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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벤자민
구경미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월
평점 :
아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누구나 아픔을 안고 그 아픔을 약 삼아 또 다시 찾아 올 불안감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닐까. 아픔은 때론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시련을 주지만 때론 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밑거름이 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약에 비유하자면 구충제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모두가 이런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그 아픔을 자신의 기억 속에서 잊고자 발버둥 치고, 누구는 그 아픔을 끝내 이기지 못해 타인에게 옹졸한 복수를 하거나 자신에게 자해를 하기도 한다.
<미안해, 벤자민>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나약한 현대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걔 중에는 사채업자도 있었고,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을 가둬놓던 곳과 같은 장소를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내면은 한없이 나약하기만 했다. 사채업자 김길준은 지독해 보였지만 감금 된 그는 그 안에 감금된 사람들 중 누구보다 빠르게 쇠약해져 갔고 알아볼 수 없게 변해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난 착하게 살아왔다, 왜 이런 짓을 당해야 하는 지 모르겠다. 그래,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 자기 자신에겐 지나치게 관대하고 타인에겐 지나치게 엄격하게. 어쩌면 그 모습들이 더 우리가 나약하다는 증거가 아닐지. 안수철 역시 의뢰인들의 부탁대로 사람을 장례시키거나 장기투숙 시키는 냉혈안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랑에 목말라 있는 자가 아니었을까. 또 책 속의 '나' 역시도 재벌가의 딸이지만 기억 속에 꽁꽁 묶어둘만큼 아픈 상처를 지닌 채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다들 하나같이 안아주고 싶은 안쓰러운 캐릭터들이다.
책 속에서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결코 발랄하거나 유쾌하지 않다. 이들은 사채, 폭력, 억압으로 뒤엉킨 사회 속에서 위태위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안쓰럽지만 그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너무나 담담하게 해 나간다. 역설 된 슬픔을 보는 기분이랄까. 그런 기분처럼 모순되게 책은 발랄하거나 유쾌하진 않지만 꽤나 재미있고 신선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 찜찜한 것이 남는 듯한 것은 지울 수 없다. 언제부턴가 사채라는 말에 벌벌 떠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끌어들이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 둘 사라져 가지만 그들의 존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잊혀지곤 하는 사람들. 우리 주변엔 사실 책 속 인물들 같은 사람들이 너무도 흔하게 존재하고 있지는 않던가.
사람은 태어나면서 여러 지위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 지위 중에는 자신의 노력 여부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요즘은 빈부차이라는 것이 그렇게 보인다. 신라시대의 육두품처럼 부가 세습되는 경향, 우리는 지금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없기에 항상 무언가에 빚져야 하고 어려워야 하는 사람들 위에는 무언가를 받아야 하고 그것으로 부를 유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는 끊임없는 주고 받는 관계만이 가득하고 이 책 속의 인물들 역시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그런 존재가 된다. 물론 돈의 관계에 잡힌 것은 사채업자와 김선숙과 김선숙의 남편 뿐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사채업자를 감금한 후 그들에게 피해보상을 하려는 여주인공이나 여주인공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사랑을 받으려 하는 안수철 역시 자신의 공허함을, 그리고 상처를 무언가로 변재받고자 하는 것 아닐까. 또 무의식 저편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피해감을 묶어둔 채, 그 무의식이 내리는 경고가 뭔지도 모른 채 경고에서 벗어나고자 사채업자를 감금해 주기를 요청하는 여주인공의 심리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벤자민은 죽었다.
너무도 많은 약을 복용한 나머지, 아무리 잘 돌보아줘도 소용 없게 되었다. 벤자민을 온전히 크게 했으려면 충분한 햇빛과 적당한 수분과 관심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 이다. 우리를 키우는 것은, 우리의 상처를 보듬는 것은 강요와 억압에 의한 것은 아니다. 또 그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인위적인 치료법도 아니다. 자신의 상처를 마주할 수 있는 내면의 힘. 그리고 그 힘의 발현과 상처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도와줄 수 있는 진정한 관계. 이 책의 주인공이 결국 산장을 떠나게 되는 건 그 관계를 찾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문득 그녀의 뒷 이야기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