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장마 끝에 비춘 햇살이 마치 단비와 같다. 어제부터 시작한 빨래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지금 마당엔 빨래가 너울너울 춤춘다.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은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방에서 혹은 거실 창문으로 무겁던 빨래가 점점 말라서 가벼워지는 모양을 보는 기쁨이란.


빨래는 또 오래된 주택의 남루함을 말끔히 앗아간다. 흰 빨래 사이에 낀 원색의 셔츠는 활짝 핀 꽃과 같이 그 향이 길고, 세제와 섬유유연제 냄새가 종일 집안 구석구석을 맴돈다. 사실, 오늘처럼 햇빛 좋은 날은 표백제도 따로 필요가 없다. 아니, 어쩌면 마음의 얼룩까지도 말끔히 지워질 듯하다.


여름, 햇살 그리고 빨래로 충만한 오후. 낮잠 보다는 책읽기가 좋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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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7-2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래 해서 햇볕에 널어두면 기분이 참 좋아져요. 흰색 사이사이로 원색의 옷감이 있으면 더욱 아름다운 광경이 그려지네요. 냄새도 향기롭구요.. 우울과몽상님, 올만이에요^^ 반가워서 달려왔네요^^

겨울 2006-07-24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잘 지내셨나요? 장마 끝 햇살만큼 반가운 손님이 또 있을까요? 이제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같아요. 활기찬 날들 되시기를^^
 

 

목욕은 역시 힘들다.

욕실은 좁고, 할머니의 몸은 길고, 내 팔뚝은 가늘어서(?) 진땀을 흘리는 고된 노동이다. 오래된 옛날식 주택이라 방에서 욕실까지의 여정도 험난하다. 곳곳에 있는 턱과 좁은 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결국은 해내었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저녁 식탁을 차려 놓으니 밥그릇을 유심히 살피시던 할머니, "요기를 쥐가 파 먹었냐?" 그러신다. 가만히 보니 살살 퍼 올린 밥의 모양이 찌그러졌다. 그럴리가, 하면서 웃었지만 웃을 일이 아니다. 치매 노인 대개가 그럴듯 할머니도 유난히 식사에 집착을 하신다. 밥의 적고 많음, 때의 구분도 흐리고 먹고 나서도 늘 모자란 듯 아쉬워 하신다. 그러면서도 할머니의 그릇보다 확연히 적은 내 그릇을 보시곤 더 줄까, 하신다. 아니라고 할머니 다 드셔야 한다고 하니, "목욕을 했으니 많이 먹어야지?" 하시는데 귀여워서 웃음이.

사실 할머니와 있다보면 웃음 보다는 화낼 일이 더 많다. 사소하지만 반복하면 병적인 몇몇 행동들이 좀 오래 눈을 떼고 있으면 드러난다. 막 뭐라하면 변명을 하시면서 안 하는 척 굴다가 또 그러고. 야단치고 야단맞는 걸 즐기시는 건지.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재미가 나시는 건지. 특이한 건 나와의 자잘한 다툼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치매 특유의 엉뚱한 말도 덜하고 우울해 보이지도 않는다. 병원에 있을 때는 환각이나 환청을 보고 들어 사람을 기막히게 만들더니, 집에 돌아와서는 그런 부분들이 확 줄었다. 

무계획으로 덜컥 퇴원을 했고, 거처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생집에서 그리고 여기로 모셔왔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은 여전히 없고 일단은 할머니의 상태를 지켜보자는 생각 뿐이다. 어짜피 가족 중 누군가는 해야만할 일이다. 선뜻 나서서 하겠다 하지 않는데 하라고 떠밀 수는 없는 일이다. 부모님은 어디든 시설에 맡겨야한다는 생각이시고, 나는 징그러울 정도로 할머니가 밉고 싫어진다면 모를까 맨정신으로 타인의 손에 건네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는 없다고 단호히 말씀드렸다. 

아직은 여기까지다. 앞으로의 일은 모르겠다. 생각하면 근심으로 불면이다. 할머니의 운이 다하지 않았다면 앞으로의 일도 만사형통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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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적응을 못하는 할머니가 가여워 동생과 단둘이 합의하여 퇴원을 한 이후, 엄마나 아빠의 태도는 이후의 일은  모른다는 식이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병에 대해서 무조건 겁부터 집어먹는 사람들이니 길게 얘기해서 득 될 것도 없다. 동생 집에서 열흘, 그리고 집으로 모셔와 닷새째다. 하루가 한달마냥 길어 달력을 확인한 후 겨우 닷새라서 놀랍다.

 

할머니의 상태는 생각 외로 양호한 편이다. 동생 집에서도 병원에서의 상태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살던 곳이라서 그런지 성격적으로 부딪쳐 싸우는 것 말고는 훨씬 좋아졌다. 일단 이상 행동이나 말이 줄었고 기억력이나 정신도 맑다. 아침과 저녁으로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있으니 그 효과라고 볼 수도 있지만 초기 때를 떠올리면 눈물겨운 발전이다.

 

담당의사의 소견대로 퇴원을 미루고 계속 치료(?)라는 것을 받았다면 어찌됐을까. 할머니는 6인실의 1인 간병인 제도의 입원을 못 견뎌하셨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의 입원기간 동안 동생과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을 들락거리며 면회시간 이후 집으로 돌아오며 할머니의 가지 말라는 간청을 외면하는 쓰라림에 과연 이런 식의 치료가 최선인가를 끊임없이 반문했고 의사와 면담을 했다.

 

할머니는 노인성 치매 초기다. 우린 극단적인 치료방법이 아닌 적절한 약물치료와 가족의 간병을 원했는데, 담당의는 병원에 대하여 내보이는 할머니의 적의자체도 치매의 증상으로 포함시켜 심한 경우 손발을 묶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의사의 전문적인 지식이 절대적이라 할지라도 할머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족이다.

가족과 떨어져 받는 치료는 할머니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우리의 의견은 거의 묵살되었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같은 병실의 환자들과의 동거 및 그들의 이상행동과 말도 싫어하셨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란 할머니의 뇌가 병들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미 복구가 불가능하게 손상되었다. 할머니의 어린애 같은 짜증, 푸념, 투정을 받아줄 수 있는 상대는 가족뿐이고, 그것을 약으로 치료한다는 것은 의지 상실뿐이며, 병실에서 겪어 본 다른 노인 분들을 봤을 때, 휠체어 없이는 거동이 불편하고 상시 기저귀를 착용하고, 식사도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할머니는 상당한 고령의 환자임에도 요의를 느낄 때마다 화장실에 가겠다고 침상에서 기어내려 오셨는데, 환자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간병인은 기저귀 착용을 의무화했다. 만일 병원생활이 오래 지속된다면 할머니는 침상에서 꼼짝도 못하고 대소변을 기저귀로 처리하는 중증의 환자가 되고 말 것은 자명했다. 

 

할머니의 옆 침상에 계셨던 분은 간병인이 성의 없이 하의를 벗기는 것을 의사표현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거부하셨다. 주변에 다른 가족이 있거나 말거나 간병인은 거침없이 할머니들의 하체를 발가벗기고 기저귀만을 찬 채로 방치하기 일쑤였다. 필사적으로 윗도리를 끌어내시며 아래를 가리려 애쓰는 그 분을 봤을 때 암담했다. 병원의 방침, 간병인의 부족 등을 고려한다 해도 수치심을 느끼는 동안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며 학대로 보여 졌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가족들의 무관심과 방치가 부른 결과지만, 요구사항이 없는 환자를 선호한다는 어느 간병인의 솔직한 생각에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물 덜 마시는 환자 그래서 기저귀를 자주 갈아주지 않아도 되는 환자를 좋아하는 게 그곳의 현실이었다. 결코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면서 안심할 만한 처우를 기대하지 못하는 건 불행이다. 재미있는 건 이 지역에서 최고의 서비스와 시설을 자랑한다는 병원 측의 자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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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억, 소리가 절로 났다. 정체는 분명한 녹색식물군이 코앞까지 뻗쳐 그리 크지도 않은 마당을 뒤덮고 있다. 열매는 드문데 잎만 무성한 감나무의 위용에 이미 놀랐건만. 역시나 여름은 열정적인 계절이다. 손바닥만한 아니 손톱만한 틈, 흙만 있어도 무언가를 틔우고야 마니까.


딱, 열흘만이다.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가 돌아온 것이. 그간 장마가 시작됐고 태풍도 다녀갔다. 좋아라, 환호하며 경주를 했을 잡초들, 남의 마당이 폐허가 되거나 말거나, 몇 그루 심은 고추 모가 양분이 부족해 크거나 말거나, 하나 얻어다 심은 토마토가 허리를 구부리거나 말거나, 땅이란 땅은 온통 잡초군의 세상인 것이다.


쓸고 닦고 빨고 널며 허기가 지는 줄도 모르고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은 오직 내 집이라는 공간에서만 누릴 수 있다. 오매불망 집 생각에 애가 닳은 나란 인간은 집이 아닌 어디서도 쉴 수가 없다. 어떤 편리, 감각적인 디자인의 부엌이나 욕실의 번쩍임에도 내 심신은 유혹당할 줄 모른다. 좋은 것, 맛있는 것, 아름다운 것도 집을 떠나면 온전히 즐겁지가 않다. 마치 붙박이장처럼 고정된 자리에서만이 제 기능을 하는 인간마냥.


아침나절 뜸했던 비가 또 내린다. 고개를 살짝 돌려 잿빛 하늘과 앞집과 옆집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센다.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가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다. 부러진 감나무가지에 어느새 집을 짓고 살고 있었던 모양인데, 고스란히 내리는 비를 맞아야 하는 곳이다. 거미는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감행할까 아님 제 집을 지킬까. 고층의 아파트에서는 결코 만끽하지 못할 지붕을 가로지르는 전선과 전봇대가 젖어간다. 이것들이 그리웠다. 사방팔방으로 가로지르는 전선들로 분할된 하늘이 보이는 내 방 창문 앞의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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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7-11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으며 한 폭의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립니다.
그리고 가슴께가 따듯해져 오는군요.
집이 최고죠.
방랑벽이 있는 저도 점점 집이 제일 좋아집니다.
단독주택의 단아하고 정갈한 그림을 상상할 수 있어 감사해요

날개 2006-07-11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집만큼 편한 곳이 없죠..^^
나이가 들수록 더하더군요.. 내집 사랑이...

겨울 2006-07-11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건강하시죠? 최근 병원과 가까이 하다보니 아픈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요. 저마다 사연이며 사정들도 천태만상인 게, 사는 게 허무하기만 하더군요.

날개님, 맞아요. 나이가 들수록 집에 대한 애착이 집착에 가까워져요. 어려서는 집을 떠날 궁리만 했었는데 말이죠. ^^

잉크냄새 2006-07-12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말씀처럼 님의 집 앞을 한동안 서성거리다 온 것 마냥 눈에 선합니다.

겨울 2006-07-1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비 피해 없으신지요. 제가 사는 곳은 혜택받은 땅인지라 적막, 우울한 가운데 열심히 TV만 시청합니다.
 

 

담당 의사의 견해는 단호하다. 할머니의 상태는 치매와 함께 우울증을 동반하고 있으며 약물 치료는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적적한 치료, 본격적인 치료라는 약물이 문제인데, 환자의 상태가 가족들이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안 좋을 거라는 얘기다. 물론 의사는 최악의 상황을 설명한다. 결코 낙관하거나 희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다. 자신의 부모가 똑같은 상황에 처해도 마찬가지의 치료를 할 거라고. 기타 연민이나 미련은 싹둑 자르고 단호히 병의 심각함을 인정해야 한다고.


할머니는 병원을 싫어한다. 아니 멀쩡한 인간이라면 그런 곳, 사방이 인지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부유하는 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음이 당연하다.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할머니에게 치료가 끝나면 집으로 가자는 설명이 납득될 리가 만무하다. 식사 거부, 가족 이외의 의사 간호사 간병인을 향한 폭언과 반항을 멈추지 않는 할머니를 계속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게 과연 옳은가. 진행의 완화를 목표로 눈 딱 감고 참아야 할까. 종일 전화하고 반문하고 회의하지만 답이 없다. 조기 치료는 필수라고 한다. 문제는 치료기관의 부족이다. 현재 입원한 곳은 거리적으로 너무 멀고 전문 간병인이 다수의 노인들을 감시 돌보는 곳이다. 할머니만의 특수성, 할머니의 인격과 정서를 존중하는 치료 혹은 돌봄을 요구하는 것은 가족의 문제다. 그 곳에 있는 이상은 거기만의 방식과 처치를 따르라는 것이다. 조목조목 따져드는 의사의 설명과 대응에는 바늘 구멍만한 틈도 없다. 설령 있다 해도 사소한 불평불만으로 치부된다. 이 지역에서의 최고의 시설이라고 자부한다는 다른 곳을 알아보아도 이 이상의 대우는 받기 어렵고 일반병원에서는 애초에 받아주지도 않을 거라는 단호하고도 단호한 태도와 말투에 그저 할말을 잃을 뿐이다.


집으로 모셔서 약물치료와 함께 간병을 하고 싶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열이면 열 다 코웃음이다. 일단 해보자는 생각이 무모하고 어리석은 건가. 최악의 상황만을 말하는 사람들 말고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면을 보는 사람의 조언이 간절하건만 어딜 찾아보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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