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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
에밀 시오랑 지음, 전성자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헝가리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라는 책을 썼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작가는 유대인으로서 겪게 될 고통을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의지로 아이를 낳기를 거부하고 태어날 수 조차 없는 자식을 위한 기도를 슬픈 언어로 쓰기
시작한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강요되어진 삶 앞에서 늘
무능했었다. 내가 경험한 삶의 공포를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늘 결혼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출산은
거부하겠다고 말하곤 했었다. 누군가 책임지지 않는 생명들, 차라리 그 생명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편이 (내 기준에서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무고함이 수장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모두가 그 앞에서 무력했다. 아니, 누군가는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 힘을 수많은 생명과
희망을 파괴하는 데 사용했고 그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수장시켰다.
아니, 그들의 희망 역시 수장 당했다. 이 현실의 지옥 앞에서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내가 살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이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을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나는 그 선을 지키며 살아야겠다고. 지옥불 속에 선택하지 않은 생명을 지닌 아이를 밀어 넣지는 말자고.
한 국가의 정책은 사건을 경험하며 누군가에겐 무의미해진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건, 희망이라는
형태 없는 낙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희망은 내가 언젠가는 죽게될 것이라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선택할 수
없는 희망이다. 나는 왜 삶이라는 것에게 선택 받았으며, 내가 의도하지 않는 출생이라는 사건 때문에 이렇게 긴 시간을 (그리고 앞으로 더 긴
시간을) 고통 받아야 하는 것일까.
여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20세기 초의 작가가 있다. 에밀 시오랑. 그의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이런 시간을 버티는 데에는 훨씬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나, 사람은
때론 자신만이 이런 생각을 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데 위로받는다. 내 고통을 타인에게 분산함으로써 우리의 고통은 조금 보상받는다.
살면 살수록 살아왔다는 것이 점점 더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p. 144)
그의 글은 완벽하게 나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의 염세주의는 이 황량한 세상에 적합한 기질이지만, 지독한 개인주의는 적합하지 않을 때도 있다. 최근 지독한 개인주의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병적인 나르시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태어나기 전으로 가고 싶은 욕구,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는 회한, 그런 것들이 나의 20대 이후를 지배했기에 삶을 부정하고 싶고 스스로를 견뎌내며 끊임없이 나를 나로부터
분리하며 무의 상태로 버텨야 하는 심정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알 것도 같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쨌든 태어났지 않은가.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결국은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이 삶은 거부하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그것
마저 다 거부한 채 마치 난 혼자요, 당신들의 천박함과는 다른 고귀한 천박함으로 사상을 이어가고 있는 고독한 존재요, 하는 것은 섬세한 감정은
아닌 것이다. 그건 그토록 버리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으로의 천착일 수밖에 없다.
내 사전 속에서 하나둘씩 어휘를 없애
버렸다. 학살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단 하나의 어휘 - 고독. (p. 129)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삶은 축복이고
현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것이라는 긍정의 힘을 전파하고 있을 때, 태어나는 것은 고통이고 사는 것은 고통을 견디는 일이며 죽음만이
축복이라는 이 기묘한 논리는 더 큰 빛을 발한다. 어쩌면 타인의 선물보다 작아보이는 내 선물에 괴로워 하는 것보다는 견딤에 익숙해져서 무의
상태가 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행복하게 인생을 꾸려가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자신에 대한 폭력은 자신을 체념하게 만들고
그것은 삶을 지속시키는 법이다. 이래저래 모든 것은 양자적인 것이 대립하고 모순적이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 내 자신을 견딥니다. (p.
53)
또 찰나의 현실이 소멸되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전 문장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이 남긴 문장. 시간은 문장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그의 시간을 읽으며, 내 시간을 버리며 조금은
위로 받는다. 그의 병적인 나르시즘과 염세주의적 성격이 나를 견디게 했다. 타인의 나르시즘에 치를 떨었지만 때론 악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람을
살게 한다.
나보다 먼저 존재했던 시간들, 내가
기억할 수 없지만 그리워하는 시간들, 이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현재의 순간에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유일하게 유혹을 느끼는 것은 나보다 먼저 존재했던 것, 나를 여기서 멀리 데려가는 것, 즉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숱한 순간들, 바로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그 순간들 뿐이다. (p. 12)
하지만 난 여전히 살아갈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무의미해질 수많은 일들을 지켜보는 증인이 될 것이다. 그것은 참 무서운 형벌이지만, 태어남을 선택하지 않았듯 그 벌 역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 난 적어도 저 악의 근원들의 명령에 따라 수장 당할 수는 없다. 그게 내 삶에 대한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기에, 어디 한 번 끝까지 지켜보며 살아보련다.
이 시대에 대해 분노가 치밀 때면,
앞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 뒤를 이을 사람들은 우리 시대에 대해 어떤 선망을 가질까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달랠 수 있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천국을 그리워 할 줄 아는 오랜 연륜을 지닌 구인류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 이후의 사람들은 그리워할 그 무엇도 갖지 못할
것이다. 천국이라는 개념조차, 천국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p. 180)
+ 아, 이 책의 제목에 대해 한 마디 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의 원제는
De
l`inconénient
d`être
né
태어남의 불행, 뭐 이런 건데 그러니까 부제가 훨씬 정확한 제목이다. 이 감성 폭발하는 제목은 뭐냐고. 차라리 부제를 제목으로 하고 표지
이미지를 좀 다른 방향으로 했음 훨씬 낫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