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 2012년 제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전민식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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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탓인가보다. 소설을 읽으며 소모되는 감정의 질량이 너무 커져버렸다. 그만큼 힘이 든다. 얼마 전에는 마약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의 몽환적인 하루가 찾아왔었다. 공기는 무거웠고 마음은 어딘가를 부유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으며 또 하루가 우울하게 지나갔다. 마치 콘크리트 바닥을 300m쯤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렇게 깊은 땅 속에 묻혀졌고 내 위로 시멘트가 쏟아졌다. 그 무게에 내 몸은 짓눌렸고 숨은 가빠왔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삼재(三災)라는 것이 있다. 세가지 재앙이 삼년동안 찾아온다는 것인데, 그런 것이 정말로 있다면 난 아마 지난 삼년이 그런 시기였을 것이다. 하는 일마다 벽에 부딪혔고 한계를 실감했고 이렇게 살다가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내 목을 조를 것 같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누군가를 만나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시면 조금 즐거워졌으나 그건 한 순간이었다. 그 뒤로 더한 상실감이 왔고 그 상실감은 누군가를 만나기 이 전보다 더 지독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누군가를 만나야함을 알면서도 만날 수 없었다. 돌아보면 그 시기는 내 인생의 아주 짧은 동안이었지만, 나는 그 때 하루가 일년같고 내 평생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힘든 시기를 보낸 청년이 있다. 그 남자, 도랑은 그 이름처럼 나를 도랑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삶이 주는 갑작스런 시련을 알기에, 그 고단함이 어떤 것임을 알기에 나는 더 바싹 말라갔다. 모든 것을 내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사랑에 홀려 직업을 잃었고 형의 자살은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잘 나가는 컨설턴트에서 한 순간 노숙자로 전락한 그는 자신의 삶이 한 번도 녹록한 적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생활에서 빛을 찾으려고 하지만 문득문득 그 화려했던 시절의 자신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도, 그리고 나도 알고 있었다. 지독한 현실 구석구석에는 아주 작은 빛이 숨어 있어서 그것을 잘 찾는다면 다시 희망은 찾아오리라는 것을. 그는 그에게 내밀어지는 작은 기회들을 잡았고 나 역시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기회의 끝엔 또 다른 어둠이 기다리고 있는 법이다. 삶은 늘 풍족하기만 한 것이, 늘 즐겁기만 한 것이 결코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듯 우리를 방심하게 놓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 남자처럼, 그 남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삶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쳐진다. 마치 모든 것을 잃은 삼손이 모든 차원은 연결되어 있어서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차원 적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도랑과 도랑의 주변 사람들은 사악한 기운으로 엮여져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들이 이 소설을 돋보이게 한다. 웰메이드 소설, 양감이 있는 소설이라는 심사위원들의 말이 과찬이 아니게도 소설의 중간중간 많은 실마리들은 소설을 엮어간다. 복선이라기보다 세상에 우연인 것은 없다는 것을 증명시키는 것과도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든 삶을 이끌어가려는 몸부림이다. 그것이 나를 그토록 마르게했고 바닥 깊은 곳으로 파묻히게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결국, 끝내, 도랑도 나도 살아남았고 오늘도 살아간다. 이 소설이 더욱 현실적이었던 것은 희망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마치 나는 그것을 누릴 유일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냥 하는 모습 탓이었다. 그런 우리의 뒷통수를 치며 희망이 저만큼 멀어져갈 때, 또 다른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자만이 살아남고 그래서 나에게도, 그리고 도랑에게도 이 현실이 아직은 살만하고 살만 할 것이다. 그렇게 나도 함께 끝과 시작 사이에서 휘청거렸다. 아마 며칠은 이 소설이 남긴 잔상들에서 힘들긴 할 테지만, 이미 희망을 기다리는 법 따위엔 익숙하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또 다른 소설을 읽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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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5
파트리크 라페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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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규범 사이에서 아슬하게 이어지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던 드라마가 있었다. 2001년 이경영, 이요원이 주인공을 맡았던 <푸른안개>라는 드라마였다. 당시 이경영은 부인의 덕으로 대기업의 충수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이요원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의 나이 차이는 상당했고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사회적인 통념상 '불륜'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드라마에서 그린 그들의 사랑은 결코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성공과 부를 거머쥐었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 자리에 있던 한 중년남자의 욕망은 젊은 여성의 육체 혹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었다는 점이 강조되었기에 '불륜'으로 치부될 수 있는 그들의 사랑은 자아를 찾는데 도움이 된 하나의 방법적인 것일 뿐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아직 그 욕망을 이해하기 어린 나이였던 나는 이상하게 그 드라마에 끌렸었고 이경영을 안쓰럽게 여기며 이해하고 싶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요원을 떠나보내고 시골에서 홀로 헌책방을 꾸려가며 행복해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라는 말은 '스스로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데에서 온 말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물론 이경영은 사랑, 이별, 독립 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세상이 정해 놓은 수많은 규범을 깨트려야만 했지만,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 그런 선택을 하기도 해야한다고, 어린 나는 그렇게 그 드라마를 이해했었다. 이 책을 읽으며 오랜만에 그 드라마를 떠올렸다,

이 책에는 욕망과 규범 사이에서 다른 모습으로 사랑을 지키려 하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부인에게 기생하며 소소한 번역일을 하며 사는 루이와 유능한 증권중개인 머피, 이 두 남자는 한 여자 노라를 사랑한다. 입센의 '노라', 베케트의 '머피'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왕들, 이들을 연상시키는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범상치는 않다. 노라는 머피와 루이 사이를 오가며, 자유 연애를 즐기지만 기다리는 머피와 루이에게 그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환상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연애 방식은 다소 다르다. 루이는 부인을 속이면서도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다. 이성(노라)을 향한 욕망, 동성(추상적으로 나타나있기는 하다.)을 향한 욕망, 규범(아내)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 이 세가지 욕망에 충실하게 따르며 가장 큰 노라라는 욕망을 위해 다른 두 욕망을 이용할 줄 안다. 하지만 그는 알고있다. 자신의 마지막은 노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머피는 그렇지 않다. 그는 노라를 사랑하지만 노라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다. 때론 사랑이 그것을 뒤흔들지만, 그는 사랑에 그 모든 것을 포기할만한 용기를 갖지는 못한다. 결국 그는 규범 앞에 무너지고, 자신보다 더 열정적인 움직임 앞에 노라를 내어놓는다. 그리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노라 역시 안정적인 삶에 약하고 그러면서도 격렬한 사랑을 원하는 그런 나약한 여자일 뿐이다. 이런 세 사람의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이 복잡한 관계를 아름답게 그려놓는다. 그리고 그들보다 한 세대 위에 그런 사랑을 이미 결심했을 듯한 루이의 부모님 모습이 그려진다. 사랑했을테고, 그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테지만 서로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규범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그들에게서 이 세 젊은이들의 사랑은 어느정도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결국 머피는 성공적인 길을 선택하고, 결국 루이는 혼자인 삶을 택하고, 결국 노라는 루이를 찾아오는 것처럼 결말은 제공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라면, 이 제목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은 맞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이들의 욕망이 끝이 없으려면, 이들은 자신이 선택한 삶 속에서 또다른 욕망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머피는 계속해서 노라에게 돈을 주며 노라를 자신의 곁에 두어야 하고, 루이는 자신을 찾아 온 노라를 거부하며 또 다른 여자에게서 그 욕망을 풀어야 하고, 노라는 그런 루이를 잡아야 한다. 그것을 알기에 작가는 마지막을 모호하게,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으로 장식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 그것은 규범 앞에서 너무 딱딱해진다. 가장 말랑말랑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좋을 감상적인 것이 한없이 길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것은 세상이 그리고 우리가 정해놓은 감정의 한계선 때문이다. 사랑에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인지를 정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어떻게 본다면 결국 더 강하게 노라를 잡은 것은 루이인 셈이다. 그렇다면 때론 우리가 규범을 벗어나는 선택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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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사람은 그럴 턱이 있습니다 - <턱균형연구소> 문형주 박사가 들려주는 턱과 우리 몸의 비밀
문형주 지음 / 들녘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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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기 한달 여 전에 턱관절 장애로 병원을 찾았고, 그걸 시작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유 모를 여러 통증들 때문에 턱관절 병원을 간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이유라는 여러 통증들을 안고 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턱에 엄청난 통증이 와서 병원에 찾았고 치료를 시작하게 됐다. 이 책의 저자가 하는 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을 찾았고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 구강내외 적인 치료를 받게 되었지만 내가 직접 경험했기에 이 책에 실린 말들에 신뢰를 줄 수 밖에 없기도 하다. 턱관절이 너무 아파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 간 병원에서 내가 알게 된 사실들은 놀라운 것들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화불량, 약간의 공황장애, 점점 침침해지는 눈들이 사실은 이 턱관절 탓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병원을 처음 찾았을 때 자가체크를 위해 받은 페이퍼 안에는 이런 관련 통증들에 대한 물음이 가득했고 처음엔 의아했었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치료 받기 시작한 지 1달 여, 아직 나는 더 많은 진료 과정을 남겨두고 있지만 미세하게 좋아지는 걸 조금씩 느끼고 있다. 사람 많은 지하철을 힘들어 하던 내가 40분 정도는 무리 없이 지하철을 타고, 자세도 조금씩 바라지고 있다. 그러니 더 신뢰가 갈 수 밖에.

저자가 주장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턱이 우리 몸 전체의 건강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 어찌보면 사이비같기도 한 이 말은 내 경험상 100%의 사실이다. 턱 주변으로 지나가는 신경들이 몸 전반적인 것과 뇌에까지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틀어지는 순간, 몸의 여기저기가 이유없이 아프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아주게 되면 그간 이유없이 아프던 것들이 사라진다. 책의 마지막에 보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운동법들이 소개가 되어 있는데, 그것도 치료를 시작하며 이미 배운 것들이었다. 아주 작은 동작들이지만 꽤 효과가 크기에 한 번씩 해 보기를 권한다.

사람들이 잘 몰랐던 턱관절장애의 위험과 중요성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이 책은 실용서로서의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유 없이 이곳저곳에 통증을 호소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면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곳곳에 본인 병원의 홍보를 하는 듯한 인상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병원이 있는 줄도 모른 사람이었다면 그 정보 역시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스스로 찾아보는 노력 없이 단지 책 정보, 사람들의 사례만 가지고 판단하는 건 위험하다는 점이다. 이 책에 나와있는 정보는 내 경험상 신뢰할만 하지만, 자신의 몸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고 스스로를 돌아봄 없이 단순한 정보를 맹신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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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갈까요
김서령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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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며칠 전부터 이 책의 리뷰를 써 보려고 인터넷 창을 계속 띄워둔 상태였다. 어느 책이야 리뷰 쓰는 것이 쉽겠냐만은, 이건 좀 곤란했다. 이별의 아픔이 쉽게 와 닿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쿨하다'는 말의 사용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이 떠올랐다. 이거구나. 이별의 아픔, 알 것도 같다. 누군가를 깊이 좋아해 본 기억도 없고, 만나는 이성에게 모든 걸 바쳐본 기억도 없고, 그렇기에 이별 역시 늘 미적지근했고 그런 내게 누군가는 쿨하다고 했으나 나는 그건 쿨한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왜 마음이 아프지 않겠나. 깊이 빠져들지 않았다고 해도 그와 내가 보낸 시간이 있고, 장소가 있고, 우리가 나눈 대화가 있는데, 그것들을 함께 한 상대를 현재로부터 분리해 낸다는 것이 어떻게 쉽겠나. 그저 난 아무렇지 않은 척 했을 뿐이다. 마음이 아프다는 걸 표현하는 것이 내 자존감을 떨어트리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저 괜찮은 척, 이쯤이야 누구나 겪는 흔한 청춘의 한 퍼즐조각인 척 그냥 그랬던 것이다. 누군가와 헤어진 후, 누구보다 오랫동안 혼자서 미안해하고 혼자서 속상해하고 그에 대한 배려로 한동안 마음의 문을 닫아놓는 주제에.

이런 것을 떠올렸다면, 이 책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한 셈이다. 이 책은 소수의 이별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은 우리 모두의 이별 이야기이다. 이별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흔한 것이라 누구나 경험을 하지만 모두의 대처법은 다르다. 하지만 그 다양한 대처법 속에는 상실의 아픔과 슬픔이 공통적으로 존재하기에 어쩌면, 그 다양함은 결국 하나를 바라보고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상실의 회복.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이 소설집 속 9개의 단편을 이끄는 주인공들도 다들 그런 시간을 보냈거나, 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이별 이야기의 정점은 이 책의 첫번째 단편 <이별의 과정>이 찍는다. 제목부터 노골적으로 '이별'을 이야기하는 이 단편에서 서른 다섯의 '나'는 나의 지난 이별을 회상하며 아빠의 이별을 언급한다. 아빠의 이별 상대는 한 때 내 피아노 선생님이었지만, '나'도 그녀와 이별했고 어느새 그녀를 잊고 살았음을 떠올리며 결국 우리는 연애의 끝으로서의 이별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의 이별을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다른 단편들도 마찬가지다. 연애, 혹은 결혼의 끝을 경험하거나 혹은 떠올리며 우리가 잊고 살았던 '기억'과의 이별을 포괄한다. 그렇기에 이 책이 말하는 이별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며 수없이 반복하는 망각이라는 것에 대한 보편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지속되는 현상이고, 그 지속되는 현상이 우리에게 때로는 권태감을, 때로는 상실감을 제공하는 것일테다.

그러니 절대 쿨할 수 없는 것이고, 쿨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이별이라는 것 앞에서 말이다. 그 앞에서 쿨해지는 것은 지금의 권태감이나 상실감마저 부인하는 것이고, 그것은 내 감정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어쩌면 지금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부정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얘기하건데, 나는 쿨하지 않고 쿨할 생각도 없다. 그러니 쿨해지려고 노력하지 말자. 마음껏 아프고 속상해 하자. 물론 이 마지막 말은 쿨할 생각도 없으면서 쿨하게 보여지는 내게 하는 쓴 충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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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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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앵무새」,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의 저자로도 유명한 줄리언 반스의 신작이 드디어 나왔다. 게다가 부커상이다. 줄리언 반스가 몇 번이나 부커상의 문 앞에서 좌절했는지를 알고 있다면, 수상 타이틀이 읽을 책을 고르는데 크게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독자라고 하더라도 이 책의 수상 소식에 반가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더 굉장한 소설을 발표했기에 드디어 수상한 것인지도 궁금해 지는 것이 당연하다. 「The Sense of an Ending」이라는 원제를 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불길한 예감은 '이 책을 펴는 순간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겠구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치기 어린 시절이 있고, 그 시절은 돌아보면 부끄러운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 시절을 돌아보는 60대의 토니조차 그런 마음에 사로잡힌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불확실한 나이를 보낸 토니의 기억 속에는 세 친구가 있다. 그 중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친구는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영리하던 에이드리언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는 역사 선생의 질문에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답하던 토니와는 달리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라그랑주의 말을 인용하여 답하곤 했다. 토니는 그 친구에 대한 기억들을 끄집어내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세월이 주는 경험치라는 것은 존중해야 하기에 60대의 토니가 말하는 그런 회상들은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잔잔하면서도 아름다워 보인다. 그의 그런 회상은 필립 로스의 「울분」에서 볼 수 있었던 격동의 시대에서 흔들리던 청춘들의 모습과도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그가 회상하는 과거들이 정말 일어난 것일까,라는 질문에 맞닥뜨리는 순간 엄청난 혼동은 오기 시작한다. 에이드리언이 죽은지 40년 정도가 지난 뒤 찾아온 한 통의 유언장, 그리고 그 유언장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왜곡된 정보를 하나 둘 바로 잡아 놓는 순간, 우리는 <올드보이>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소설이 너무 짧다,는 언론의 말에 줄리언 반스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처음부터 읽을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을 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전체 분량은 실제 분량의 2-3배 정도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출판사의 홍보 전략 같아 보이는 이 멘트의 진위여부는 실제로 이 책을 읽은 후에야 확인 할 수 있다. 나 역시 맨 마지막 장을 두 세번 읽은 후에 다시 책을 맨 앞으로 펼쳤고, 앞의 몇 장을 다시 읽은 후 다시 맨 마지막 장을 읽었고 그리고 다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매력이 이 책에는 충분했다. 책 속에 숨겨진 수 많은 복선들, 예를 들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토니의 답에 덧붙인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역사 선생의 말을 다시 발견해가며 읽게 되면 이 소설이 가진 의미는 더욱 풍부해 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이기에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오류들,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것들을 우리는 결국 인정하고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소설은 우리에게 되풀이하며 이야기한다. 베로니카가 토니에게 수 많은 질책을 퍼 부어도 독자의 입장에선 토니를 동정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던 시기, 그런만큼 어떤 확신도 없이 갖고 버리고 탐하고 잊어버릴 수 있던 날들, 그런 날들을 우리도 모두 지나왔지 않은가. 그리고 아무도 그 날들에 대한 완벽하게 정확한 기억을 갖고있지는 않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느낌은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그런 운명을 받아들여야 함을 인지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기에 다시 한 번, 그리고 몇 번이고 이 책을 다시 읽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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