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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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015년 작품집을 읽고 이제 2013년까지 3년치를 읽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14년과 15년 수상작품집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냥 그런, 딱히 시선을 확 끄는 단편이 보이지 않는 책이었다. 하지만 13년 작품집을 보고 나서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김종옥이라는 새로운 작가의 발견일 것이다.

 

김종옥의 '거리의 마술사'는 왕따라는 사회적인 문제를 마술이라는 소재와 함께 굉장히 잘 엮어낸 수작이다. 남우라는 아이의 죽음에서 시작하는 이 단편은, 희수의 입을 통해 남우가 어떤 아이였는지를 조금씩 보여준다. 남우는 교실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가 전혀 없는 무색무취의 존재다. 작가가 다른 사람의 말에는 큰따옴표를 붙여주었으면서 남우의 말에만 붙이지 않은 것은, 남우의 말은 이 세계에 속할 곳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남우의 마술은, 나를 봐라, 나 여기에 있다라는, 그런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 세계에 대고 말하고 싶었던 남우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어떤 마법 같은 일은 분명히 그 순간에 일어났다고 그녀는 믿었다. 그것을 세상이 일순간 아주 평화로워진 것 같은 마법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남우를 내려다보는 학생들 모두가 일순간 그 세계 속에 포함되게 하는, 마치 그들 모두가 하나의 눈을 가진 하나의 영혼이 되게 하는 마법이었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본 모든 것이,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는 사실을 기억햇다. 그것은 분명히 남우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 모두가 남우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세상 전부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 순간 붙잡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10쪽)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장면은 두 개였다. 하나는 마지막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남우의 마술이다. 남우가 태영이에게 보여준 그 마술. 그 마술은 성공적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피가 흐르는 장면을 보았고, 태영이는 마술에 속아서 (그 순간에는) 죽었다. 하지만 이후 남우는 공중부양 마술에 실패해 죽는다. 태영이 어머니와 같은 어른은 이를 자살이라고 생각하지만, 희수의 말처럼, 남우는 다시 한 번 마술을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마술은 실패하지 않았다. 남우는 희수 앞에 거리의 마술사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의 재현은 교실로 대표되는 현실의 문제가 우리와 마주하게 한다. 남우가 홀로 오롯이 짊어지고 있던 그 문제를.

 

소설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도 역시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안나라는 아이의 존재다. 안나는 남우의 옆에 앉음으로서 교실에 남우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부각하는, 아이들이 남우의 존재를 인지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하지만 안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나, 하는 의문이 든다. 태영이가 남우의 뒤통수를 친 것도 안나가 남우의 존재를 인지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태영이가 남우를 때린 이유를 '그냥'이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과연 안나가 꼭 필요한 인물이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두 번째로 아쉬웠던 건 바로 이 장면이다.

"그래요, 저는 이 일을 겪으면서 오히려 선(善)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악을 통해서 선을 보는 거죠. 어디선가 악은 악을 바라보는 그 눈 속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건 그 반대의 경우죠. 선은 악을 바라보는 눈이 없으면 볼 수 없어요. 악을 통하지 않으면 볼 수 없어요. 모든 게 그 눈 속에 있죠. 하지만 그 눈은 언제나 속고 말아요. 진실을 보지 못하죠. 마치 마술을 보는 것처럼. (30쪽)

이게 고등학생(단편에는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분명히 명시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지만, 아무래도 고등학생 같다)의 입을 통해서 나올 수 있는 말인지 나는 계속 의구심이 들었다. 고등학생의 수준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유가 태영이 어머니 앞에서 이야기하는 상황과 희수라는 아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난 아닌 거 같다. 그런 점에서 저 장면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장면이라는 판단이 든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 마술의 상징성이라든가, 남우의 행동, 거리의 마술사... 이런 장치들을 보면서 굉장히 감탄했고, 다른 소설도 찾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정말 멋있고, 아름다웠다.

 

이장욱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에 등장하는 하루오는, 내가 한때 동경해 마지 않던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인물이어서 눈길이 갔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하루오는 입사지원자 하라 쿄스케가 되었고, 이것을 보면서 여행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어느 순간 종결될 것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니 쓸쓸해졌다. 결국 어느 순간에 이르면, 여행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까.

 

황정은의 '上行'에 대해서 몇 마디 더 하자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와 오제의 관계는 '상류엔 맹금류'에 등장하는 '나'와 제희의 관계와 많이 닮았다. '상류엔 맹금류'에서 '나'가 제희의 가족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는 것처럼(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의 경계에 있다), '上行'의 오제 역시 현실의 벽 때문에 '나'와 아주머니가 발견하는 일상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의 월식은, 정말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오제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는 점에서 보아, '나'를 '별세계에서 왔냐'며 힐난하는 오제에게는 월식 역시 그저 자연현상일 뿐,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월식을 보려하나 잠들었던 '나'를 깨우는 오제의 목소리라고 보아 오제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해석이다. 문단을 나누었다는 점을 보았을 때, '나'는 이번에는 월식을 보려 하였으나 다시 잠든 것으로 보이고, 오제가 월식을 볼 수 있도록 깨워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해석이 더 그럴 듯해 보이지만, 그러면 뭔가 황정은스럽지 않은 것 같다.

 

정용준의 '당신의 피'는 투석이 갖는 모순을 상징으로 굉장히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나는 이 작품을 보기 전까지 투석이 영양분을 빼앗는다는 사실을 몰랐다.(내가 투석을 아는 것도 미드 하우스를 보기 때문이지만, 거기에 그런 설명까진 안 나오므로..) 살기 위해선 투석을 해야 하지만, 투석을 하면 피 속의 영양분까지 빼앗기므로 죽음에 다가간다.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한다. 하지만 먹는 순간, 투석하지 못하는 신장으로 인해 다시 죽음에 다가가게 된다는 모순... 이를 통해 보여주는 부자(父子)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나는 청결해졌다, 고 선언할 수 있는 투석이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정짓고 싶지는 않다. 내 마음 한 구석엔 인간이 언젠가는 투석을 통해 온전한 실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 남아 있으므로..)

 

박솔뫼의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이번 작품집을 통틀어 나에게 가장 어려운 작품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 의미를 찾는 게 어렵다. 그의 문체는 굉장히 신선하면서 불편하다. 불편한 건 그의 문체 때문일까, 아니면 미래가 없는, 반복되는 현재를 살아갈 뿐인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일까.

대부분은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었는데 내가 궁금해하는 것은 어제의 일 엊그제의 일, 최근이라면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에 관해서는, 글쎄.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고 궁금해지지 않는다. 남자는 작아졌고 이제 우리는 예전과 같이 질문을 하자. 우리에게 예언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60쪽)

어제는 남자가 몸이 작아졌고 고리원전에서는 사고가 일어났고 사람들은 부산을 제2의 도시라고 하는데 원전은 부산에도 있어 해운대와 아주 가깝게(그것은 마치...... 마치...... 신세계백화점처럼!!). 일 년 전에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고 이 일은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제를 포함하고 그것을 말해준 남자의 몸이 작아진 것은 우연한 일이었고 그 밖에 많은 일들은 우연히 일어나지만 그 많은 것들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던지면 우연을 남용하지 말라고 대답하는 것은 우연 그 자신이었다. (273~274쪽) 

남자가 여기가 제일 따뜻하다면서 여자의 질 속에 몸을 넣고 잠을 자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읽으면서 나의 시선을 끌었던 건, 분명 일본에는 대지진과 원전 사고가 일어나고, 고리원전 사고가 일어나고, 남자가 다람쥐처럼 작아졌는데도, 이들은 전혀 놀라거나 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런 사실들이 산책을 하면서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지? 어제는 그런 일이 있었어...'라고 말하는 '아주 쓸모없는 이야기'에 불과한 세계가 소설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세계, 예언이 없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과거에 대한 인식도, 미래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고 현재에 대한 인식도 없이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현실에 대한 깊은 허무주의가 보인다. 이런 굉장히 독특하면서 불편한 자신의 문장을, 작가는 어디까지 끌고 갔을까.

 

읽으면서 나는 황정은의 '上行'을 제치고 김종옥의 '거리의 마술사'가 대상을 받은 이유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황정은의 팬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작이라니,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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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08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마술사> 희수 대사에 대해서 저도 동감...작가 개입이 바로 드러나 보였죠.

박솔뫼 작가의 문체는 제게도 좀....말하는 것들의 불편이 아닌 문장 자체가. (뭐, 제가 남의 문장 어쩌고 할 주제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어렵다 말하는 한유주, 배수아 작가의 문체는 제게 읽는 데 불편이 없어요...한유주 작가 생각하면 세대 차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무 2015-07-08 07:51   좋아요 0 | URL
배수아 작가는 예전에 `시취`를 읽었었는데, 그때는 문체가 불편하다고 느끼진 않았어요. 근데 박솔뫼 작가의 문체는 좀... 중간중간에 끝난 듯 끝나지 않는 문장들이 튀어나와서 뭘까 이건 했었죠..

보물선 2015-07-08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년꺼 떨어진다는 말씀에 공감.

아무 2015-07-08 19:12   좋아요 0 | URL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없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