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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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작가에 대해 상상한다. 작가는 책상에 가지런히 앉아 글을 쓴다. 나는 작가의 어린 시절로 간다. 그녀의 부모를 보고, 부모를 향한 그녀의 감정의 흐름을 본다. 그녀는 자라며 사랑을 하고, 세상을 알게 된다. 풋풋했을 시절 그녀는 사랑을 믿었다. 그 믿음에 금이 가고 자존심에 상처도 입으며 그녀는 애초에 믿음 따위를 가진 것이 잘못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책의 단편 속에서 내 상상 속의 작가가 만들어졌고 그녀의 삶이 세워졌다. 왠지 이 책은 귓가에 조곤조곤 자신의 성장 과정 속에서 발생한 비밀을 얘기하는 것만 같다.

     단편집에 대한 애착이 크지 않은 이유는 이렇다. 단편 소설을 향한 뇌 속 회로가 유난히 느슨한 것인지, 집중력을 키워보겠다고 억지로 다녔던 속독학원에서의 방침이 십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몸에 배어있는 것인지, 아니면 한 때는 총명하다는 소리도 종종 들었던 내가 세상의 갖은 풍파 속에 찌들며 뇌부터 손상되기 시작한 것인지는 몰라도 단편을 읽을라치면 그 순간순간엔 책 속의 좋은 한 문장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덮고나면 화면조정 시간의 일률적인 시그널 음이 머리 속에 울려퍼지는 것이다. 뭐였지? 내가 읽은 것이? 뭐 이런 기분이 들고나면 영 다시 단편을 읽을 기운이 생기지 않는다. 물론 그 문장들은 내 몸 세포 어딘가에 잠식되어 있어 누군가 날 눕히고 최면 같은 것을 걸면 술술 나오게 될지도 모르지만 내가 날 최면 걸어 그것들을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권여선이 쓴 두 권의 소설집을 읽었음에도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선명하지 않았다. 그저, 글 잘쓰는 작가라는 막연한 느낌 밖에. 그래서 더 꼼꼼하게 파고 들어야 했다. 첫번째 소설 <빈 찻잔 놓기>가 제목부터 그 끝까지 날 완전히 매혹시켰기 때문에 절대 이 작가의 이 단편 느낌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읽어나간 단편 속에서 난 작가를 보게 되었다.

     모든 단편은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후에 '아, 그 땐 그랬었던가.' 하고 사건들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것은 단편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서 몸서리치게 그 이유가 드러난다.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 _<내 정원의 붉은 열매>

     그렇다면 이 소설 속 모든 주인공들에게 그 날, 그 때의 사건은 완성 된 것인가 아니면 작가의 작품이 결국 언젠간 모든 독자들의 삶에서도 나타날 일들이기 때문에 그 때 혹시 독자의 언저리에 자신의 작품이 떠오른다면 그 때 자신이 얼마나 완성 된 작가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작가의 오만인가. 하지만 혹여 후자라도 결코 밉지 않은 오만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작품 하나하나를 완성시켰고 그 속에 자신과 세상의 진심을 투영시켜 놓을 수 있다면 이 정도 오만쯤은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현실, 그들 사이의 갈등은 인류 보편적인 것들과 다르지 않다. 작가의 관심은 얼마나 넓고 크게 상상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삶을 보여주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노력하여 관찰해서 우리의 삶 속에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찾아내느냐에 있는 것 같다. 그러기에 이 작가에겐 꽤나 신뢰가 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우리의 삶들은 꽤나 시리다.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경험했기에, 그 보편적인 감정의 흐름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크게 공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잘것 없는 것들에 질투하고, 시기하고, 도피하고, 외면했으며 자신의 그런 모습을 감추기 위해 자존감만 높이는 우리의 수치스런 모습들은 이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작가의 내밀한 고백과 같음과 동시에 독자 스스로의 비밀 일기가 되기도 한다.

     내가 잊었던 그녀의 작품들에게 미안해진다. 왜 이리 좋은 작가의 멋진 작품들을 기억 한 켠에 미뤄뒀는지. 책장 앞을 서성거린다. 그녀의 작품집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본다. 이렇게 누군가가 애틋해지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내 기억 속에서 잊혀졌고, 내가 그것을 잊었다는 것도 잊었었지만, 이제 다시 그 순간이 왔고 이로서 그녀의 작품들이 완전해 졌다. 멋지고 완벽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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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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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작 두 권의 책을 읽고 이런 말을 쉽게 해도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구병모 답다. 환상적인 마법세계와는 다른 조금은 우울한 분위기와 신비로워서 슬픈 한 소년이 탄생했지만 그 생각이 탄생한 곳은 참 그이 답다. 처음 곤에 대한 묘사가 나왔을 때 만들어진 그의 이미지는 책을 덮을 때까지 머리 속을 유영한다. 그래서 책을 중간에 놓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내 동생이 아주 어렸을 적, 장래희망을 묻는 한 어른의 말에 당돌하게 '물고기'라고 답한 적이 있었다. 난 그 말이 창피해서, 사람은 동물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거야라며 핀잔을 줬고 곧 동생의 꿈은 '헤엄치는 로봇'이 되었다. 그게 그거였지만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도 크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 분명했으니. 문득 그 일화가 떠올랐고 난 왜 그 때 동생에게 왜 물고기가 되고 싶은지 묻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분명 그 때는 동생이나 나나 모두가 너무 어렸을 터였다. 그런데 정말 동생은 왜 물고기가 되고 싶었을까?

 

     인어공주만큼 슬픈 현실을 사는 곤은 아가미가 있고 반짝반짝한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다. 그는 사람이다. 그 아가미가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아비가 그를 물에 집어넣은 순간, 물에 의해 시작된 것인지 원래 있던 것이 물을 만나 열린 것인지. 어떻게 됐든 그는 물을 떠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시작이자 끝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은 꼭 물의 순환과정과도 같다. 무엇을 얻으면, 반드시 다른 것을 잃었다. 아가미를 얻은 대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존재를 잃었고, 처음으로 강하의 진심을 알았을 때 그를 떠나야만 했던 것처럼. 하지만 사실 모두가 이렇게 살아간다.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언가를 얻고 잃으면서. 또 그런 기브앤테이크의 문화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것이 지금의 우리가 아니던가. 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존재를 잃었지만 사고로 그 존재를 잃어버릴 뻔한 사람들을 돕는다. 그리고 사라진다. 자신이 발각되면 결말은 곧 횟집의 서늘한 칼날 앞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그의 그 믿음은 일말의 주저없이 대가리가 댕강 쳐 지는 횟집의 생선만큼 슬펐다.

     곤은 아름다웠고, 그 안에 속한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으로 서늘하면서도 따뜻하게 살고 있었지만 결국 무엇을 이라는 의문은 책을 읽는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나서 하나하나의 사연을 떠올렸을 때 고개를 주억거리게는 되었지만 그것은 확신에서 온다기 보다 내가 만들어 낸 합리화의 과정에서 온 것이라는 의미가 강했던 것이다. 도대체 결국 무엇을 작가는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또 하나, 10살배기의 입에서 나오는 상투적인 욕설들은 다소 거북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게 자라도 그 나이의 아이들의 사고와는 너무 먼 것이다. 어쩌면 강하의 말들이 그리고 너무나 갑작스런 그의 변화가 정말 아름다울 수 있는 이 소설에 흠을 낸 것만 같아 아쉽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단 말인가. 그냥 이 엄청난 상상의 물줄기에서 곤처럼 잠시 헤엄칠 수 있었다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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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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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이 들기 전, 이 책을 읽었더랬다. 그래서일까. 드문드문 떨어지는 꿈 속 영상이 지독했다. 불쾌하게 질퍽거렸고 온 몸을 내리 눌렀다. 일어나서도 몸은 개운하지 않았다. 머리 속은 이미 책의 단상들과 꿈의 영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도 모르게 벌써 습관처럼 기도문을 외고 있었다. 모두에게 자비를, 우리에게 구원을. 삶이 지옥같을 때, 가장 크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종교라는 것을 난 알아버린 듯 했다. 그럼, 화숙은 어디에 의지를 할 수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 역시 상실과 결핍의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 있었으되, 그 누구의 진실도 알지 못했다.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며 내게 던지는 그녀의 말은,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며 내게 던지는 그의 말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 주변인들이 내게 속삭이는 말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한 사건을 말하고 있었지만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정규 방송 시간이 끝나면 울리는 신호음이 내 머리 속에서 울려퍼졌다. 끝. 그들에 대한 나의 신뢰감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거짓말을 했다는 화숙을 말을 들으면서도 내 머리 속엔 아무 음도 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그럴 수 밖에 없는 그녀의 처지가, 그 속에서 느꼈을 큰 결핍감을 그렇게 풀어냈을 그녀가 안쓰러웠다. 거짓말은 그녀에게 구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나쁜 피 탓이었다. 외할머니가 끊임없이 말하 듯, 병신같은 년을 난 어미도 병신, 병신같은 년이 난 자식도 병신인 탓이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병신이란 두 글자로 수용하기에 현실은 너무나 냉정하고 지독했다. 도망갈 방법이 없는 막다른 곳은 지옥과 다름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했던 하나는, 그런 병신들을 생산해 낸 세상도 병신이었다. 모두가 어딘가로 울분을 풀어제끼고 있었으 되, 그것을 받아주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누구도 모두의 울분을 삼켜주지는 못했다.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삼켜버리려 했던 수연도 결국 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낫다. 결국 그들의 새로운 시작은 새로운 가족 형성의 희망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쁜 피의 순환이라는 점에서 책은 끝까지 잔인했다. 또 다른 그들 같은 병신의 탄생에 기쁘게 손뼉을 쳐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럼에도 조금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것은 작은 빛 줄기 하나 허락되지 않는 곳에도 늘 반짝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사람이란 동물은 버릴 수 없는 탓이다. 그런 현실을 지독한 허구 속에서 보여주는 이 책은 정말로 지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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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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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을 보고 판타지 일 것 같다는 억측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탓일 것이다. 코미디 판타지일 것이라는 단순한 망상(!)을 하면서도 몇 개월 전 읽었던 <새엄마 찬양>의 짧은 단편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쉬운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라고 생각했다. 노벨상을 받았건 뭐건, 그런 것은 개인의 상상을 침해하는 데 중요하진 않다. 

그런 상상으로 이 책을 폈고 또 책에 당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이 책에 집중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빠른 스피드로 불규칙하게 바뀌는 서사의 주인공들이 바뀌는 탓이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의 통일성 따위는 없다는 듯 저자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생각나는 대로 마구잡이로 이야기들을 끼워 넣었다는 느낌이 드는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견디고 책에 몰입해 나가다 보면 어느샌가 그 이야기들을 즐기게 되고 작가가 흘려뱉는 듯한 반어의 코미디에 빠지게 된다.   

밀림을 지키기 위해 정부가 배치한 군인들에겐 욕구를 배출할 곳이 없다.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욕구란 다른 것이 아니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에겐 식욕이나 수면욕만큼이나 강하다는 바로 그 성욕의 문제다. 그 문제들이 커지고 커져 이들은 원주민을 겁탈하게 되고 이것이 큰 사회문제가 되고 만다. 그 문제를 위해 내놓은 해결책 하야 '특별 봉사대' 창설. 이 특별 봉사대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군관료인 판타레온을 책임자로 비밀리에 창녀들을 모은 후, 각 밀림에 주둔 해 있는 군인들의 욕구를 해소해 주기 위해 그녀들을 봉사활동 보내는 셈인 것이다.이 쯤 되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다. 마치 사대강 사업의 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해결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여기서 위대한 작가들의 위대한 작품의 특색, 고금을 막론하고 적용되는 보편적인 무언가가 숨어서 꿈틀대며 작가 특유의 위트나 기지로 그것을 살짝 덮고 꼬고 한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아하. 그래서, 상 받으셨구나.  

우리의 과거, 타인의 과거, 다양한 것들이 오버랩 되며 그것에 처신하는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물론 다른 배경 탓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아픈 과거고 슬픈 기억이라는 점은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현재에서 반성해 나가느냐가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 우리는 보게 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며 나와 비슷한 우리의 과거를 떠올릴 것이다. 물론 자의냐, 완벽한 타의냐의 상관은 있지만 이젠 우리도 한 권의 탁월한 문학작품을 통해 그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이 든다. 적어도 (옛날 이야기이긴 하지만) 영상 화보집은 아니어야 함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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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여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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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처음이 중요하다. 그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몇년 전에 사람들이 하도 귀연 미소네 뭐네 하며 극찬을 하기에 읽었던 <구해줘>를 난 좋아할 수 없었고 그 후로 기욤뮈소의 책은 절대 믿지 않았다. 표지부터, 띠지에 있는 내용까지 뻔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탓이다. 영화를 보는 듯한 전개에 진부한 사랑 이야기, 그리고 고대로부터 몇 만억번은 더 울궈 먹었을 법한 설정들이 짜증났다. 원래 지루하게 사는 사람일 수록 신선한 것을 더 쫒는 법이라 난 그런 식상한 전개들이 싫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뭐 늘 그렇듯이 일련의 사정에 의해 두 번째 기욤뮈소를 읽게 되었다. 머리가 좀 큰 건지, 관대해 진 것인지, 잘 팔리는 책들을 연구해 보고 싶다는 나름의 개인적 열망 탓이었는지 몰라도 기욤뮈소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는데 이 작가가 글을 못 쓰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과 (일단 가독성은 엄청나게 좋으니까) 사회에서 다수가 요구하는 글을 써낼 줄 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뭐, 한국의 백영옥 같다고나 할까. 즉 그런 것이다. 퀄리티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입맛엔 맛지 않을테지만 트렌드섹터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겐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느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역시나다. 기욤뮈소의 이미지 그대로의 책이고 그것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음은 물론 기대도 실망도 없다. 그냥 로맨틱 코메디 한 편을 눈으로가 아니라 머리 속으로 그리며 봤다고 생각할 수 있는 딱 그정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예전같지 않은 시선으로 기욤뮈소의 책을 보게 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점점 책 읽는 인구가 줄어가고 있는 이 때, 이런 가벼운 사랑놀음으로라도 누군가의 손에 책을 들려줄 수 있게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럴만큼 가볍고 달짝지근한 이야기라는 점. 이 정도면 훌륭하다. 어디서 들어봄직한 이야기들의 짬뽕이면 어떻고 뒷 얘기가 뻔하게 예상되면 어떠랴. 팔리면 됐고 많이 읽히면 됐지. 아마 나도 많이 변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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