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의 개인 서기관이었던 에우메네스. 아리스토텔레스와 조우하는 1권을 비교적 유쾌하게 읽었고, 2권도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꿈속에 등장하던 여인의 정체와 함께 잔혹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그때도 넌 울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조차도 에무메네스는 놀라거나 의문을 품지 않는다.  노예 카논의 설명대로 살해된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는 순간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24명의 남자들을 상대로하여 대등하게 결투를 벌이는 여인의 동작 하나 하나를 정확하게 기억하면서 정작 그녀가 자신을 낳아준 엄마였다는 사실만은 기억하지 못했던 에무메네스다.   

그가 어찌하여 훗날 알렉산더 대왕의 서기관이 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양부의 예언처럼 남들과 다른 비범한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용맹성과 잔혹함으로 유명한 스키타이인 여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는 본능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깨우쳤다. 또한 갑작스럽게 귀족 집안의 도련님의 신분에서 갈곳없는 노예로 전락하였어도 운명을 비관하지도 않는다. 스키타이인 아버지와 엄마를 살해한 사람들 속에 있지만 도망노예 트라쿠스의 비극적인 말로처럼 맹목적인 복수를 꿈꾸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무메네스는 어떤 식의 복수를 하고 갇힌 새장에서 달아날 것인가.  그의 몸과 정신에는 부정할 수 없는 스키타이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전쟁에서 쓰러뜨린 적군의 머리가죽과 손가죽 혹은 전신가죽을 벗겨 두건이나 주머니, 깃발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스키타이인들.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그 열 배의 복수를 하였다는 민족. 분명 에무메네스는 스키타이인이다.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광기의 정체가 낙천적이고 재치있는 성격과 어우러져 어떤 형식으로 드러날 지 궁금하다.

역시, '기생수'의 작가답다. 대단한 흡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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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6-01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기생수...

겨울 2005-06-0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아직 안 읽으셨어요? 참 반갑고도 친숙한 그림이지요? 읽는 내내 가슴이 뛰더군요.

panda78 2005-06-0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스토리에 1권밖에 못 읽었는데 2권이 나왔군요. 기생수도 그렇고 칠석의 나라도 그렇고 다 좋았는데, 이번 것도 역시나 마음에 들었어요. ^^

겨울 2005-06-0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판다님도 읽으셨군요. ^^ 뒷 얘기가 궁금해 죽을 지경입니다. 그리운 그림에 끌려 '기생수'도 다시 읽어보고 예전의 기억과 다른 점을 발견하는 기쁨도 누렸지요. ^^

날개 2005-06-02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장바구니 넣어놨는데.. 낼 주문할거예요..^^

겨울 2005-06-0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전 아직 '유레카'를 읽질 못했네요.
 

 

일요일 낮,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았다. 오랜만에 맡는 풀냄새, 흙냄새에 괜히 맘이 설레는데, 잡초 뽑힌 자리마다 이름모를 벌레들이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삭막한 시멘트 마당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잡초도 생명이라고 신기하게 바라만보다가 그것이 커서 씨를 남길까봐 기어이 뽑아 없앴다. 감나무는 노란 감꽃을 피우고, 빠트리고, 화단에는 정체모를 식물 두어 그루가 나날이 자라고 있다. 무슨 꽃을 피울지 궁금해서 두고 보는 중인데, 꽃은커녕 키만 큰 잡초로 자랄 가능서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때때로 꽃이건 풀이건 마음껏 자라도록 내버려두고 싶지만 사람도 없는 집이라고 흉볼 것이 걸렸다. 달력을 보니 어제가 소만(小滿)이다. 산과 들판이 신록으로 물드는 시절, 보리가 가을의 벼처럼 익어가고 죽순이 절정으로 자라는 입하와 망종 사이의 절기.



小滿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은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소만(小滿) 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소만(小滿) 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덮어다오


나희덕의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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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5-22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4000

서재 지붕이 문득 눈에 들어오네요. 앙상한 나뭇가지들......근사합니다.


겨울 2005-05-2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늘은 종일 빈 화단에 고추를 심을까, 토마토를 심을까 아님 가지를 심을까 궁리를 했어요.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요. 아침 저녁 부지런히 물을 길어 나르기가 두려워 그냥 지나가려다 게으른 습성을 고쳐야지 싶어서요. 로드무비님, 이벤트 중이신 책 '사는게 거짓말 같을 때'를 마침 주문 넣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기대 반 걱정 반이어요. 너무 가슴 아픈 얘기는 읽기도 쓰기도 겁부터 납니다.

잉크냄새 2005-05-23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이건 풀이건 마음대로 자라도록 내버려두고 싶은 마음, 공감이 가네요.

겨울 2005-05-2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어디 멀리 다녀 오셨나요? 아님 바쁘셨나요?
 
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세 가지 변명을 하자면, 너무 빨리 읽혀서, 너무 짧아서, 너무 놀라서 앞 이야기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읽었는가를 떠올리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읽자마자 구석으로 던져버리고 거들떠도 안 보다가 뒤늦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잔상을 끌어 모으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뭐든 뱉어내지 않으면 그 기억들이 영영 딱딱하게 굳어버릴 것만 같아서다. 기록의 의미는 크다. 중구난방으로 쌓여있는 책 무덤 속에서 살아남는 건 어떤 형식으로든 기록되어진 책들뿐이다. 


남녀 다섯 사람의 동거는 좀 기묘하긴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고, 각각 소소한 문제들을 끌어안고 있지만 그것도 새롭거나 특별할 건 없다. 세상에는 대책을 마련하고 사는 사람보다는 대책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이 훨씬 많고, 일본인이 쓴 일본 젊은이들의 이야기도 그 범주에서 멀지 않다. 타인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나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질색인데, 그것이 소설 속의 사람들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왜 혹은 어째서 라는 의문은 애초에 낳지도 품지도 않는다.


날개 달린 듯 가벼운 이야기를 짐짓 무거운 척 엮어가는 일본인 작가에게 감탄하며 끝은 어째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아마도 했지 싶다. 진짜 끝을 보기 전까지는. 아니, 어째서, 왜, 이 사람은? 코믹한 멜로물이 느닷없이 잔혹극으로 뒤바뀌는 영화를 보긴 했어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가장 신뢰했던 인간이 칼을 들고 덤비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꼼꼼히 빠트린 부분이 없는지 검색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라는 의구심이 마구마구 솟구치는 뜨악한 이야기를 허구라는 이름으로 수긍을 하느냐 마느냐의 사소한 문제가 아직도 날 붙들고 놔주지 않고 있다. 작가의 다른 책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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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5-23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책으로 인해 요시다 슈이치에 반해버렸지요. 그 이후에 실망도 하고, 역시하는 생각도 했는데, 결국 지금도 주목하고 있답니다..;;;

겨울 2005-05-23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공짜로 얻은 책이라고 성의없이 대충 읽었어요. '파크 라이프'가 가장 끌리고, '동경만경'도 흥미로울 듯 싶은데, 일단은 서점에 가서 실물을 봐야겠네요. ^^
 
생태적 경제기적 - 프란츠 알트의
프란츠 알트 지음, 박진희 옮김 / 양문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선진 산업국가의 대다수 사람들은 경제적 빈국들의 인구증가를 최대의 환경문제로 바라보고, 환경문제가 출산율 제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무슨 천박한 논거인가. 우리 행성이 직면하고 있는 중심 문제는 가난한 나라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중심 문제는 부유한 나라들의 잘못된 에너지, 교통정책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자동차가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제어를 해야 한다면 인구 조절이 아니라 자가용에 대한 ‘산아제한’이 필요하다.


생태학적 교통 전환이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자동차의 덫에서 빠져나올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눈앞의 이익과 편리만을 위하여 미래를 저당 잡히는 현실을 알면서도 몰라라하는 자동차만능주의를 저자는 ‘중독’이라고 부른다. 평소 자동차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나 같은 몽상가에게는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아침과 저녁으로 자동차의 흐름을 피해 요리조리 인도와 횡단보도 사이에서 미로 찾기 게임을 한다. 정체된 차들과 소음, 매연 속에서 우리의 미래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밑도 끝도 없는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자동차 대신에 말과 마차가 유유히 달려가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정신없는 성난 파란불 빨간불 대신에 울창한 가로수의 넉넉한 그늘을 꿈꾸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어리석은 잡념이라고 스스로를 질타한다. 몇 년 전만 해도 텅텅 비어있던 골목들은 어느 때부터인가 주차장으로 전락하여 그 좁은 틈새에서 밀고 당기는 싸움을 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사람 하나가 차지하는 공간에 비해 길쭉한 차체가 차지한 땅의 크기를 재면서 사람들이 미쳐가는구나 했다. 애초에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자동차는 이제 인간이 삶을 위협하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자동차를 기반으로 한 개인 교통수단의 억제, 과연 가능할까. 환경파괴를 계산에 넣는 현실적인 에너지 가격의 도입, 철도에 유리하도록 도로를 점차적으로 폐쇄, 주차장 부지 축소, 차 없는 도심 만들기, 여름 스모그가 발생했을 때의 주행 금지, 대중교통으로서의 택시 이용,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이 아닌가. 자전거 도로의 확충, 보행자 도로의 확충, 절실하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자동차 대신 자립’이란 단념이나 포기의 윤리가 아닌 수준 높은 삶의 양식이라고? 물론 미래에는 전기, 태양 수소, 바이오연료로 움직이는 태양자동차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 책은 그런 혁명의 날이 오기까지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개선하고 보존할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에 구속된 인간으로서 살 것인가,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건강한 인간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복잡하다.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자동차 속의 사람을 환경친화적인 느리게 걸어가는 인간이 따라잡을 수가 있을까? 개인의 자각과 실천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익을 포기하지 못하는 집단의 권력 앞에서는 너무 무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의 밥벌이가 너무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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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된장을 단지 째로 업어다 놓은 후로, 요즈음 엄청난 후회를 하는 중이다. 한 달 전, 기온이 갑자기 오르기 시작하면서, 된장독 잘 살피라는 성화에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날씨의 변화와 함께 된장이 끓어 넘치는 현상을 가끔 보았으므로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솟구치는 느낌에 서둘러 전화를 드렸더니, 바가지 가득 덜어 내라신다. 덜어낸 된장을 냉장고에 보관하고 한숨을 돌렸는데, 이제는 웬걸, 된장에 소금을 듬뿍 뿌리란다. 그전에 생된장을 찍어 맛을 보라 하셨는데, 하란다고 해서 손가락에 쿡 찍어 맛을 볼 손녀딸이 아님을 모르시나. 아무래도 올 된장은 싱거운 것 같다고 시금털털한 맛이면 소금을 넣어 잘 섞어주어야 한단다. 난 한여름도 아니고 이만한 기온에 별일 없을 거라고, 시간이 없다는 둥의 핑계를 대며 장독대에 오르는 걸 계속 까먹고 있었다. 아침이면 아침대로 정신없고, 저녁엔 해질녘에 들어와 어두컴컴한 장독대에 오르는 일 따위를 기억할 리가 없다. 하루걸러 하루를 그렇게 할머니의 전화를 받고 알았다고 끊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드디어 일요일 아침에 작심을 하고 장독대에 올라가 노란 송화 가루 쌓인 독들을 씻어주고, 닦아주고 할머니의 염원인 된장독을 열어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할머니에게 있어 고추장과 된장은 또 한 해를 살아가는 목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안다. 그 된장 맛이 변하여 망치는 것은 할머니를 고뇌의 나락으로 미끄러트리는 일이다. 하지만 건성건성 덜렁이인 내가 노란 된장을 뚫어져라 바라본들 무엇이 잘못되어 가는지 알 턱이 없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원래 그 맛인 것 같기도 하고, 할머니의 당부대로 소금 두어 주먹을 넣어주고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다 저녁에,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어댄다. 내 전화기지만 정말 시끄럽고 듣기 싫은 소리다. 화들짝 놀라서 달려가 식탁 위의 휴대폰을 열자마자, 된장이 어쩌구 하는 할머니의 긴 사설이 다시 시작이다. 그놈의 고추장 된장을 주식으로 먹는 것도 아니고, 할머니처럼 끼고 앉아 매일 바라볼 수도 없는 일이라고, 그렇지만 잘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행여 일이 생기면 전화드릴 터이니 저녁이나 맛나게 드시고, 따뜻하게 주무시라고, 높았던 목청이 점점 가라앉아가면서 안부 인사를 마쳤다. 울컥하니 솟구치는 무엇 때문에 기분이 눅눅해졌다.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저녁 바람이 찼다. 감기 조심하시라 했더니 당신보다는 내가 걱정이라고 기어이 한 말씀을 하신다. 속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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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5-16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걱정하시는 할머니가 계시니 좋으시겠어요. 된장에 웃소금치는 거 번거로운 일도 아니니 잘하시고 맛난 된장 드세요^^

겨울 2005-05-1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를 생각하면 결국 뒤에 남겨지는 것은 나라는 걸 깨닫게 되어 서글픕니다. 내가 살 몫을 뚝 떼어 드리고 싶어요.

물만두 2005-05-1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어쩝니까. 그게 사람 사는 것인 것을... 계실때 많이 잘해드리는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