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라, 서커스
천운영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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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써진 소설 한 편을 만나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일이다. 물론 그 '잘'이라는 것이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니라서 한 소설에는 다양한 평가가 따르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마음에 드는 소설을 만나는 기쁨은 또 다른 책을 탐하게 하는 묘한 중독성을 제공해 주는 듯 하다. 그 중독감은 마치 <잘 가라, 서커스>(천운영, 문학동네, 2005)라는 소설 속에서 나온 따이공들의 심정 같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소설은 역시 독자의 중독성에 기여를 해 줄만한 아주 괜찮은 작품이다.

 

     천운영이란 작가가 이 책을 발표하기 전, 주목할만한 단편들로 문단에 바람을 불러 일으켰단 사실을 모를 지라도 이 장편 하나로 그 작가에 대한 기대와 신뢰감을 갖기란 충분하다고 본다. 11개의 장으로 되어있는 이 소설은 동생인 윤호의 시점과 조선족인 림해화의 시점으로 전개 된다. 이 둘은 윤호의 형이자 림해화의 나그네인 인호를 매개로 이어져 있는 사이이지만 어쩌면 몸을 섞고 눈물을 닦아준 림해화와 인호보다도 그리고 한 배를 나눈 윤호와 인호보다도 더 끈끈한 무엇으로 엮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림해화는 공주의 무덤을 함께 걷던 그 사내를 잊지 못했지만 나중엔 자신이 떠올리는 이가 그 사내인지 윤호인지 알 수 없게 되고, 윤호는 자신이 마음 속으로 열망하는 이가 림해화인지 인호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들의 마음은 위험하고 아찔했기에 그들은 서로를 멀리 해야 했고 그들의 거리는 끈 하나에 의지해 바닥에서 주먹 하나 간신히 들어갈만한 거리까지 떨어져 내리는 곡예를 하는 서커스 단원의 공연과도 비슷했다.  

 

     이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서커스'라는 소재에 있다. 형의 부인을 맞으러 간 중국에서 인호와 윤호는 서커스를 보게 되고 이 서커스는 마치 그들의 파국을 예언하는 듯 하다. 또한 형 인호는 어렸을 때부터 서커스와 같은 기예로 윤호를 즐겁게 해 주었으며 그러던 와중 목소리를 잃고 자신의 목소리를 앗아간 그 선으로 자신의 아내를 도망가게 만든다. 또 윤호가 타는 배 안에는 서커스 단원들의 승선이 이어지고 그들이 바다에 버리는 병든 말 한마리는 마치 인호의 모습과도 같다. 바다가 인호를 부른 것이었던가, 혹은 윤호가 인호를 버린 것이었던가. 소설은 모두의 죽음, 그리고 그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의 노래를 부르는 윤호의 독백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독자의 슬픔을 극대화 시키지는 못한다. 독자는 이미 그들의 모든 행위들이 한낱 서커스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죽음을 어렵잖게 눈치채고 있었을테니 말이다. 다만, 살아남은 자의 노래를 부르는 윤호의 뒷모습에 처량한 눈빛을 보내게 됨은 어쩔 수 없다. 이는 마치 잘 숙련된 중국 기예단의 공연을 손뼉을 치고 관람한 후, 그들의 기구한(그럼에 틀림없는) 삶에 씁쓸한 눈빛을 보내주는 것과도 같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가 이 소설을 위해 들였을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또 다른 소설처럼 눈 앞에 펼쳐질 때가 있다. 이 소설 역시 작가의 또 다른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들은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신빙성을 얻게 된다. 조선족의 생생한 말투와 한국에서의 삶, 그리고 따이공들의 이야기는 단지 지면이나 대중매체를 통해 얻어낸 간접 체험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이는 작가가 그들 속에 융화되어 살아 낸 또 하나의 인생 이야기처럼 보여진다. 소설은 허구라고 이야기 하지만, 진정한 허구는 소설 속 사람들의 삶에 독자를 온전히 들여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문을 열어주는 것은 미리 그 삶을 순회해 본 작가의 몫이다. 그럼에 이 소설에서 작가는 자신이 해야 하는 몫을 완벽하게 해 내고 있다.

 

     외롭지 않은 사람 어디있을까, 가슴 속에 열정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을까. 다 풀어내지 못하는 그 열정은 어떻게 사그러트려야 하는 걸까. 검은 물길 속으로 인호가 사라져가고, 검은 세상 속으로 해화는 사라져 간다. 그리고 우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윤호처럼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우리는 또 다시 외로워지고 또 다시 가슴 속에 애환을 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그 애환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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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숭배와 광기 - 개정판
발트라우트 포슈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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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이 오늘날처럼 잘 들어맞는 시대도 없었을 듯 하다. 물론 코르셋으로 허리를 졸라매고, 발을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 발가락을 꺾어 발을 묶는 등, 여자로 만들어지기 위한 노력은 시대를 불문하고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린 매혹적인 몸매를 만들기 위해 코르셋으로 허리를 졸라 매거나 발가락을 꺾는 등의 일을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린 수술대 위에 누워 수술대 위의 불을 바라보거나, 굶고 식욕억제약을 먹고 토할 뿐이다. 지금 우리에겐 매혹적인 몸매와 이상적인 얼굴을 만들기 위한 너무나 다양한 방법들이 주어져 있다. 여자들은 그 다양한 방법을 통해 여자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람같지가 않다. 때론 "저 사람들은 화장실도 안 가고 방귀도 안 뀔 것 같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 동조하게 되고, 그들이 텔리비전에 나와 "저도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면 '그랬어?' 라며 깜짝 놀라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같지 않은 사람들은 우린 어느새 美의 기준으로 삼아놓고 그들과 닮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이 책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은 그런 텔레비전 속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며 중국의 전족이나 아프리카에서 목을 늘리는 행위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쯤이었다. EBS에서 방영되는 '지식채널e'라는 프로그램에서 중국의 전족에 대한 설명을 했고, 그 프로그램에 대한 도움서로 이 책이 자막에 소개되었다. 때 마침 그런 생각을 하던 터라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고, (평소에 여성신문사라는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책을 신뢰하지 않는 터였지만)이 책을 보게 되었지만 내가 기대하는 바엔 크게 미치지 못하는 책이었다.

 

     내가 기대한 책의 내용은 고대로부터 여성의 美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바뀌어 왔으며, 그 관점에 부합하기 위해 사람들은 어떤 노력(때론 만행)을 했고 현대인들은 자신의 몸을 얼마나 학대하고 있는지에 관한 고찰이었다. 허나, 이 책은 끊임없이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사회가 만들어 놓은 美의 기준을 쫓을 것을 강요하고 그에 미달하는 여자들을 가차없이 게으르거나 무능한 사람으로 치부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 말들은 사실이다. 몇 년전, 마광수 교수는 '예쁘지 않은 여자들은 게으르다'라고 말을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선 끊임없이 비정상적으로 날씬하고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한 사람들을 비춰서 정상적인 사람들을 뭔가 이상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더 이상 정상인 사람들이 정상처럼 생각 될 곳은 없는 것 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뭔가 모자라다고 보는 것은 책의 내용과 결론이 조금은 부합되지 않고, 지나치게 여성들을 '희생양'처럼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책에선 끊임없이 세상의 시선과 광고가 여성들을 굶게 만들고 수술을 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론에 와선 그 시선을 제일 먼저 바꿔야 할 것들은 남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이라고 말한다. 살이 빠진 친구를 축하해 주지 말고,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전반적으론 사회의 과도한 반응 탓을 해 놓고 '여자들이여, 각성하라.'의 멘트를 날린다니, 조금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더 이상 美라는 것은 여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젠 남자들도 끊임없이 가꾸어야 하고, 헬스클럽에서 근육을 키우기 위해 땀방울을 흘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여름철 소매가 없는 티를 입기도, 해변에서 수영복차림으로 활보하기도 부끄럽게 된다. 책에선 이런 남성들은 파워가 넘치고 뭔가 능동적인 사람으로 보이는데 반해, 날씬한 몸매를 가진 여자들은 뭔가 선정적이고 가벼워 보인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 시대가 추구하는 美가 과도한 것은 사실이다. 책에서 말한 것처럼 (독일권 작가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행해지는 어린아이들의 성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있다) 우린 능동적인 신체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찍어내는 신체를 뽐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론 가학적이고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더이상 그런 가학적인 행위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간 전체가 만들어진 美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광기어린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있다. 외면적 아름다움보다 내면적 아름다움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허울좋은 거짓말이 된지 오래인 것이다.

     하지만 美의 기준은 변화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계속 보고 있으면 질리기 마련이듯 현재 우리가 정해놓은 美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것의 상실 탓이라고 본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자신에게 당당해지자.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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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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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론 그런 책들이 있다. 내용도 몰라요 작가도 몰라, 허나 한 번 본 제목이 유난히 기억에 남아 머리 속을 맴도는 책. <나쓰메 소세키를 읽는 밤>(김영헌 지음, 작가, 2007)이라는 책은 내게 그런 책이다. 난 그 책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했지만 작년 하반기, 우연히 보게 된 그 책의 제목은 오래오래 머리 속을 맴돌았다. 한 작가가 낸 산문집에 또 다른 작가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꽤나 인상적이었고 '읽는 밤'이라는 말 자체가 왠지 로맨틱 했다. 하지만 그 것이 그 책에 대한 관심보다는 소세키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니 이를 보고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번다고 했던가.
 

     소세키의 책은 (소세키보다 후대의 작가이지만)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리게 했고, (소세키와 전혀 다른 언어권의 작기이지만) 카뮈를 떠올리게 했다. 소세키와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카뮈.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을 생각 해 낸 것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경험 탓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처음 읽은 후, 난 일본문학이란 내 입맛에 맞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아주 자주 범하는 내가 또 한 번 너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2년 후, 다시 그 책을 읽었을 때 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에 매료됐고, 그 책을 오래오래 다시 읽을 책 중 하나로 꼽아버렸다. 아직도 몇몇 작가를 제외하고 일본문학은 내게 깊은 맛을 끌어내는 그런 종류는 아니지만, 제외되는 그 몇몇 작가들 때문이라도 일본문학은 아직 더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소세키의 '그 후'가 내게 하루키를 연상시킨 까닭은 이 책도 그리고 2년 후,가 내게 필요할 것 같기 때문이다.

    

     다이스케의 생활과 행동,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은 절대 과하거나 인상적인 것이 없다. 마치 우리 입맛엔 조금 싱겁게 느껴지는 일본 음식처럼 조용하고 단조롭다. 이런 단조로운 일상으론 장편은 무리, 라고 생각이 될 무렵 느끼게 된다. 그게 벌써 300페이지를 넘게 이어오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그건 이 책이 주는 가장 강한 충격이 된다. 별거 없는 사건들이 뭔가 색다른 분위기를 뿜으며 독자를 이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 역시 그 힘에 이끌려 버렸다는 것.

     그럼에도 2년 후가 필요하다고 한 것은 내가 일본문학을 그다지 입에 맞지 않아 하는 까닭은 조금 단조로운 그 문체 탓이기도 한데, 소세키의 이 책 역시 단조로운 문체가 이어져 난 이 책을 읽으며 조금 붕붕 뜨는 듯한 기분을 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뭔가 은근한 흐름이 있었고, 그것을 느꼈기에 이 책에게 2년 후, 라는 약속을 기하고 싶다.

 

     그리고 카뮈를 떠올린 까닭은 마지막 부분 탓이었는데, 이 책은 결말이 없다. 즉, '그 후'의 이야기를 독자의 몫으로 남기고 있는데, 대신 그 마지막을 빨간색이라는 시각적인 감각으로 대체한다. 마치 카뮈의 이방인을 읽으며 뫼르소가 느낀 태양을 체험하는 기분같았다. 왜 소세키를 심미주의 작가라 칭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책 안에는 다양한 시각적 감각과 후각, 청각적 감각이 흐르고 있지만 마지막의 빨간색만큼 강렬할 수는 없었다. 뫼르소가 느낀 태양 같은 강렬한 빨강. 그 빨강이 다이스케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고 독자 나름대로 만들어 갈 그 후의 이야기를 전개 하게 해 주는 듯 했다.

 

     소세키의 <그 후>는 내게 2년 후를 기약하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뒷 이야기가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다이스케와 히라오카가 오랜만에 만나서 한 대화 중 한 구절이 책을 읽은 후 내 마음을 대신해 줄 것만 같다.

     다이스케는 말없이 궐련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후 어떻게 지냈나?"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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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왕 주몽 1
삼성출판사 편집부 엮음 / 삼성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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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마법 천자문'이라는 책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 현재 15권까지 나와 있고 계속 출판되고 있는데 이 책이 한 권 나올 때 마다 아이들은 좀 더 빨리 이 책을 사려 혈안이 된다고 한다. 영어 공부만 해도 버거울 아이들에게 한자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하는 책이라는 것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훑어 볼 때면 늘 궁금했었다. 그러던 중 이제 막 초등학생인 사촌동생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아직도 나 홀로 동화책을 읽는 어른 이건만, 그놈의 책 욕심이 뭐라고 다 읽은 동화도 남에게 잘 주지 못했는데 이 사촌동생만은 예외였다. 예쁜 짓을 밥 먹듯 하는 녀석에게 난 늘 뭐라도 줘야 할 듯한 마음에 내 책을 꺼내주곤 했는데 사실 그다지 크게 환영을 받진 못했다. 그래도 난 늘 이 녀석에게 책 읽는 즐거움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런 누나가 최고가 된 사건이 바로 '마법 천자문'이었다. 자기의 친 누나가 미운 열살의 행동을 하자 뒤에서 작은 소리로 "쯧쯧. 저런 계륵."이라고 하는데, 이를 알아들은 어른들은 배꼽을 쥐고 웃어야 했고 이를 알아듣지 못한 그 녀석의 친누나 포함 몇 명들은 어른들이 웃는 이유에 눈이 동그래져야 했다. 난 작은 엄마에게 저 어린 녀석이 그 말을 어찌 알았냐고 물어봤고, 작은 엄마는 마법 천자문을 빌려 보더니 저런다는 말을 하셨다. 그 다음 날, 난 그 녀석의 손에 새로 나온 마법 천자문을 안겨 줬고 환영받지 못하는 책만 주던 누나는 그 날로 최고의 누나가 되었다.

 

     한자왕 주몽이라는 책을 앞에 두고 마법 천자문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책이 내 호기심을 끌은 이유는 온전히 그 책으로 최고가 된 누나가 새로운 한자 세계를 그 녀석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 책을 보자마자 난 귀여운 그 녀석의 서글서글한 미소가 떠올랐고 그 녀석과 함께 읽기 위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히트를 한 것은 알고 있지만, 주몽이라는 만화영화까지 방영 된 것은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은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다고 하는 주몽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어린이 한자 학습서 이다. 눈이 튀어나올 듯하게 큰 캐릭터들은 각자의 의상을 입고 열심히 책 속에서 움직이며 아이들의 흥미를 놓지 않고 한자 학습을 유도해 나간다.  

 

     다른 한자 학습서와도 비교를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본 것은 베스트셀러 탑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그 마법 천자문 (그것도 15권만;;) 뿐이었기에 그 책과 잠시 비교를 해 보자면, 아이들의 흥미를 한자 학습까지 이어가기엔 이 책 보다 마법 천자문이 조금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마법 천자문에서는 손오공이 물을 때리면 물이 水 모양으로 튀어 올라 아이들에게 이것이 물을 뜻하는 수라는 글자임을 가르친다. 하지만 이 책에선 그런 재미있는 연상법이 아닌 주몽이 한자 학습을 해 나가는 것을 따라가며 아이들도 학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책보다 조금 더 생동감 있고 또렷한 캐릭터를 사용해서 아이들의 눈길을 끌기 충분하다. 또 아이들이 볼 책은 어쨌든 부모님이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볼 때, 부모님이 한 때 열광했던 주몽이라는 드라마를 떠올리며 그 건장하고 예쁘던 배우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고를만한 장점이 있다고 본다.

 

     아이들의 관심을 유도하며 재미있게 학습할 수 있는 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다. 가장 좋은 책은 부모님들이 좋아하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선택을 돕는 것은 부모님들의 몫이다. 서로의 이해관계를 잘 반영한 이 책이 아이들, 그리고 부모님 모두에게 좋은 인기를 끌 것이라 예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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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과 매혹의 고고학 - C.W.쎄람의 사진으로 보는 고고학 역사 이야기
C. W. 세람 지음, 강미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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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생각해 보면 관심 외 분야라고 생각했던 것들과도 우린 꽤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살아오고 있다. 숫자는 보기만 해도 머리에서 쥐가 난다고 하는 사람도 매일 돈을 주고 받으며 살고, 영어는 듣기만 해도 울렁거린다고 하는 사람도 일상 생활에서 텔레비전이나 케이스 같은 자잘한 영어단어들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학자들의 전유물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고고학이란 분야도 우리와 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너무 흔히들 써먹는 표현이라 식상할 법도 하지만 다시 한번 써먹자면 '교통이 발전해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가는 지금' 고고학이란 이 지구촌을 더 즐겁게 해 주고 있는 요소가 아닌가 한다.

 

     영국에 가면 대영박물관을 가 보아야 하고, 프랑스에 가면 루브르박물관을 가 보아야 한다는 등 어떤 나라에 가면 꼭 가보아야 할 필수코스에는 박물관이 있다. 그런데 이 박물관이란 것은 사실 옛것을 찾아 현대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곳이 아니던가. 과거와 현재의 소개팅 장소, 그것이 바로 박물관임을 생각하면 이제 우린 꽤 쉽게 옛 것과 조우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즉 시간을 뛰어넘는 일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그것들이 다 고고학이란 학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딱딱하고 어렵다고만 생각했던 것들이 생각해 보면 꽤 친숙하게 우리의 옆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이 고고학이란 학문은 우리의 선입견에 비해 우리와 아주 가까운 사이임에는 틀림없다.

 

     이 책 <몽상과 매혹의 고고학>은 고고학이란 학문을 한층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얼핏 보면 전문적인 지식의 나열일 것 같아 선뜻 다가가기 어렵지만 한 장 한 장 책을 넘길 수록 빠져나올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어 마치 모험을 늦출 수 없는 열띤 탐험가가 된 듯한 기분을 준다. 물론 전문적인 지식이 전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허나 고고학이란 학문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유물이나 문명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것들이 발견되기까지의 일화를 들려주니 재미있지 않을 수가 없다.

     난 이집트나 그리스의 유물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중앙 아메리카의 고고학에 관한 이야기가 특히 흥미로웠는데, 이젠 쉽게 그 복제품을 볼 수 있는 이집트나 그리스의 유물보다는 뭔가 미지의 세계라는 점에서 흥미가 동한 듯 싶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 많이 알려져 있는 무엇보다는 아직 잘 알 수 없는 어딘가에 마음이 더 끌리는 법. 그리고 고고학도 그런 마음에서 시작 된 것 아니었던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가면 유럽인들의 약탈행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리스의 신전을 통째로 가져올 수가 없어서 기둥을 토막토막 잘라 내어 박물관의 한 쪽 벽에 세워둔 것은 왠지 신전이란 느낌보다는 허섭쓰레기의 느낌이 더 강렬하다. 그들이 시작한 발굴이란 행위는 많은 모험가들을 그 땅으로 이끌었고 고고학이란 학문을 세워 현재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씁쓸한 부분이 많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박물관 내의 전시물보다는 전체가 남은 폼페이나 피라미드가 더 감동적인데, 사실 폼페이에 있는 많은 시신들도 그리고 피라미드 안에 있던 부장품들은 대부분 다 전 세계 어딘가에 흩어져 있으니 과거 사람들은 현대인들을 매혹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고 얼마나 많은 죽음을 흘렸는지 생각해 보면 '학문' 그리고 '발견'이란 이름 하에 행하고 있는 우리의 이런 행위들이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책은 다 좋았다. 고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 법 했고, 여건이 되지 않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적지를 가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체험할 수 있는 멋진 사진들을 많이 제공하고 있다. 물론 한 번 직접 봄만 못하는 것들이지만, 이렇게라도 흥미를 갖고 관심을 갖다가 우연한 기회에 직접 보게 된다면 그 감동은 더 크지 않을까란 생각을 한다. 하지만 조금 아쉬웠던 것은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중앙 아메리카의 밀림에는 우리가 아직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신비가 숨어 있다. 하지만 앞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하나씩 베일이 벗겨지게 될 것이다. 지중해 문명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큼 중앙아메리카 문명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쓰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p.327)

     나 역시도 위에서 말했듯 이 책의 중앙아메리카 부분에 관심이 더 갔다. 그것은 아직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 충족을 위해 우리가 훼손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생각해 본다면 이 말들이 꼭 인간의 노력에 의해 중앙 아메리카의 밀림도 훼손할 것이다, 라고 삐딱하게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과학과 자연의 조화. 그것은 멀고도 불가능한 말일까? 이 책을 읽으며 깊어진 고고학에의 관심만큼 착잡한 마음도 한결 깊어짐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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