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문학사
김종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 이 책 처럼 이 말에 잘 어울리는 책을 찾기도 힘들 것 같다. 기발한 상상과 재치를 잔뜩 가지고 있는 이 책은 왠지 이 책의 제목에 있는 낙서에서 비롯되었을 법 하다.
     가끔 호프집이나 조금 오래 된 식당의 화장실에 가면 많은 낙서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낙서들이란 꽤나 원초적이다. 어린시절 칠판에 낙서하던 모습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한 것 같은 모습들이 그 화장실 안에 펼쳐진다. 하지만 때론 삶의 진지한 고찰까지 엿볼 수 있는데, 이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가. 본능에 충실한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삶에 대한 성찰을 놓지 않는 자세. 어쨌든 그 낙서들에는 많은 인생과 많은 생각들이 담겨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작가는 그런 낙서거리가 꽤나 많은 사람일 것이다. 어린 시절 읽은 홍길동 전에 나온 율려국이란 나라는 그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었을테고 어쩌면 자신이 그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던 중, 뉴스를 보며 혀를 쯧쯧 차며 저것들은 우주공간으로 보내버려야 해, 하다가 율려국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다 뭉쳐놓고 지들끼리 한 번 다 해 먹어 보라고 해?

     작가의 상상력은 그래서 좋다. 작가의 상상력은 흰 종이 속에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 내고 다양한 역사와 다양한 인물들을 생산해 낸다. 하지만 이 상상력이 조금만 엉크러지면 그것을 눈치채는 것은 작가보다 독자가 한 걸음 더 빠르니 항상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 낸 이야기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김종광의 소설은 거짓없이 완벽하게 짜여져 있다.

 

     율려국, 낙서문학, 쇠북공기, 조싼, 혼주, 기독면 등 책 속의 세상은 어느 하나 현실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낯선 것은 아니다. 우리는 김종광이 만들어 낸 허구 속 세상에서 지극히 우리의 세상을 느끼게 된다. 장자가 호접지몽을 꾸었듯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살고 있는 게 여기인지 소설 속인지 잠시 헷깔렸다면 너무 큰 비유가 될까?

     작가의 말에서 각각의 단편들이 무엇을 표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지만, 굳이 작가의 친절한 설명이 없어도 우린 단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가 말하고 싶은 것, 그가 비꼬고 싶은 현실이 무엇인지 너무나 적나라하게 알 수가 있다. 조금은 통쾌하고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든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이 정말 이런 곳이구나.

 

     낙서문학을 통해선 김종광이란 작가가 가지고 있는 문학의 현 주소를 느껴볼 수 있는데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곳을 이렇게 과감하게 파헤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작가에 대한 충분한 호기심을 일게 한다. 특히 마지막에 수록된 '조싼은 헤멘다'는 단편은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그로보아 이 책은 첫단편부터 마지막단편까지 어느하나 놓칠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상상으로 빚어낸 세상 속에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 낸 세상을 보며 감탄을 하기도 하고, 우리의 현 주소를 돌아보게도 된다. 그런 점에서 김종광이란 작가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은 가히 감탄적이기만 하다.

     어떤 이는 소설이 지나치게 허구적이라 소설을 탐독하는 것은 현실로 부터 도피하는 경향이 크다고 했지만, 어떤 이는 소설만 읽어도 이 세상을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김종광의 소설은 확실히 후자의 성격이 강하다.  전자의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꼭 읽어보게 하고 싶을 정도이다. 통쾌하고 날카롭게 세상을 보는 눈, 김종광의 글쓰기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안해, 벤자민
구경미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누구나 아픔을 안고 그 아픔을 약 삼아 또 다시 찾아 올 불안감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닐까. 아픔은 때론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시련을 주지만 때론 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밑거름이 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약에 비유하자면 구충제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모두가 이런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그 아픔을 자신의 기억 속에서 잊고자 발버둥 치고, 누구는 그 아픔을 끝내 이기지 못해 타인에게 옹졸한 복수를 하거나 자신에게 자해를 하기도 한다.

 

     <미안해, 벤자민>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나약한 현대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걔 중에는 사채업자도 있었고,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을 가둬놓던 곳과 같은 장소를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내면은 한없이 나약하기만 했다. 사채업자 김길준은 지독해 보였지만 감금 된 그는 그 안에 감금된 사람들 중 누구보다 빠르게 쇠약해져 갔고 알아볼 수 없게 변해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난 착하게 살아왔다, 왜 이런 짓을 당해야 하는 지 모르겠다. 그래,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 자기 자신에겐 지나치게 관대하고 타인에겐 지나치게 엄격하게. 어쩌면 그 모습들이 더 우리가 나약하다는 증거가 아닐지. 안수철 역시 의뢰인들의 부탁대로 사람을 장례시키거나 장기투숙 시키는 냉혈안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랑에 목말라 있는 자가 아니었을까. 또 책 속의 '나' 역시도 재벌가의 딸이지만 기억 속에 꽁꽁 묶어둘만큼 아픈 상처를 지닌 채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다들 하나같이 안아주고 싶은 안쓰러운 캐릭터들이다.

 

     책 속에서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결코 발랄하거나 유쾌하지 않다. 이들은 사채, 폭력, 억압으로 뒤엉킨 사회 속에서 위태위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안쓰럽지만 그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너무나 담담하게 해 나간다. 역설 된 슬픔을 보는 기분이랄까. 그런 기분처럼 모순되게 책은 발랄하거나 유쾌하진 않지만 꽤나 재미있고 신선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 찜찜한 것이 남는 듯한 것은 지울 수 없다. 언제부턴가 사채라는 말에 벌벌 떠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끌어들이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 둘 사라져 가지만 그들의 존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잊혀지곤 하는 사람들. 우리 주변엔 사실 책 속 인물들 같은 사람들이 너무도 흔하게 존재하고 있지는 않던가.

 

     사람은 태어나면서 여러 지위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 지위 중에는 자신의 노력 여부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요즘은 빈부차이라는 것이 그렇게 보인다. 신라시대의 육두품처럼 부가 세습되는 경향, 우리는 지금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없기에 항상 무언가에 빚져야 하고 어려워야 하는 사람들 위에는 무언가를 받아야 하고 그것으로 부를 유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는 끊임없는 주고 받는 관계만이 가득하고 이 책 속의 인물들 역시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그런 존재가 된다. 물론 돈의 관계에 잡힌 것은 사채업자와 김선숙과 김선숙의 남편 뿐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사채업자를 감금한 후 그들에게 피해보상을 하려는 여주인공이나 여주인공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사랑을 받으려 하는 안수철 역시 자신의 공허함을, 그리고 상처를 무언가로 변재받고자 하는 것 아닐까. 또 무의식 저편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피해감을 묶어둔 채, 그 무의식이 내리는 경고가 뭔지도 모른 채 경고에서 벗어나고자 사채업자를 감금해 주기를 요청하는 여주인공의 심리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벤자민은 죽었다.

     너무도 많은 약을 복용한 나머지, 아무리 잘 돌보아줘도 소용 없게 되었다. 벤자민을 온전히 크게 했으려면 충분한 햇빛과 적당한 수분과 관심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 이다. 우리를 키우는 것은, 우리의 상처를 보듬는 것은 강요와 억압에 의한 것은 아니다. 또 그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인위적인 치료법도 아니다. 자신의 상처를 마주할 수 있는 내면의 힘. 그리고 그 힘의 발현과 상처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도와줄 수 있는 진정한 관계. 이 책의 주인공이 결국 산장을 떠나게 되는 건 그 관계를 찾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문득 그녀의 뒷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룡전
쓰카 고헤이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2007년 유난히도 학생운동과 관련 된 영화를 많이 접했던 것 같다. 영화 속 그들은 모두 외치고 있었다.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라는 것이 아닌 '우리를 잊지 마세요'. 내 나이를 살고 있는 현재의 젊은이들은 과거의 상처에 무감각하다. 그리고 내 나이보다 더 어린 나이의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를 거의 알지 못한다. 뭐야, 그런 게 있었어? 우리가, 그리고 그들이 겪지 못한 과거는 아픔 뿐이었건 어둠 뿐이었건 책 속에서 읽는 혹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알 수 없는 세계에 불과하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는 어두운 과거를 보고 듣고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두운 과거 속에 살았던 이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니들이 지금 이렇게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들이 누구 때문인 줄이나 알고 그러는거야? 그렇게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간격이 생긴다. 메꿔질 수 없는 시간의 간격.

 

     그것은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해 우리의 상처를 끌어안고 외면하기에 급급했지만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집이 없다는 말처럼 그런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와 가까운 나라 일본에도 그런 과거는 존재하고 있었다. 1960-70년대, 마르크스와 자본론 이것들이 젊은 이들의 패기 속에 파고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젊은이들도 이념이라는 횃불 아래 몸을 던졌다. 알고 말고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더 나은 세상, 그것은 젊은 패기로 꿈꿔 볼만한 것이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그 누가 지금 여기서 주저 앉는 삶을 원하겠는가. 우리는 모두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지금껏 공부했고 그리고 그 내일을 위해 내 청춘을 아주 조금 불태우자는 건데 그것이 뭐가 두려우랴, 그리고 그들은 시위현장에 뛰어들었다.

 

     교수님도 부모님도 그 시기는 어려운 시기였다고 했다. 데모가 끊이지 않았으며 언론은 학생을 폭도로 취급했고 그들은 진압당해야 했으며 그 무모하다고도 할 수 있는 혈기에 눈을 감는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지도자 없는 학습을 이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시기라고 사랑이 없었겠는가. 오히려 사랑은 그런 열정적인 몸부림 아래서 뜨거웠고 타올랐다. 하지만 완전한 사랑조차 사치처럼 치부되던 그 때. 그 때는 내 몸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불사지를 수 있는 우리의 것이었다. 갑작스레 전공투의 위원장이 되어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짊어지게 된 미코토에게는 그런 현실들이 더욱 무거웠다. 어려서부터 정착하지 못한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은 온통 화염 속인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미코토는 그 열정 속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책의 가장 마지막 장면은 꽤나 인상적인데 빠르게 흘러가다 한 컷의 스틸사진처럼 남는 정지영상으로 끝나는 영화의 라스트 씬을 본 기분이었다. 오래오래 마음이 울렁거렸다.

 

     재일 교포 작가 중 하나인 '가네시로 가즈키'의 책들을 읽을 때는 양 국가 사이에서 조금은 혼란을 겪은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쓰카 고헤이라는 작가는 재일 교포임을 알고 읽어도 전혀 그런 인상을 받을 수가 없다. 오히려 조금은 야비하고 자신을 숙이고 있는 한국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이 뜨악할 정도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 듯한 작가, 그것을 어찌 평가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단지 작가의 배경을 무시한채 그의 작품으로만 평가한다면 이 책은 비룡처럼 아름답게 불타오른다. 알지 못했던 70년대 일본의 학생 운동, 그들 역시 우리나라의 그 때 처럼 치열했고 필사적이었다. 허나, 우리의 과거에도 눈을 감아버리는 우리가 그들의 과거를 '정말 있었던 사실'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그들의 노력 덕에, 그들의 희생 덕에 지금만큼 살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나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과거의 희생들에 우리가 큰 의미를 두는 것 보다는 그 때의 그 필사적인 시간들. 하나씩 꺽여간 젊음이 있었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키드 1 - 엘파바와 글린다 위키드 6
그레고리 머과이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그것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동화 중 하나인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서쪽 마녀의 이야기라는 것 자체가. 베스트셀러니, 뮤지컬이니 하는 선전문구 없이도 단지 그것만으로도 내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언제부턴가 고전 동화에 대항하는 동화 이면의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미 '피터팬'시리즈를 통해 동화 뒤집어 보기에 대한 매력에 푹 빠져 있던 터 였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나 보다. 뮤지컬로 제작까지 되었다기에 아기자기한 판타지를 기대한 내게는 책에 대한 몰입도는 매우 떨어졌고 지루했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면을 담고 있어서 그랬을까? 초록색 피부를 타고 난 엘파바도 도로시에게 구두를 선물한 글린다도 전혀 매력적이라거나 흥미로운 캐릭터가 되지 못했다.

     두권의 책에는 초록색 피부를 타고 난 엘파바의 전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죽을 때까지의 이야기가 오즈 전 지역에 걸쳐 발생한다. 만약 엘파바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거나 오즈라는 지역이 실제로 있는 지역이라면 조금 흥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가상의 공간의 가상의 인물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자칫 지루할 수 있었다.

 

     첫 시작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마녀가 나무가지에 앉아 도로시와 도로시 일행들을 살펴보는 장면. 그 장면으로 난 뭔가 흥미로운 스토리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색을 밝히는 엘파바의 엄마와 성직자인 아버지, 그리고 낯선 이방인의 이야기로 전개 되더니 불쑥 초록색 엘파바가 태어나고 엘파바는 불쑥 학교에 들어가더니 반정치적 단체에 몸을 담고 있는 성인으로 변신했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특정 시기를 집중 조명할 필요는 없지만 뭔가 사건이 발생할 것만 같으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듯한 전개가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오즈가 도로시에게 엘파바를 없애라고 하는 이유도 설득적이지 않아 끝까지 몰입하기에 힘이 드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 어느정도 박수를 보내고 싶은 부분은 가상 현실 속에 지극히도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점은 이 책을 자칫 지루하게 만드는 요소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지만, 세상에 완전한 선과 완전한 악이 없다는 것을 주인공 엘파바를 통해 선명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단지 오즈의 마법사를 통해 나쁜 서쪽 마녀로 알고 있었던 캐릭터를 다양한 성격을 지닌 인물로 변화시킨 작가의 상상력은 높이 사고 싶다.

     역시나 문화의 차이일까? 혹은 성향의 차이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엄청난 평을 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내게는 썩 흥미롭지 못해 아쉬웠다. 동화에 대한 내 무한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닌지 살짝 고민을 했을 정도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라리 on the Pink
이명랑 지음 / 세계사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 정아는 학교 짱들에게 불려가 얻어 맞다가 준비해 뒀던 칼을 꺼내는 바람에 학교 짱으로 자신도 모르게 인정받는다. (중략) 난 이런 생활을 해 보지 않아서 정아가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찌만 어쨌든 책은 재미 있었다.

라고 서평을 쓸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엉뚱하게도 한 것 같다. 성장소설을 꽤 좋아하는 편이고, 그 성장소설들을 읽은 후의 서평도 늘 즐겁게 썼었지만 왠지 이 책은 읽으며 서평을 써 보기가 녹록치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위험할 듯 위험하지만 10대 일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일탈. 이 책 속의 아이들에겐 '반항'이라기 보다 '일탈을 원하는 마음'이 보였다.

 

     친동생이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요즘 십대 문화를 가까이서 보고 지냈음에도 처음으로 후까시 잡는 아이들과 대면했을 땐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 아이들 중 한명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너무도 당당하게 쌍시옷이 들어가는 두 글자의 욕을 뱉어냈고, 난 여기서 지면 끝장이다라는 생각으로 그 욕을 받아쳐냈다. 홈런. 내가 받아쳐낸 그 욕은 멋있게도 포물선을 그리며 장외 홈런으로 이어졌고 그 때 부터 그 아이들은 내 머리 위가 아닌 내 손바닥에서 놀았다. 그 때 내가 깨달은 것은 딱 하나. 이들에겐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가 아니라 눈높이를 얼마나 맞춰 주느냐가 중요하다,였다.

 

     세대차이, 라는 말들을 하지만 어느 세대나 모범적인 학생들로 가득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혹여나 공부를 지나치게 잘한 나머지 특수 목적고라는 곳에 진학해 IQ 140 이상만 드글거릴 것 같은 학업의 전당에서 신성한 학구열을 불태우며 살아서 후까시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말을 한다 해도 초중 학교 시절, 그런 아이들이 하나도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난 냉큼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잘 부탁한다고 말하겠다. 그것은 분명히 자신만의 저택에서 가정교사를 누리며 학교와 벗어난 삶을 산 것일테니 말이다. 어쨌든 요즘은 조금 더 세대가 빨라져서 초등학교 아이들부터 불량끼를 씹으며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있다. 우린 그런 아이들을 보며 "요즘 애들은..." 하며 혀를 찬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가져 본다면 그 아이들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열정이 있는 아이들이다. 자신들의 열정을 표현할 바 없어 그 열정이 어긋나게 되는 것이고 그 순수가 퇴색 되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요즘 애들이라도 애들은 애들이며, 후까시를 아무리 잡는다 해도 그 나이가 지닌 고유의 그런 색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유난히도 밝은 핑크색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순수하고 열정이 있어서 의리를 져 버릴 수 없고 혹시나 자신이 약해 보이면 비굴해 질까봐 자신의 자존심을 중시하는 이 아이들은 오히려 세상에 찌들고 찌들어 자존심도 개에게 주고 위 사람에게 박박 기며 지문이 닳고 닳을 때까지 손바닥을 비벼대는 못난 어른들 보다는 오히려 나아 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아이들의 삶을 너무도 현장감 넘치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책은 재미 있다. 10대들이 쓰는 언어와 그들이 보이는 파괴적인 행위가 책에는 너무도 선명히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면 곤란하다. 십대들과 매일 부딪히고 가까이 보는 입장에선 이 책이 오히려 모든 십대들을 대변하는 것이 될까 조금은 우려가 되었다. 우린 "요즘 애들은..."이라고 혀를 차지만, 알고 있는가? 우리 세대에도 우리의 윗 세대들은 우리를 보며 똑같은 말과 똑같은 혀놀림을 했다는 것을? 희망을 잃어버린, 혹은 잘못된 희망을 품어버린 소수 십대 아이들에게도 평범한 아이들과 마찬가지의 오로라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이 어른들에게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결말은 아쉬웠다. 하지만 그들에게 손가락질하고 혀를 차기엔 우리의 관심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어른들이 조금 깨달았음 한다. 그들 역시 아직은 순수하고 예쁜 나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니 말이다. 날라리든 뭐든 분홍빛 세계에 사는 십대들이여, 마음껏 비상하라!  (라고 서평을 마무리 짓고 나니 왠지 무릎팍 도사의 시그널 송이 생각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