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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문학사
김종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6월
평점 :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 이 책 처럼 이 말에 잘 어울리는 책을 찾기도 힘들 것 같다. 기발한 상상과 재치를 잔뜩 가지고 있는 이 책은 왠지 이 책의 제목에 있는 낙서에서 비롯되었을 법 하다.
가끔 호프집이나 조금 오래 된 식당의 화장실에 가면 많은 낙서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낙서들이란 꽤나 원초적이다. 어린시절 칠판에 낙서하던 모습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한 것 같은 모습들이 그 화장실 안에 펼쳐진다. 하지만 때론 삶의 진지한 고찰까지 엿볼 수 있는데, 이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가. 본능에 충실한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삶에 대한 성찰을 놓지 않는 자세. 어쨌든 그 낙서들에는 많은 인생과 많은 생각들이 담겨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작가는 그런 낙서거리가 꽤나 많은 사람일 것이다. 어린 시절 읽은 홍길동 전에 나온 율려국이란 나라는 그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었을테고 어쩌면 자신이 그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던 중, 뉴스를 보며 혀를 쯧쯧 차며 저것들은 우주공간으로 보내버려야 해, 하다가 율려국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다 뭉쳐놓고 지들끼리 한 번 다 해 먹어 보라고 해?
작가의 상상력은 그래서 좋다. 작가의 상상력은 흰 종이 속에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 내고 다양한 역사와 다양한 인물들을 생산해 낸다. 하지만 이 상상력이 조금만 엉크러지면 그것을 눈치채는 것은 작가보다 독자가 한 걸음 더 빠르니 항상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 낸 이야기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김종광의 소설은 거짓없이 완벽하게 짜여져 있다.
율려국, 낙서문학, 쇠북공기, 조싼, 혼주, 기독면 등 책 속의 세상은 어느 하나 현실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낯선 것은 아니다. 우리는 김종광이 만들어 낸 허구 속 세상에서 지극히 우리의 세상을 느끼게 된다. 장자가 호접지몽을 꾸었듯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살고 있는 게 여기인지 소설 속인지 잠시 헷깔렸다면 너무 큰 비유가 될까?
작가의 말에서 각각의 단편들이 무엇을 표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지만, 굳이 작가의 친절한 설명이 없어도 우린 단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가 말하고 싶은 것, 그가 비꼬고 싶은 현실이 무엇인지 너무나 적나라하게 알 수가 있다. 조금은 통쾌하고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든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이 정말 이런 곳이구나.
낙서문학을 통해선 김종광이란 작가가 가지고 있는 문학의 현 주소를 느껴볼 수 있는데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곳을 이렇게 과감하게 파헤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작가에 대한 충분한 호기심을 일게 한다. 특히 마지막에 수록된 '조싼은 헤멘다'는 단편은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그로보아 이 책은 첫단편부터 마지막단편까지 어느하나 놓칠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상상으로 빚어낸 세상 속에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 낸 세상을 보며 감탄을 하기도 하고, 우리의 현 주소를 돌아보게도 된다. 그런 점에서 김종광이란 작가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은 가히 감탄적이기만 하다.
어떤 이는 소설이 지나치게 허구적이라 소설을 탐독하는 것은 현실로 부터 도피하는 경향이 크다고 했지만, 어떤 이는 소설만 읽어도 이 세상을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김종광의 소설은 확실히 후자의 성격이 강하다. 전자의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꼭 읽어보게 하고 싶을 정도이다. 통쾌하고 날카롭게 세상을 보는 눈, 김종광의 글쓰기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