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투안의 무덤 어스시 전집 2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지연,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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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가 무너졌다.
 어스시 전집 2권 <아투안의 무덤>, 2권에서는 어스시의 위대한 마법사인 새매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라 믿었다.
 1권에서 그의 자아를 찾는 여행이 진행되며, 후에 이 사람은 위대한 현자가 되었다고 이야기 했기 때문에, 그 여행 이후의 이야기가 2권부터는 진행되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는 산산히 무너졌다.
 아투안의 무덤에서는 새로운 화자가 등장한다. 아르하라는 칭호 아래 살아가는 테나의 이야기이다.
 
 '이름이 먹힌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르하는 아투안 무덤의 어둠들을 모시며 살아가는 최고 무녀이다.
 그녀는, (꼭 달라이라마 처럼) 최초의 무녀이며 마지막 무녀로, 환생을 거듭한다 믿고 있는데 그녀가 죽은 시간과 동일한 시간에 태어난 여자아이를 찾아 내 그녀를 5년간 지켜보며 건강하게 자랄 경우 그녀가 아르하가 환생한 아이라 믿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아투안의 무덤으로 오게 된 아이는 유일무녀로서 교육을 받는다.
 한 번 환생을 함으로써 그녀가 잊게 된 전생의 기억들을 다시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르하는 뭔가 이상하다. 그녀에게 전생의 기억들을 이야기 해주는 사르라는 무녀가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할 때 마다, 정말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옛날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그 것이, 들은 이야기들이 조합되어 겪은 일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진짜 기억이 나는 것인지는 아르하도 잘 모른다.
 낯선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올 수도 없고, 자신들도 그 지역 외를 나갈 수 없는 생활이지만 아르하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상으로 여겨지던 날, 언덕 지하 미로를 훔쳐보는 구멍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낯선 남자가 보물을 노리고 침입한 것이다.
 그들의 규율에 따르면, 그는 죽음을 당해 이름 없는 자들에게 바쳐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르하는 이상하게 그를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살려둔다. '새매'라는 그 남자를...
 이 책은, 그렇게 1권과 이 책을 연관시킨다.
 아르하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는 '새매'와 '새매'가 가져오는 최고 보물의 반쪽인 고리를 통해.
 그 고리가 있었던 곳, 1권에서 '새매'인 게드가 여행하던 중 한 외딴 섬에서 만난 단 둘이 살아가던 두명의 노인 중 노모가 게드에게 준 그 고리로 1권과 2권을 교묘하게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아르하는 새매와 함께 자신을 묶어두던 어둠의 무덤에서 빠져나가 자유를 되찾게 된다.
 
 이 책 역시, 1권과 다름없는 것이 있다면 자기의 자아정체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지 그 대상이 게드가 아닌, 테나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1권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정체성을 찾는 게드가 테나가 자기 정체성을 찾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
 테나 역시 아르하를 버리고, 테나라는 자기 자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알려줘서는 안 되는 그 이름을.
 
 3대 환타지 소설 중 하나라고 손꼽아지고 있는 작품이지만, 전 작품에서도 말했듯 조금 특별한 환타지이다. 철학적인 요소를 내내 이야기 속에 간직한 채 전개해 나간다.
 사람에게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잊지 않는 것이다.
 
 2권은 1권보다 조금 더 쉽게 읽혀졌다.
 철학적인 냄새가 폴폴나는 1권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이 책이 주는 특유의 환타지 맛에 조금은 당황했던 것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내용을 전개해가는 2권이 낯설지 않다.
 어스시 전집을 완독하기엔 아직 몇권의 책이 더 남아있지만, 기대가 된다.
 다음엔 어떤 내용으로 나를 이끌어 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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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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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혼란을 많이 겪었다.
 우리 집은 석가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으나,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아침마다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고, 가끔은 점심시간에 미사를 갖기도 했고, 5월이면 성모마리아를 기리는 날을 가졌다.
 친가에 가면 할머니는 늘 염주를 한 알 한 알 세시며 관세음보살을 찾으셨고, 외가에 가면 할머니는 묵주를 한 알 한 알 세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찾으셨다.
 아빠는 나에게 이제 너도 종교를 가질 때가 되었다고, 무언가 신적인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마음을 의지할 강한 상대를 만나는 것이라 하셨다. 그러니 가족에 구애받지 말고 니 마음에 와 닿는 종교를 한 번 가져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난 아직까지도 종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문제에 있어선 초등학교 그 시절의 혼란감을 벗지 못한 채다.
 어차피 신도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 무엇을 숭배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저 믿음이 있으면 되는거라고.
 그래서인지 종교적인 색체가 너무 짙은 문학작품들은 늘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다.
 꼭 맨 살에 까칠까칠한 니트를 입는 기분이다. 살이 쓸려서 가렵고 따끔따끔한데도 억지로 입고 있어야 하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코엘료 아저씨의 작품은 이상하게 그렇지 않다. 늘 종교적 색체가 다분히 짙은 작품을 쓰고 있지만 이상하게 코엘료 아저씨의 작품을 접할 때면 마음이 편해진다.
 강한 종교적 의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뭔가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을 추구하려는 그런 맛이 난다.
 그래서 난 코엘료 아저씨가 좋다.
 
 많은 사람들이 코엘료 아저씨의 신간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아저씨의 가장 처음 작품이다.
 그리고 만약 코엘료 아저씨의 작품들을 흠모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이 책은 그동안 아저씨가 연금술사나 베로니카, 미스 프랭, 피에트라 강, 오자히르에서 한 이야기들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언젠가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춘 코엘료 아저씨는 이런 말을 했었다.
 "책은 저절로 써지는 것입니다." 라는...
 이 책에서 아저씨는 직접 순례의 길을 걸으며 얻은 경험과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아저씨가 말하는 그 여정이 기행문같지 않고, 마치 소설처럼 전개되지만 어느새 아저씨와 함께 수행하고 느린 걸음을 걸으며, 무언가를 발견해 내는 내 자신을 볼 수 있다.
 순례의 길에서 아저씨를 안내한 페트루스는 이 여정을 마치고 자신은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면, 글을 쓰거나 무용을 만들으라고 했다.
 그리고 아저씨는 그 여정으로 글을 써냈다. 마치 아저씨의 말 처럼, 책이 저절로 써지는 것 처럼 산티아고 순례 중에 앞으로의 모든 이야기를 떠올렸음에도 책을 쓰게 될거라곤 생각하지 못하면서 글을 써 냈다.
 
 자신의 검을 찾으려는 일념으로 길을 떠난 코엘료 아저씨처럼, 우린 인생에서 늘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 내가 왜 그것을 찾으려 하는가는 생각하지 않은 채, 어느 새 그저 목표를 향해 무작정 돌진만 하고 있다.
 그러다보면, 진정한 자신과 그 목표를 향하는 진정은 어느새 사라진 채 그저 결과만이 중요시 될 뿐이다. 목표를 달성하느냐 아니면 달성하지 못하느냐.
 그렇게 목표를 달성하면, 그 만족감은 잠시, 또 다른 목표가 다가온다.
 달성하는 것이 어느 새 목표가 되어버리고, 또 그 목표를 향해 무작정 돌진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은, 단지 목표를 향해 우리 혼자 뛰어가는 길이 아닌 평범한 모두의 길이며 믿음과 행복을 추구하며 그 행복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알아가는 길인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 코엘료 아저씨의 작품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그러나, 특정 종교에 대한 아저씨의 신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단지 그 종교에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닌 인류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어느새 아저씨를 따라 산티아고의 길을 여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하지만 그것이 종교적인 순례가 아닌 정신적인 순례를 하고 있는 것임을 안다면, 이 책의 진정한 맛을 느낀 것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어느새,나도 가리비껍질을 단 순례자가 되어산티아고의 길을 걷고 있다.
 무한한 경험과 자신을 발견해 가면서.
 그리고 그 산티아고의 길이 멀지 않음을, 어쩌면 바로 우리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좋았던 구절>
평화는 여전히 계속 자라나고 생성되는 과정 속에 있었다.
세상은 알고 있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격렬한 지진이나 태풍과 폭우 역시 자연의 여정 중에 있는 순환이라는 것을.
자연 역시 계시를 찾아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언젠가 나도 알 수 있을거라고.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에 가야 할 순간을
거스리지 못하고 결국 제때 그곳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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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하늘말나리야 - 아동용, 중학교 국어교과서 수록도서 책읽는 가족 1
이금이 글, 송진헌 그림 / 푸른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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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텔레비전 한 프로그램에서 이 책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 사람들은 제목만 듣고 말라리야라는 병을 떠올렸다며 신기해했었고, 그렇게 이 책을 처음 접한 나도 이 책의 입에 잘 붙지 않는 제목에 당황하면서도 궁금했다.
 너도 하늘말나리 라는 것인지, 너도 하늘말나리야 라는 것인지, 그 이름 조차 정확히 파악 되지 않았고, 혹시 나리꽃의 일종인가? 하는 추측만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이름에 대한 호기심으로 처음 만난 이 책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이기도 하지만 누구나를 위한 이야기 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늘에 대한 동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부터 인류는 하늘에 대한 동경으로 하늘을 나는 꿈을 꿔왔고, 그 결과로 지금 우리는 누구나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 책은 하늘말나리라는 식물을 내세워서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며 키워온 하늘을 나는 꿈처럼, 아이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키우는 꿈과 희망을 이야기 해준다.
 하늘말나리는 나리꽃 종류의 하나로 다른 나리꽃 종류들과는 달리 하늘을 향해 피는 진홍빛의 꽃이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세명의 아이들은 하늘말나리 같은 아이들이다.
 어쩌면, 이 책 속에 나오는 아이들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하늘말나리 일지도 모르겠지만.
 
 1. 미르 이야기.
 용이라는 뜻의 예쁜 이름을 가진 미르.
 엄마 아빠의 이혼을 받아드릴 수 없고, 엄마의 잘못이라 생각한다.
 엄마를 따라 이사 온 달밭마을의 진료소가 어색하기만 하다. 아이들과도 어울리고 싶지 않다.
 미르를 위로하는 것은 진료소 앞에 서 있는 오백년 된 느티나무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말을 하지 않는 바우가 신경쓰인다. 저 애를 꼭 내가 말하게 하고 싶다.
 
 2. 소희 이야기.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빠와 아빠가 돌아가신 후, 재혼 한 엄마.
 아빠와 엄마 모두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립지도 않다. 원래 추억이 많으면 그리운 법이다. 하지만 난 아빠 엄마와의 추억이 없어서 그립지 않다. 그리고 할머니가 내 엄마고 아빠니까.
 엄마가 보고싶은 적은 없었는데, 새로오신 보건소 소장님 때문에 엄마가 그리워진다.
 난 미르가 부러운데, 미르는 자꾸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 안쓰럽다.
 
 3. 바우 이야기.
 난 말을 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같이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깨달은 어느 날부터 마음으로 엄마와 대화를 할 뿐이다.
 엄마는 내가 점을 찍어놓고 새라고 해도 이해해주셨다.
 내가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빠와 소희 누나, 그리고 소희 누나의 할머니.
 그런데 왠지 미르에게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미르와 소희, 바우는 모두 아픔을 지닌 아이들이다. 그리고 아픔을 닫고 마음으로 이야기 하는 법을 너무 빨리 깨달은 아이들이다.
 하지만, 서서히 깨닫게 된다. 서로에겐 서로의 아픔을 치유해 줄 힘이 있다는 것을.
 한참 키가 큰 어른들도 때론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어, 쳐다보려고도 하지않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바라보고 보듬어주는 것, 아이들은 그렇게 순수하고 맑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주 맑은 물에서는 그 속에 살고있는 생명체들을 관찰할 수 있듯, 맑은 아이들은 남의 아픔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아픔을 볼 수 있게 된다.
 다른 친구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비로소 자신의 아픔을 정확히 보게 되는 아이들은 아프기도 하고 서로 치유해주기도 하고 때론 그 아픔이 곪게 놔두기도 하면서 자라난다.
 서로의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있는 힘. 그 힘이  아이들을 자라나게 하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대게 하고, 다시 웃을 수 있게 한다.
 
 오백년간 많은 아이들을 매달리게 하며, 많은 세상의 일들을 겪으며 이제 그 나뭇가지가 밑으로 쳐지고 뿌리고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따뜻하고 기댈 수 있는 느티나무처럼 슬픔을 매달고 세상 일을 겪은 아이들은 따뜻하고 기댈 수 있는 누군가로 성장해 간다.
 하늘말나리 같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키워가면서.
 
 책과 만나며, 나도 미르와 소희, 바우와 친구가 되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픔을 이해하며, 내 아픔을 바라보는 법을 나도 그 아이들을 통해 배우고 있었다.
 
 참 따뜻한 동화책이다.
 내게 묻는다. 늘 핸드폰 액정에 하늘 바라보기라고 입력해 두면서도, 정작 하루에 한 번 하늘보기가 왜 그렇게 힘이 들었냐고...
 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차마, 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먼저 흘러버린 내 시간이 무거워 고개를 숙인 것이라고 말하기 창피했다.
 다시 내게 말한다.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말라고, 그저 흘러가게 두어야 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그러니 다시 하늘말나리가 되어 하늘을 보라고, 그러면 다시 꿈꾸게 될 것이라고.
  내 마음을 바라보는 법을 알려준 이 책을 꼭 안아줘본다. 나도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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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4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 세상을 훔치다 - 우리시대 프로메테우스 18인의 행복한 책 이야기
반칠환 지음, 홍승진 사진 / 평단(평단문화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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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두근거린다.
 18명의 사람이 풀어내는 책 이야기.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만큼 두근거리는 일이 또 있을까?
 남의 서재를 훔쳐보는 것은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 사람의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훑어보며, 그 사람의 최근 관심사도 살펴보고 그 사람과 나의 닮은 점도 찾아본다. 꼭 일기를 훔쳐보며 그 사람의 내면을 발견하는 것 처럼.
 
 책 표지에 나열 된 이름들 중에, 두근거림을 더 빠르게 진행시키는 이름들도 보인다.
 책을 한 번 훑어보자, 기대대로 서재에서 찍은 사진들도, 책 읽고 있는 사진들도 보인다.
 우리 시대 프로메테우스라.....
 <책, 세상을 훔치다>라는 제목과 부재, 그리고 살짝 들여다 본 내용들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갖고 훔쳐보고 싶게 한다.
 
 책을 넘겨가며 읽는다기 보다는 구경한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책을 본다는 느낌보다는 잡지에 실린 글을 보는 것 같은 맛이 더 강하다.
 그럴 말도 한 것이 이 책은 <사람과 책>이라는 월간지에 실렸던 '나의 서가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인터뷰 글에서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사람과 직접 이야기를 하는 기분으로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 언젠가, 신동아에서 봤던 공지영씨와 박경리씨의 인터뷰가 그랬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이자 기자가 말한 우리 시대 프로메테우스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책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아닌, 그들과 인터뷰를 한 기자의 느낌을 소화하는 기분이 더 강하다.
 
 어려운 글은 싫다.
 내가 단순한 탓인지, 내가 좋아하는 글은 어렵지 않게 간촐하게 쓰여있으면서도 전달하려는 향과 맛은 심심하지 않은 절에서 먹는 점심밥 같은 글이다.
 인터뷰 글에서는 기자의 생각을 없애서라도 인터뷰 하는 사람의 생각을 더 많이 알고 싶다.
 기자에겐 미안하지만, 한 때 내가 되고 싶기도 했던 기자는 자신의 필력보다는 진실을 앞세우는 것에 더 힘이 있었으면 했다.
 
 그런 내 취향에 이 책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불편했다.
 미사여구로 화려한 작가이자 기자의 글은 절에서 먹는 점심밥 보다는 화려해보이지만 왠지 심심할 것 같은 가이세키 요리를 생각나게 했고, 작가의 견해가 지나치게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식탁은 풍성하지만 막상 젓가락 갈 곳은 없는 음식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또한, 책 표지에서 이야기 한 프로메테우스 18인의 행복한 책 읽기라기 보다는 인터뷰 당시 책을 출간한 사람들의 책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의 일기를 훔쳐보는 기분이 아닌, 그 사람들의 비지니스 스케쥴을 훔쳐보는 기분.
 
 가벼운 마음으로 요즘 주목받고 있는 사람들의 책들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는 되었지만, 기대했었던 그들의 행복한 책 이야기는 듣지 못한 섭섭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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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 - Art 020
마쓰오 바쇼 외 지음, 가츠시카 호쿠사이 외 그림, 김향 옮기고 엮음 / 다빈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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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쿠
 하이쿠는 5.7.5 음수율을 지닌 17자로 된 일본의 짧은 정형시를 일컫는다.
 하이쿠라는 말은 원래 있던 말이 아닌 렌가나 하이카이의 첫구 홋쿠만을 모은 홋쿠집 등의 형태로 이어지다가 근세에 마사오카 시키가 5.7.5로 독립된 한 구를 하이쿠라고 부르기 시작, 그 후 5.7.5로 독립된 한 작품을 일컫는 용어로 정착했다.
 *렌가- 5.7.5와 7.7의 운율을 여러사람이 번갈아 읊는 것.
 *하이카이- 렌가와 비슷하되 해학적인 내용
 *홋쿠- 5.7.5로 반드시 계절을 상징하는 언어와 노래가 지어진 배경이 있어야 하며 한 수로 독립 된 완결성이 있어야 한다.
 
 우키요케 
 우키요케는 목판화 뿐만 아니라 붓으로 그린 그림들도 모두 해당되며 이것의 제작은 매우 분업화 된 공동 작업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제작의 출발은 역시 고객의 주문이었다.
 우키요케가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하이쿠 동호회가 있었는데 그들이 신년 축하 선물로 그림 달력을 주문하며 다색 판화로서 우키요케가 문화 속에 들어갔다.
 
 에도시대  
 에도시대는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평화를 구가한 시대로 안정 된 내치 속에서 상업과 서민문화가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했으며 미술 분야에서도 여러 가지 재미있는 양상들이 전개 되었다.
 
 
 예전 영시 수업시간에 잠시 하이쿠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Ezra Pound의 <In A Station Of The Metro>라는 짧은 시를 공부하면서 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한시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는 하이쿠였지만, 17자로 된 짧은 정형시 속에 함축되어 있는 계절과 그 계절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너무 신선했었다.
 그 당시에는 짧게 집고가는 정도였기 때문에 하이쿠를 심도있게 다루지도 못했고 제대로 감상해보지도 못했지만 한 번쯤 하이쿠를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잊게 되었던 그 생각을 이모 책장에 꽂혀있는 이 책과 만나며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살며시 책을 꺼내, 한 장 넘기자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뭔가 일본 고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이쿠 하나에 어울리는 그림들이 몇 장 첨부되어 있는 책이 너무나 예쁘게 눈에 닿는다.
 
 위에서도 알 수 있듯, 하이쿠에는 계어라는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가 들어가야 하고, 그 짧은 하이쿠내에서도 한 번쯤 숨 쉴 여지를 만들어주는 잘라주는 역할을 하는 기레지라는 것이 필요한 데, 이 기레지라는 것은 우리나라 말로 해석해 본다면 -이여, -로다, -구나 정도가 될 수 있다.
 그렇게 기레지의 효과를 이해하고 기레지를 중심으로 하이쿠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부분들 사이의 연관성과 그 연관성과 작가의 심정을 결부시켜 보면 하이쿠를 쉽게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일본어도 전혀 못하고, 일본문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책을 넘기지는 않을까,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뭐야? 하고 책을 덮게되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책 처음에 친절히 하이쿠를 감상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해설이 첨부되어 있고 하이쿠 하나에 첨부 된 비슷한 느낌을 주는 우키요케들이 그 걱정을 덜어준다.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가 반드시 들어가는 하이쿠 특성 상, 이 책에선 봄, 여름, 가을, 겨울로 하이쿠를 분류해 놓았는데 우리와 비슷한 그들의 자연이 뿜어내는 정취가 독특하면서도 정겨울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까웠던 것은 역시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어느정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친절하게도 일본어로 쓰인 하이쿠 옆에 한국어로 그 발음이 표기되어 있고, 한국어로 번역도 다 되어있지만 한국어로 쓰여진 시를 영어로 번역해 놓았을 때 그 참맛을 느끼기 어렵듯, 일본어로 쓰여진 시를 한국어로 번역해 놓았을 때 그 참맛을 느끼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영시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가 읽고 느끼고 있는 외국문학은 사실 작가의 힘과 번역의 힘이 교묘하게 어우러진 원톱 체제가 아닌 투톱 체제로 이루어진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시를 그런 투톱체제로 만드는 것은 손에 손잡고 벽을 넘었을 때 발이 벽에 걸려 뭔가 꺼림직한 기분이 남는 그런 느낌이다.
 
 참 예쁜 책이었고, 하이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게 해주었지만 한계가 아쉬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만난 하이쿠는 참 매력적인 장르이고 (판화 작품을 좋아하진 않지만)우리나라에서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의 다색판화 역시 하이쿠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에도시대의 문화까지 잠시 엿볼 수 있으니, 책 한권으로 세 가지의 맛을 본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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