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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혼란을 많이 겪었다.
우리 집은 석가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으나,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아침마다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고, 가끔은 점심시간에 미사를 갖기도 했고, 5월이면 성모마리아를 기리는 날을 가졌다.
친가에 가면 할머니는 늘 염주를 한 알 한 알 세시며 관세음보살을 찾으셨고, 외가에 가면 할머니는 묵주를 한 알 한 알 세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찾으셨다.
아빠는 나에게 이제 너도 종교를 가질 때가 되었다고, 무언가 신적인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마음을 의지할 강한 상대를 만나는 것이라 하셨다. 그러니 가족에 구애받지 말고 니 마음에 와 닿는 종교를 한 번 가져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난 아직까지도 종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문제에 있어선 초등학교 그 시절의 혼란감을 벗지 못한 채다.
어차피 신도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 무엇을 숭배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저 믿음이 있으면 되는거라고.
그래서인지 종교적인 색체가 너무 짙은 문학작품들은 늘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다.
꼭 맨 살에 까칠까칠한 니트를 입는 기분이다. 살이 쓸려서 가렵고 따끔따끔한데도 억지로 입고 있어야 하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코엘료 아저씨의 작품은 이상하게 그렇지 않다. 늘 종교적 색체가 다분히 짙은 작품을 쓰고 있지만 이상하게 코엘료 아저씨의 작품을 접할 때면 마음이 편해진다.
강한 종교적 의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뭔가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을 추구하려는 그런 맛이 난다.
그래서 난 코엘료 아저씨가 좋다.
많은 사람들이 코엘료 아저씨의 신간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아저씨의 가장 처음 작품이다.
그리고 만약 코엘료 아저씨의 작품들을 흠모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이 책은 그동안 아저씨가 연금술사나 베로니카, 미스 프랭, 피에트라 강, 오자히르에서 한 이야기들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언젠가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춘 코엘료 아저씨는 이런 말을 했었다.
"책은 저절로 써지는 것입니다." 라는...
이 책에서 아저씨는 직접 순례의 길을 걸으며 얻은 경험과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아저씨가 말하는 그 여정이 기행문같지 않고, 마치 소설처럼 전개되지만 어느새 아저씨와 함께 수행하고 느린 걸음을 걸으며, 무언가를 발견해 내는 내 자신을 볼 수 있다.
순례의 길에서 아저씨를 안내한 페트루스는 이 여정을 마치고 자신은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면, 글을 쓰거나 무용을 만들으라고 했다.
그리고 아저씨는 그 여정으로 글을 써냈다. 마치 아저씨의 말 처럼, 책이 저절로 써지는 것 처럼 산티아고 순례 중에 앞으로의 모든 이야기를 떠올렸음에도 책을 쓰게 될거라곤 생각하지 못하면서 글을 써 냈다.
자신의 검을 찾으려는 일념으로 길을 떠난 코엘료 아저씨처럼, 우린 인생에서 늘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 내가 왜 그것을 찾으려 하는가는 생각하지 않은 채, 어느 새 그저 목표를 향해 무작정 돌진만 하고 있다.
그러다보면, 진정한 자신과 그 목표를 향하는 진정은 어느새 사라진 채 그저 결과만이 중요시 될 뿐이다. 목표를 달성하느냐 아니면 달성하지 못하느냐.
그렇게 목표를 달성하면, 그 만족감은 잠시, 또 다른 목표가 다가온다.
달성하는 것이 어느 새 목표가 되어버리고, 또 그 목표를 향해 무작정 돌진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은, 단지 목표를 향해 우리 혼자 뛰어가는 길이 아닌 평범한 모두의 길이며 믿음과 행복을 추구하며 그 행복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알아가는 길인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 코엘료 아저씨의 작품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그러나, 특정 종교에 대한 아저씨의 신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단지 그 종교에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닌 인류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어느새 아저씨를 따라 산티아고의 길을 여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하지만 그것이 종교적인 순례가 아닌 정신적인 순례를 하고 있는 것임을 안다면, 이 책의 진정한 맛을 느낀 것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어느새,나도 가리비껍질을 단 순례자가 되어산티아고의 길을 걷고 있다.
무한한 경험과 자신을 발견해 가면서.
그리고 그 산티아고의 길이 멀지 않음을, 어쩌면 바로 우리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좋았던 구절>
평화는 여전히 계속 자라나고 생성되는 과정 속에 있었다.
세상은 알고 있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격렬한 지진이나 태풍과 폭우 역시 자연의 여정 중에 있는 순환이라는 것을.
자연 역시 계시를 찾아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언젠가 나도 알 수 있을거라고.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에 가야 할 순간을
거스리지 못하고 결국 제때 그곳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