 중요한 것은 자살이라는 행위가 상징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78p)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출간 연도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2011년 7월 20일. 무려 4년 전이지만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늘도 유효하다. 그래서 소름끼친다.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유동하는 근대'라고 지칭하지만, 모든 것이 견고하지 못하고 유동한다는 불확실성이야말로 절대로 변치 않는 이 시대의 본질이 아닌지. '하늘 아래에 새 것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인류가 구축한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새 것이 없도록 만든 것은 아닌가. 여기서 나는 지젝을 떠올렸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지향한다고 말했던 <실재의 사막>에서의 지젝을.

 

세연이 생각했던 자살 선언과 청년들의 자살은,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를 살아가는 표백 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으로 그려진다. 모든 것의 정답(正答이 아닌 定答)을 체화하길 강요당하고, 소소한 것에 만족하는 법을 세뇌시키는 시대, 이것이 안고 있는 모순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은 갓 등단한 작가의 패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카뮈의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영감을 얻었을 지도.

 

물론 이런 발상은 위험하다. 어쩌면 80년대 말~90년대 초에 있었던 운동권의 자살 소동과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표백을 강요하는 사회의 질서에 편입할 기회가 주어진 청년들의 자살은, '죽음의 굿판'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자유를 박탈당한 표백 세대의 모습, 정말 이 체제가 인간이 구축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체제인가? 라는 생각을 박탈한 세계. 자살을 비판하는 세대에게 묻고 싶다. 이것이 정말 개인의 문제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불편함을 느낀 것은, 소설 속 '나'의 모습이 내 모습과 많이 닮았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의 질서에 가장 깊게 체화된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공무원이 되려고 공부를 한다. 교사가 나의 꿈이지만, 그것은 더 높은 꿈을 가질 수 없는 현실과 타협한 것이 아닐까. '자살'하기가 두려워 세계의 질서를 수용하기로 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에.

 

이 책이 다루는 가능성은 20대를 옹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실에 나는 약간 죄책감을 느낀다. 이것도 일종의 착취에 해당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어쩌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위대한 과업이란 철저히 개인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위대하다는 개념이 변질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위대함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고, 스토리텔링 기법으로만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작가의 말' (342p)

 

작가는 자신이 대안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휘영과 '나'를 남겨두었다. 휘영의 세연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자살이 그저 젊음의 치기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 역시 그들이 잘못되었고, 3년 안에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런 결말의 설정은, 자살이 아닌 진정한 가능성을 찾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일 것이다. 마지막의 '사이트 개편 공지'는, 자살 선언 역시 일종의 유행처럼 변질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혔다.

 

나는 소설에 있어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고 믿는 형식주의자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형식에 제대로 된 내용이 담길 수 없다고 믿었다(물론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표백>은, 형식이 다소 불안정해도 제대로 된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소설만큼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소설이 정말 훌륭한 세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그믐>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소장해야 할 책의 목록에 이 책을 추가했다.

 

그녀는 문과대 뒤 학교 연못으로 향하면서 다른 학생들을 마주칠 때마다 속으로 빌었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336p)

 

상처받지 않은 자, 이 세계에 의문을 던질 수 없다. 상처받았음에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자 역시 이 세계의 균열을 인지할 수 없다. <표백>은 우리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낸다. 아픔을 통해 인식을 바꿀 수 있도록, 이 세계에 의문을 던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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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와 작가
    from 공 음 미 문 2015-10-17 03:53 
    운동권의 자살이 "항거"였다면, 리뷰를 통해 본 <표백> 속 자살은 "세계에 대한 복수이자 자기 지배로서의 처단"이군요. 이 세계의 의미없음에 침 뱉어주는 게 단발성이 아니라 피로서 얼룩지게 만들고 싶어 한달까요. 자주 드는 생각인데, 이런 점은 장강명 작가 세계관과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의 작품들에서 그가 세계에 가지는 증오심이 강하게 느껴지거든요. 지금 장강명 작가에 대한 열광은 현재 이 한국
 
 
AgalmA 2015-10-17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다보니 말이 길어져서 먼댓글로^^;;
아무님 공부도 걱정됩니다. 리뷰를 이렇게 열심히 쓰시는데, 공부할 시간 뺏기시는 건 아닌지.

아무 2015-10-17 08:48   좋아요 0 | URL
책을 읽는 게 현재 저에겐 일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낙인지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 같은 것이죠. 머리 쓰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 머리를 쓰는 일이라는 게 함정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