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왕 주몽 3
삼성출판사 편집부 엮음 / 삼성출판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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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왕 주몽을 만나기 시작한 이후, 이 책이 나오길 기다리게 된다. 그것은 귀여운 그림체와 엉뚱한 주몽의 캐릭터가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사촌 꼬맹이 깐돌이에게 이 책을 전해줄 시간을 두근거리며 기다리게도 되기 때문이다. 며칠 전, 꼬맹이와 통화를 하며 "누나가 한자왕 주몽 3권도 준비해 놨어. 그러니까 빨리 만나자." 라고 하니 꼬맹이는 올망졸망한 목소리로 쑥스럽게 "응."이라 대답한다. 이녀석을 사랑하지 않을자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 꼬맹이처럼 캐릭터화 된 주몽도 귀엽다. 처음엔 주몽의 굴러 떨어질 듯 큰 눈이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3권째가 되자 그런 눈이 주몽을 정말 '한자왕'마냥 똘똘해 보이게 만드는 듯 하다. 
 
     3권에서는 소서노의 나라에 전쟁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모수와 주몽, 그리고 두 왕자가 소서노의 나라로 가는 것이 주된 스토리로 전개 된다. 역시 중간중간마다 재미있는 일화들이 벌어져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는 신나게 책을 읽으며 한자공부를 할 수 있을 듯 하다. 특히 처음의 '파자놀이'는 숨은그림 찾기를 하듯 한자 속에서 또 다른 한자를 발견해 내는 재미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학습에 흥미를 더 붙여 줄 것을 기대하게 한다.

     초등학교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다 보면 아이들에게 흥미를 지속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된다. 흥미를 유발시키는 것도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특히 우리가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것에는 아이들이 금새 관심을 꺼버리기 일수이다. 하지만 이렇게 재미있게 학습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어디있겠는가. 한자왕 주몽은 이 책이 마지막이 된다고 들었다. 하지만 주몽과 일행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끝이 아니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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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꿈이었을까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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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다보면 그 소설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어 버릴 때가 많다. 한꺼번에 쉬이 읽을 수가 없어서 쉬엄쉬엄 이 소설을 읽었다. 한쪽을 읽고 내려놓기도 했고, 한마당을 읽고 내려놓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소설을 들은 그 순간부터 내려놓은 얼마 후까지 몽롱함에 사로잡혔다.  잠시나마 소설에 몰입했던 내가 내가 맞는지, 거기에서 쉽게 빠져나온 지금의 나는 내가 맞는지, 세상의 모든 것이 일사병에 휘청대는 순간처럼 비틀거렸다. 책을 읽고난 지금도 난 내가 읽은 것이 그저 텍스트일 뿐인지 하나의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소설의 제목을 따라 움직인 마음이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을 한바탕 꿔 버린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할지라도 내게 은희경의 소설은 화려하다. 누군가는 내가 그 나이를 겪어보지 못했기에 은희경의 감성에 녹아들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난 분명 소설의 분위기엔 쉽게 젖어든다. 특히 이런 몽롱한 감성에는 이미 입속에 들어가버린 마시마로우처럼 손 쓸 도리가 없다. 그렇게 젖어들면서도 왠지 그녀 특유의 감성은 내게 버겁고 어울리지 않는 섹시한 옷을 걸치고 있는 힘껏 발꿈치를 들어올리고 있는 듯 힘이 든다. 그리고 이 소설 역시 한바탕 꿈을 꾸게 해 주었지만 뭔가 한 구석에 삐걱삐걱 걸림이 남아있다.  

     환각을 하나 마련해두고 있으면 쓸모없는 외로움이나 질문 따위는 쓰레기처럼 그곳으로 빨려들어가서 폐기된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현실 속에서는 그럭저럭 건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게 인생인 모양이었다. (p.126)

     준은 자신의 인생엔 변화나 일탈을 요구하는 환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인캐슬에서 만난 그녀는 준의 환각이었고, 프라하에서 만난 미나와 미아도 꿈이었으며, 어쩌면 하품하는 쌍둥이였던 진도 준의 환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들과 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준은 꿈을 꾸지 않게 되었지만 준은 여전히 외로웠고 헤드라이트의 불빛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준에게 특별했지만 버리고 싶은 무엇이었고 그래서 현실에서 준은 그들을 찾았지만 꿈에선 애타게 버릴 수 밖에 없었다. 현실과는 다른 꿈, 사실이 아닌 삶 그래서 그 꿈을 '악몽'이라 불렀는지도.

    비틀즈, 에곤실레, 카프카의 성. 음악과 미술과 문학은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 책 속 흐름을 끌어나간다. 그 어느 하나도 대중에게 '신비감'을 앗아가진 않았던 것들이 책 속에선 의식과 의식의 흐름을 이어 그 누구도 노웨어맨일 수 밖에 없게 한다. (특히 이 소설이 인터넷에서 연재되었던 것임을 상기하면) 우린 존재 속에서 익명을 추구하고 그 익명 속에서 또 다른 자아를 추구하고 싶어하는 모습없는 실체로 현재 남아있다. 책 속의 아이콘들 역시 더 이상 대중들에게서 하나의 실체로 남아있기 보단 하나의 이미지로, 하나의 개념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아니던가.

     그 이미지의 결합 속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 흐름에 마음을 맞기자니 이 소설을 만나는 것은 정말 꿈같고 몽롱해 질 수 밖에 없다. 내겐 아직 버거운 은희경의 화려함 속에서 나 역시 준이 마지막에 맞보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눈을 찡그린 기분이다. 하지만 그렇게 찡그리고 만난 세상이 나쁘지 않았음은 이 모든 것이 꿈임을, 그리고 어쩌면 현실임을 어렴풋이 느끼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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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를 선택했는가 - 낭만적 사랑에 빠진 남녀의 뒤로 숨긴 속마음을 분석한, 우리가 미쳐 몰랐던 짝짓기의 심리학
볼프강 한텔-크비트만 지음, 장혜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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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짓기의 심리학, 동물도 아니고 사람에게 짝짓기라니 뭔가 찜찜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틀림없이 매혹적인 말이었다. 사랑에 빠진 남녀의 뒤로 숨긴 속마음을 분석했다니... 그 말은 즉, 이 책을 조금만 분석해 보면 무덤덤한 나도 낭만적 사랑에 빠지는 법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종종 텔레비전 속의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은 연애 이야기를 보면 타인을 향한 지나친 열망에 모든 것을 버리는 그들의 모습이 한심해 보이면서도 내게도 한번쯤 저런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바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특히 요즘 '넌 정말 혼자 살 팔자인가봐.'란 말을 종종 들었고, 이게 오뉴월에 서리 내리는 소리도 아니고 때가 한창인 꽃처녀가 들어야 할 소리인가,하며 참 착잡하기도 했었던 차였다. 그런 내게 이 책의 제목과 그 밑에 상큼하게 붙어있는 부제는 미심적으면서도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선택' 하는 것이냐, 받는 것이냐 이 두가지 기로에서 종종 자존심을 건 세기의 대결이 이뤄지기도 하고 죽쒀서 개주듯 남 좋은 일만 하기도 하고 때론 이 선택의 승자가 되어 사랑을 쟁취하기도 하니 사랑에서 '선택'은 필히 중요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없다.

     그동안 사랑을 다룬 문학작품들에서 사랑에 빠진 남녀는 서로의 마음을 얻기 위해 조금 멀리 서서 빙빙 멤돌다가 어느 한 순간 스파크가 몰려오면 동시에 사랑을 고백하고 그 열렬한 열기 속에 휘말리곤 했다.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열기 속에서 그들이 상대를 알아가며 자신을 알아가고 또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바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하고 싶으면, 우선 네 자신을 제대로 알고 네 자신을 아낄 줄 알아라!'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나 자신을 더 멋지게 가꾸며 다가올 사람을 기다리겠다고. 그 땐 그 말이 멋있다고 느껴지면서도 언뜻 '니 몸 값을 높이겠다는 거냐?' 라는 삐뚠 시선도 거두진 못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때, 나와 더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크다. 그것은 단지 돈, 외모, 학벌의 문제가 아닌 나 자신에게 얼마나 당당하고 솔직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 책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한다. 나 자신을 알고 받아들이는 일. 그 일에 서투른 사람들은 종종 사랑에도 실패했고, 저자를 찾아와 상담한 사례들에는 그런 예들이 많다. 하지만 늘 음모론을 제기하는 나는 이번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란 어차피 우리가 예기하지 못한 채 찾아오는 감정의 소용돌이인 것을, 굳이 심리학적인 분석까지 받아가며 맞춰가려 노력해야 하는 건지에 대한 의문. 아직 사람의 뇌에 대한 연구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나아가야 할 부분이 수없이 많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단지 심리학자의 말에 의해 휘둘리며 또 다시 잘못된 자아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 그래서 난 이 책이 조금 아쉬웠다.

     물론 사랑이란 누군가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만들고 찾는 것이라지만 이 책이 초반에 독자를 이끈 '짝짓기의 심리학'에선 조금 벗어난 셈이니, 그것에 초점을 맞춘 독자로서는 아쉬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자신을 사랑하고 바로 볼 줄 아는 것,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정말 뭘 모르는 소리이다. 문득 이런 노래가 생각난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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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 이랜드 노동자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6
권성현 외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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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참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다. 나와 관련되지 않은 일에는 되도록 끼어들고 싶지 않아 한다. 그것이 옳은 일임을 알아도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까닭에, 혹은 귀찮아질까봐 외면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적어도 난 괜찮으니까. 우린 그렇게 얼마나 이기적인 삶을 살아오고 있는가. 그러다가도 우리의 생존과 결부가 되어버리면 마치 오랫동안 이런 일에 관심을 가져왔다는 듯 투쟁적으로 변모한다. 그렇게 촛불시위가 시작된지 얼마가 지났다. 우리에겐 몇달 전 이야기지만 몇년 전 이야기인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이기적인 삶의 뒷편에서 외롭게 촛불을 밝히고 있던 사람들, '비정규직'.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2년 전 종종 지나다니던 길엔 이랜드의 횡포에 대한 대자보가 오래도 걸려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그 자리를 지나치면서도 난 그 글귀에 눈을 두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던 까닭도 있고 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도 있다. 그렇게 난 대형마트에 가서 물건을 구매했고 가끔은 계산대 직원들이 친절하지 않다며 툴툴 거렸다.

     난 마음이 답답할 때면 대형마트에 갔다. 마트에 빼곡하고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을 보면 마음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마트 쇼핑을 좋아하는 데에는 백화점 쇼핑을 즐기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단 한번도 그 가지런한 마트 이면의 모습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동생이 파트타임 일을 구했다. 홈에버에 입점되어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첫 출근을 하고 와서 동생이 말했다. "이랜드에서 하는 거라 대기업이면 뭔가 다르겠지 했는데 근무수당은 더 적고 수습기간은 더 길어." 이제 막 성인이 되었고 아직 사회의 일에 어두운 동생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랜드의 그 검고 후미진 손놀림이 얼마나 인력을 착취하고 돈을 긁어 배를 불리는지.

     하지만 대형마트를 선호하던 나, 대자보에 외면하던 나 역시도 그런 검고 후미진 손놀림에 절대 반지를 끼워주는 데에 일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자기 합리화를 하자면 난 그리도 무지했던 것이다. 알았다면 그 정돈 된 할인마트 안에서 마음을 정리할 수는 없었을테니. 그들의 비친절함을 툴툴대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이랜드 노조는 출범당시부터 일반노조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움직였다는 것이 그랬고 매장을 점거하는 등의 다소 과격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는 것이 그랬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행동이 거셌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 그동안의 대기업의 횡포에 비해 너무 늦게 시작된 것 뿐이다. 이 책은 이랜드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그리고 그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들의 바람은 많은 임금 인상이나 근무조건 개선 등이 아니다. 단지 사람답게 일하는 것, 그것이 이들을 이토록 힘들게 하고 1년이 넘게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운동을 계속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심정을 채 헤아릴 수 없다. 우린 누군가 매장을 점거하고 연행되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카트를 끌고 매장에 들어가 물건을 구입한다. 제 2의 대기업이 되어 한 구석에서 소외당하는 노동자들을 또 다시 억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에게 자신들과 함께 소리를 높이고 운동을 하자고는 하지 않는다. 단지 비정규직을 타파하고 사람답게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회를 구현해야 함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겪어보지 않았어도 알아달라고, 그렇게 억압받는 사람들이 사회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우린 연일 88만원 세대에 우리가 포함됨을 걱정하고 우울해 했으면서도 이런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눈을 감았던 것이다. 이들은 88만원도 못되는 삶을 살고 있는데도.

     책을 읽고 분노했으면서도 이 책에 대한 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이들의 삶을 눈여겨 봤으면 좋겠다. 지금 이 땅에는 비정규직이 놀랄만큼 많이 있고 그리고 늘어가고 있다. 이들은 마치 '인간 소모품'(expandible)처럼 대체되고 사라져간다. 그리고 그 '이들' 속에는 우리도 포함될지 모르는 일이다. 아니, 이미 포함되고 있다. 이들의 꿈은 어쩌면 소박한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의 세태로는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유토피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이들의 꿈이 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지금의 우리가 암울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래도 손에 손을 잡고 조금만 더 좋아지기를 기도한다면 그것이 아주 조그만 변화는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한명이라도 이들을 기억해주고 이들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그 변화는 조금 더 빨리오지 않을까? 책 속에서 한 관계자는 말한다. 자신에게 희망을 말하지 말라고. 누가 이들을 이렇게 절망하게 만들었을까. 우리에게도 분명 그 책임은 있다. 이제 그들의 손을 잡아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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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안다 - 우리가 꼭 읽어야 할 김원일의 문학상 수상작
김원일 지음 / 푸르메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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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해 말하기 전에 7-80년대 우리 문학 깊은 곳에 녹아있는 아픔의 기억에 대해 말하고 싶다. 우리 문학은 때로 우울하다고 말해진다. 그것은 필히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의 영향이 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시기의 문학 속에서 우리는 떨쳐내지 못한 과거의 기억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전쟁, 분단이 남긴 상처는 몇 해를 거듭해 치유되지 못한 채 곪아가고 있었고 이 상처를 온전히 겪어냈거나 혹은 지켜본 세대에게 이것은 피해갈 수 없는 문학적 깊이로 남게 된다. 이것은 몇년 만에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울한 무엇으로 변해버리고 현재를 사는 우리는 때론 그것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과거의 아픔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다신 그런 상처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걸어온 명백한 현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젊은이들은 전쟁, 그리고 분단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이런 상처를 다시 들어내는 것을 다소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거나 과거에 얽메인 비현실적인 사고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그런 현실 속에서 김원일 같은 작가들이 갖는 문학적 위치는 대단하다. '마당 깊은 집'(몇해 전, MBC 느낌표 선정도서가 되어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기회가 있었다.)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김원일은 이런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분단의 아픔과 시대의 상처는 피해갈 수 없는 문학적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의 작품을 그런 상처와 아픔의 문학적 창조로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김원일의 문학상 수상작 네편으로 구성 된 이 책을 통해 더 잘 알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네개의 단편(「환멸을 찾아서」,「손풍금」, 「나는 나를 안다」,「임을 위한 진혼곡」)에는 모두 '죽음'이라는 공통 된 소재가 담겨있다. 이제 시대적 아픔은 죽어야 하는, 아니 그래선 안되지만 그럴 위기에 처한 낡은 것이 되 버린 것을 작가는 아는 까닭일까. 아니면 이제 앞이 아닌 뒤를 돌아보며 정리해야 하는 나이에 서 있기 때문일까. 작가는 죽음을 통해 우리의 아픔을 돌아본다. 물론 「환멸을 찾아서」, 「손풍금」,「임을 위한 진혼곡」에서의 회귀는 다소 무겁고 쓸쓸하다. 「환멸을 찾아서」에는 한 이상주의자의 비망록이 담겨 있다. 이상을 찾아 월북을 택했건만, 그것의 마지막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현실에 대한 회환만이 남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이상을 꺾진 못하지만 그는 죽음을 맞이하여 그런 심경을 토로하여 강물에 띄워보내는 것이다. 「손풍금」과 「임을 위한 진혼곡」역시 소재로 삼은 것이 청춘과 임을 향한 애정이라는 데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골격은 비슷하다. 남한의 체제와 다른 의견을 가진 것으로 몰린 두 남자가 화자의 회상에 있고 죽음을 앞둔 나이에서 그들을 그리며 과거의 잔혹하고 비정했던 현실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속에 과거에 대한 원망과 비난의 화살이 숨어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아픔을 이제까지 원망한들 무엇이 남겠냐는 작가의 어조는 「임을 위한 진혼곡」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그것을 규명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한탄은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작가는 분명히 과거를 통해 과거에 머무르려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이런 작품들에 관심을 갖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은 잊으면 안되는 역사의 한 편에 대한 시각과 함께 이 책에서 돋보이는 지방적인 색채이기도 하다. 과연 시간이 지나 이 책의 작가 세대가 모두 세상을 등졌을 때, 이처럼 실감나는 지방색채를 (특히 이북지역의 그것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점이 계속 걱정되며 아쉬웠다. 그 색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이다. 그것은 분단된 나라의 통합. 더더욱 안타깝게도 말은 쉽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런 문학들은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그 시간 속에 저물어간 사람들에 대한 진혼곡이자 현재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안고 있다.


 그렇게 돌아서는 안 된다고 수없이 다짐했는데 팔순 나이에 이르자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왜 안타깝게 떠오르는지 알 수 없다. 누구나 한번은 맞게 되는 죽음처럼, 누구에게나 젊은 한때는 오직 한 차례, 조금 전 꿈처럼, 꿈결이듯 짧게 스쳐 가버리기 때문일까.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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