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몸으로 춤을 추는 여자였다
쥘리 보니 지음, 박명숙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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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시오랑의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를 생각했다.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 토로하며 죽음의 환희를 기다리는 사색자의 글을 곱씹으며 함께 어둠의 나락으로 빠졌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왜 우리는 태어나서 이 모든 고통을 경험해야 하는지, 죽음의 공포를 경험할 것을, 신은 왜 나를 이 곳에 내려놓았는지 의문은 점점 내 머리를 짓눌렀다.

 

그 책을 떠올린 것은 출산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 이 책의 내용 때문일 것이다.

출산은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것이고 죽음을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던 한 문장이 이 책을 깊이있게 한다. 스트립댄서를 선택한 삶, 그 안에서 생겨난 사랑, 사랑이 만들어 낸 생명의 신비, 신비로운 경험이 제공한 꺾여버린 날개, 날개가 땅을 끌리는 순간 보이기 시작한 수많은 여자들의 고통과 환희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는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전 스트립 댄서의 추억과 현실의 비애, 그리고 그녀가 경험하는 다양한 산모의 모습들은 자유를 갈망하나 현실에 좌절하고 마는 사람들의 모습과 대부분이 공유하는 혹은 공유할 삶의 한 부분 속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나는 사람들의 심리를 보여준다.

 

원제가 <2호실chambre 2> 이기 때문에 한국어 제목이 더욱 선정적으로 비춰졌다. 마케팅 전략이라기엔 탐탁치 않은 원제와 번역본 제목 사이의 갭이 불편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알고난 후 원제보다는 한국어 제목에 더 마음이 간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것이다. 우리가 가장 자유로웠을 때는 아마 태어난 직후가 아니었을까. 그 때 우린 모두 알몸이었다. 알몸으로 태어나서 세상을 향해 울음을 터트린 그 순간, 우린 가장 원시적이었고 삶의 기운이 가장 충만했으며 그 어떤 것도 가릴 것이 없었기에 순수한 감정은 표출되었다. 배가 고프면 울었고 사랑 받고 싶으면 울었다. 그 가장 원시적인 자유의 모습이 베아트리체의 스트립 댄서에 대한 열망으로 대변되는 느낌, 그것이 아마 그녀를 가장 고귀하게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어 제목은 꽤나 책 내용을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물론 그것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목차가 매력적이다. 특히 목차의 두 번째 페이지를 옮기자면

- 오늘 저녁에는 비가 내린다 61

- 6호실 67

- 나는 현대식 카바레에서 춤추던 시절의 삶을 사랑했다 74

- 나는 죽었어야만 했다 82

- 7호실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건 분명하다 87

- 춤을 춘다 92

- 그래서 10호실에 가면 언제나 화가 난다 102

- 삶을 계속되었다, 콘서트와 길처럼 105

- 8호실에는 아이를 잃은 부인이 있다 110

 

이 목차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감각적인 목차는 때로, 제목의 선정성을, 내용의 다소 부실함을 극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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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
에밀 시오랑 지음, 전성자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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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헝가리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라는 책을 썼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작가는 유대인으로서 겪게 될 고통을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의지로 아이를 낳기를 거부하고 태어날 수 조차 없는 자식을 위한 기도를 슬픈 언어로 쓰기 시작한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강요되어진 삶 앞에서 늘 무능했었다. 내가 경험한 삶의 공포를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늘 결혼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출산은 거부하겠다고 말하곤 했었다. 누군가 책임지지 않는 생명들, 차라리 그 생명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편이 (내 기준에서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무고함이 수장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모두가 그 앞에서 무력했다. 아니, 누군가는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 힘을 수많은 생명과 희망을 파괴하는 데 사용했고 그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수장시켰다. 아니, 그들의 희망 역시 수장 당했다. 이 현실의 지옥 앞에서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내가 살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이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을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나는 그 선을 지키며 살아야겠다고. 지옥불 속에 선택하지 않은 생명을 지닌 아이를 밀어 넣지는 말자고. 한 국가의 정책은 사건을 경험하며 누군가에겐 무의미해진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건, 희망이라는 형태 없는 낙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희망은 내가 언젠가는 죽게될 것이라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선택할 수 없는 희망이다. 나는 왜 삶이라는 것에게 선택 받았으며, 내가 의도하지 않는 출생이라는 사건 때문에 이렇게 긴 시간을 (그리고 앞으로 더 긴 시간을) 고통 받아야 하는 것일까.

여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20세기 초의 작가가 있다. 에밀 시오랑. 그의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이런 시간을 버티는 데에는 훨씬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나, 사람은 때론 자신만이 이런 생각을 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데 위로받는다. 내 고통을 타인에게 분산함으로써 우리의 고통은 조금 보상받는다.

살면 살수록 살아왔다는 것이 점점 더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p. 144)

그의 글은 완벽하게 나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의 염세주의는 이 황량한 세상에 적합한 기질이지만, 지독한 개인주의는 적합하지 않을 때도 있다. 최근 지독한 개인주의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병적인 나르시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태어나기 전으로 가고 싶은 욕구,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는 회한, 그런 것들이 나의 20대 이후를 지배했기에 삶을 부정하고 싶고 스스로를 견뎌내며 끊임없이 나를 나로부터 분리하며 무의 상태로 버텨야 하는 심정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알 것도 같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쨌든 태어났지 않은가.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결국은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이 삶은 거부하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그것 마저 다 거부한 채 마치 난 혼자요, 당신들의 천박함과는 다른 고귀한 천박함으로 사상을 이어가고 있는 고독한 존재요, 하는 것은 섬세한 감정은 아닌 것이다. 그건 그토록 버리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으로의 천착일 수밖에 없다.

내 사전 속에서 하나둘씩 어휘를 없애 버렸다. 학살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단 하나의 어휘 - 고독. (p. 129)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삶은 축복이고 현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것이라는 긍정의 힘을 전파하고 있을 때, 태어나는 것은 고통이고 사는 것은 고통을 견디는 일이며 죽음만이 축복이라는 이 기묘한 논리는 더 큰 빛을 발한다. 어쩌면 타인의 선물보다 작아보이는 내 선물에 괴로워 하는 것보다는 견딤에 익숙해져서 무의 상태가 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행복하게 인생을 꾸려가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자신에 대한 폭력은 자신을 체념하게 만들고 그것은 삶을 지속시키는 법이다. 이래저래 모든 것은 양자적인 것이 대립하고 모순적이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 내 자신을 견딥니다. (p. 53)

또 찰나의 현실이 소멸되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전 문장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이 남긴 문장. 시간은 문장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그의 시간을 읽으며, 내 시간을 버리며 조금은 위로 받는다. 그의 병적인 나르시즘과 염세주의적 성격이 나를 견디게 했다. 타인의 나르시즘에 치를 떨었지만 때론 악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람을 살게 한다.

나보다 먼저 존재했던 시간들, 내가 기억할 수 없지만 그리워하는 시간들, 이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현재의 순간에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유일하게 유혹을 느끼는 것은 나보다 먼저 존재했던 것, 나를 여기서 멀리 데려가는 것, 즉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숱한 순간들, 바로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그 순간들 뿐이다. (p. 12)

하지만 난 여전히 살아갈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무의미해질 수많은 일들을 지켜보는 증인이 될 것이다. 그것은 참 무서운 형벌이지만, 태어남을 선택하지 않았듯 그 벌 역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 난 적어도 저 악의 근원들의 명령에 따라 수장 당할 수는 없다. 그게 내 삶에 대한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기에, 어디 한 번 끝까지 지켜보며 살아보련다.

이 시대에 대해 분노가 치밀 때면, 앞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 뒤를 이을 사람들은 우리 시대에 대해 어떤 선망을 가질까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달랠 수 있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천국을 그리워 할 줄 아는 오랜 연륜을 지닌 구인류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 이후의 사람들은 그리워할 그 무엇도 갖지 못할 것이다. 천국이라는 개념조차, 천국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p. 180)

+ 아, 이 책의 제목에 대해 한 마디 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의 원제는 De l`inconénient d`être né 태어남의 불행, 뭐 이런 건데 그러니까 부제가 훨씬 정확한 제목이다. 이 감성 폭발하는 제목은 뭐냐고. 차라리 부제를 제목으로 하고 표지 이미지를 좀 다른 방향으로 했음 훨씬 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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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고양이와 살아가기
댄 포인터 지음, 여인혜 옮김, 이미경 감수 / 포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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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함께 살기로 처음 결심했던 그 때를 생각한다. 15년 이상 함께 할 수 있을지, 결혼 육아 이사 등 예측불가능한 일들이 발생했을 때, 함께 한 시간을 배신하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지금의 이 마음이 변질되기 쉬운 가벼움은 아닌지, 꽤 오랜 시간을 두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결심이 섰을 때 내 고양이를 만났다. 

 

이미 몇 차례 반려동물과의 이별을 경험했기에, 아주 작은 생명을 받아든 그 순간부터 더 잘 살고 싶었다. 먼 훗 날 우리가 이별을 하게 될 때, 그 동안 이 녀석들이 행복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면 난 내 고양이로 살아줘서 고맙다고 웃으며 보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 보호자들은 종종 우리가 나이 먹는 만큼 그들도 늙어가고 있음을, 그리고 그들의 수명은 우리보다 짧음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머리로는 알겠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다. 벌써 4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있는 내 고양이를 바라보면서도 아직 마냥 아기 고양이 같기만 한 심정과도 유사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들에게도 시간은 흘러간다. 그 시간은 이들을 약하게 할 것이고, 때론 병에 걸리게 할 것이며, 결국 우리와 헤어지게 만들 것이다. 그 과정을 조금이라도 잘 보낼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없을까. 이 책은 그런 고민에서 시작 되었을 것이다. 20년 넘게 함께 살던 고양이가 어느 날 갑자기 아팠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며 안타까웠을 한 애모인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나이를 먹으며 나타나는 증상들과 가능한 질병들에 대해 꼼꼼히 정리되어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질문거리를 던져 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을 여러 사례와 함께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낯설고도 슬픈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게 돕는다. 

물론 고양이와 함께 사는 가구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수의사들의 관심과 지식들이 늘어난 현재 상황에서 다소 올드해 보이는 정보들도 담겨있지만, 그 바닥에 깔려있는 우리의 가족이라는 점과 우리가 돌봐줘야 하는 동물이라는 점은 변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간직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두고두고 답하면서, 안에 담겨있는 내용들을 두고두고 습득하면서 언젠가 찾아 올 날들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고모는 세 마리의 개와 함께 살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들에게 이런 말들을 했다. "아프지 말고, 편안하게 가." 습관처럼 그들에게 중얼거리던 주문은 꽤나 효과적이었어서 그들은 정말 아프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있는 것처럼 편안히 눈을 감았다. 

물론 그 시간동안 그들을 괴롭힌 노후의 증거들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 현명한 이별을 보며 내 고양이의 노년기에 대한 생각은 확고해졌다. 그 확고함에 이 책은 조금 더 깊은 실행을 안겨 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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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죽이기
아멜리 노통브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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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읽었다. 작가만의 재기와 상상력에 빠져 한동안 노통브의 책들을 다 섭렵하다가 어느 순간 손을 떼게 되었었다. 가독성과 재미, 두 가지 요소가 있는 작품을 쓰는 작가임에는 틀림 없었으나, 어느 순간 그녀의 패턴이 비슷해 보였던 탓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 때 느꼈던 그런 감정마저 희미하게 만들기 마련이라, 문득 궁금했던 것 같다. 다작한다는 그녀가, 프랑스에선 노통브 신드롬을 일으킨다는 그녀가, 여전히 재미있는 글을 쓰고 있을지가 말이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노통브의 시간에 관심이 갔다. 제목 『아버지 죽이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풀어내고 있을 것임을 짐작하게 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이젠 진부한 그 소재를 풀어냈을지 호기심이 일었다. 분명 노통브라면 독특한 방식으로 진부하지 않게 그 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맞았다. 노통브는 자신의 방식으로 수 많은 방식으로 되풀이 되어 왔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풀어내야 하는 주인공 조는 아버지가 없다. 어머니는 너무 많은 남자와 잠자리를 했기 때문에 그 중 누가 조의 아버지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어린 조는 그 많은 남자들 때문에 자신의 집에서 쫓겨난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미워해야 하지만 어머니란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고 미워해야 할 아버지는 부재했다. 가족의 부재,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근본적인 상실감은 조에게 가족에 대한 갈망과 더불어 광기를 제공한다.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던 스승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도, 그를 파괴시키고 싶어하는 조의 심리는 크리스티나를 향한 사랑과 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 속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스승인 노먼에게 조는 당신을 아버지로 선택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그가 자라오며 보여줬던 그 모든 행위는 그를 아버지로 인정했던 것이며 그를 넘어서려는 내면과 외면적인 투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소설의 반전은 노먼의 행동에서 보여진다. 보는 순간 자신의 반 쪽임을 알았다던 크리스티나를 외면하고 단지 조의 믿음이 잘못 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긴 시간 동안 조의 뒤를 밟는 노먼의 모습은 자식이 자신보다 잘 되길 바라면서도 자신과의 관계를 끊임 없이 유지한 채 가길 바라는 것으로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부모들의 일반성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가진 기술과 철학을 가르쳤고, 최고가 되길 바래왔지만 결국 관계 앞에서 노먼 역시 자신과 조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박탈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습에서 물고 물릴 수 밖에 없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보여지고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노통브는 여전히 가독성과 더불어 특유의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녀작에서부터 아버지와의 관계를 드러내던 그녀가 이 작품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독립했음을 선언했다. 그렇다면 다음 작품은 어떤 변화된 양상으로 독자를 찾아올까. 그것이 심히 궁금하다. 그 궁금증으로 나는 다시 노통브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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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사람들 - 세계 최고의 독서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말하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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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밑줄이 빼곡하고, 어느 구절은 글자글자를 눈 감고 읽을 수도 있을 정도이다. 책을 읽는 목표가 하나 추가 되었고, 그 목표에는 '알베르토 망구엘'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깔려있다.

- 홍대 포스트 이앨리스

이 책에 대한 짧은 리뷰를 써야 한다면 딱 저 두 문장이면 족할 것 같다.

다니엘 페낙의 <소설처럼>을 제외한 '독서법' 관련 도서들을 불신했었다. 지극히 사적인 취미인 독서가 방법이 필요한 학습처럼 취급되는 것이 싫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다 필요에 의해 한 권, 한 권 읽어보기 시작했고 나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알았다. '독서법'이라고는 하지만 달리 말하면 '독서 에세이'이기도 했고 타인의 책장을 훔쳐보며 그의 취향을 상상하는 즐거운 스파이 게임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알베르토 망구엘을 알았다. <독서의 역사>, <밤의 도서관>에서 엿 본 다독가로서의 그는 놀라웠고, 학자로서의 그는 존경할만 했다. 그런 그가 또 다시 독서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내가 쓴 거의 모든 책이 그렇듯이, 이 책의 주제도 독서다. 독서는 창조적인 활동 중에서 가장 인간적 활동이다. 나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뭔가를 읽는 동물이며, 독서를 넓은 의미로 받아들일 때 독서하는 능력이 우리 인간이란 종을 정의한다고 믿는다. (p.7 서문 중)

전자책 시대가 도래하며 많은 작가들이 책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 했고 종이책이 붕괴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움베르토 에코.장필리프 드 토낙의 대담집인 <책의 우주>에서도 명쾌했고 다치바나 다카시도 그 점을 확실시 했다. 그리고 알베르토 망구엘도 그 결론에는 이견이 없다. 전자 텍스트는 정보의 수집과 보존을 안전하고 용이하게 만들어 주겠지만, 종이책이 가지던 지식의 두께를 가늠하는 것과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 것 처럼'은 만들겠지만 실제로 그럴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과학의 기술은 사람들의 생활을 크게 바꿔 놓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창조성을 띈 독서를 해야 한다, 는 것의 그의 의견이다. 그 주장과 함께 그는 독서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건 단지 텍스트를 읽는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는 문학작품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이슈와 인물들을 끌어와서 세상을 이해하고, 그 이해점과 우리의 독서를 결부시킨다.

문학은 우리를 세상에 다시 묶어준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의식하게 되므로 우리를 더욱 강하게 이 세상에 묶어주는 것이다. (p.36)

결국 문학이란, 책이란 우리와 세상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의 소멸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지식의 창고 역할을 하고 한 눈에 그 두께와 위엄을 펼쳐보이던 종이책이 사라지는 것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보존하고 싶다면, 결국은 독자의 창의적인 노력은 불가피하다.

저자는 이 점을 명확히 한 후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자신만의 독서를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독서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이면엔 양서를 택할 것이 깔려 있고, 양서를 택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다양한 독서 경험이 중요함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한 권의 좋은 책을 읽기 위해 독서를 하고, 그 독서를 바탕으로 또 다른 좋은 책을 찾아 나서며, 그 탐색의 과정에서 성장해 나가는 것일 테다. 그것이 나름의 독서 이전에 깔려 있어야 하는 습관일 것이고 창조성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독자라면 이 세상에서 단단히 살아갈 수 있음도 틀림 없다.

주어진 텍스트 안에 담긴 의미를 파고들 수 있는 독자라면, 텍스트 안에서 윤리적인 문제를 끄집어 낼 수도 있다. 작가가 그 문제를 많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함축적으로만 표현해도 독자의 솔직한 감흥을 이끌어낼 수 있다. 독자는 육감이나, 오래 전에 경험했던 것을 기억해 냄으로써 글에 함축된 윤리적인 문제를 찾아낸다. (p.59)

독자로서의 내 습관과, 내가 가지고 있는 목표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독자 역시도 나름의 목표가 있는 독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문학만 읽는다'는 주변의 편견이나 질타따위에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목표가 이 책으로 인해 조금 바뀌었다. 나는 내 독서를 바탕으로 알베르토 망구엘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이 세상이 문학과 얼마나 결부되어 있으며, 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나아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이 책은 절대적으로 옳았고 언젠가는 닿고 싶은 독자의 산이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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