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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헤어진 여자가 내게 와 속삭였다. "카지노로 가자!"
친한 친구가 내게 전화 해 물었다. "XX랜드나 갈까?"
전자는 소설 속 이야기이고, 후자는 내 이야기이다. 갑자기 바뀐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해 한동안 친한 친구에게 계속 푸념만 했었다. 힘들어. 지쳐. 나 좀 살려줘. 그러는 내게 그 친구가 말했다. "XX랜드나 갈까?"
다행이었다. 난 도박이나 게임에는 영 소질이 없고 관심도 없다. 그러니 "먹고 죽을 돈도 없어."하고 그 말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고스톱도 못하는 내가 카지노는 무슨. 며칠 후 그 친구를 만나 XX랜드의 이야기를 들었다.
"땡기러 가자고 한 놈은 다 잃고, 따라 간 놈은 돈 따고."
그 순간 카지노의 세계란 왠지 마음을 비우고 들어간다면 행운을 거머 쥘 수도 있는 곳처럼 느껴진 것은 왜 였을까. 나 역시도 돈에 큰 욕심이 없으니 혹시나 그 친구를 따라갔다면 뭔가 빵하고 터졌을 것만 같은 생각.
가독성이 훌륭한 작품을 평가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어차피 책이란 일종의 소비품이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독자가 읽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고, 이왕 읽을 것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읽는다면 좋지 아니한가 일 것이다. 하지만 점점 소설을 평가하는데 가독성의 비중이 커져가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흐름일까, 어려운 출판계를 구원하기 위한 발버둥일까.
소재 자체는 흥미롭다. 도박과 여자. 그 소재 자체만 봐서는 도박꾼의 야망과 사랑이 주를 이룰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 책의 주인공은 도박꾼도 아니며 도박에 대한 야망도 없고 여자에 대한 사랑도 없다. 그저 어느 날 갑작스런 이혼한 첫사랑의 제안에 카지노로 가 별 욕심없이 도박을 하고 그 단절 된 세계 속에서 단편적인 만남을 가지며 그 첫사랑과 아무 일 없이 휴가를 마치고 헤어져 다시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이 남자 주인공의 너무나 재미없는 생활이다. 재미없는 생활이 오히려 흥미를 유발한다는 것이 모순같이 들릴 수는 있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 누구도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의사소통이 단절 된 세계, 그리고 자신의 게임에만 몰두하며 타인의 존재는 그저 무의미 해지는 세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슬롯머신과의 관계가 존재하는 세계, 카지노는 카지노가 아니라 우리의 현 세태를 축소해 놓은 작은 현실일 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순응하며 살아가는 남자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에 우리는 그 모습에 흥미를 갖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지만 위에서 가독성을 운운한 것은 내게는 이 소설이 매끄럽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지노를 통해 현 세태를 비판하며 슬롯머신을 당기는 것처럼 통계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은 탁월했다 할 수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의 원인은 사실 지금도 잘 알 수가 없다. 무언가 숨긴 채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 보다는 다 드러내 놓고 까발리는 것을 더 선호하는 내 취향 탓인지, 혹은 도박과 여자라는 소재하면 떠오르는 식상한 전개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는.
많은 사람들이 한방을 꿈꾸고 있다. 그 한방을 꿈꾸며 로또를 사고, 슬롯머신을 당긴다. 그 한방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그 한방에 맞아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나마 귀에 들리면 왠지 내게도 그 희미한 비명이 나올 것 같이 여겨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또와 대화를 하고, 슬롯머신과 대화를 한다. 로또의 번호를 찍으며, 슬롯머신의 레바를 당기며 집 나간 아이들을 원망하고 바람 난 아내를 씹는다. 하지만 진정한 한방이란, 카지노의 확대판이 되어버린 이 세계 속에서 진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만나고, 진정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어 줄 사람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가, 당신. 진정한 한방을 꿈꾸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