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플로베르의 앵무새」,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의 저자로도 유명한 줄리언 반스의 신작이 드디어 나왔다. 게다가 부커상이다. 줄리언 반스가 몇 번이나 부커상의 문 앞에서 좌절했는지를 알고 있다면, 수상 타이틀이 읽을 책을 고르는데 크게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독자라고 하더라도 이 책의 수상 소식에 반가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더 굉장한 소설을 발표했기에 드디어 수상한 것인지도 궁금해 지는 것이 당연하다. 「The Sense of an Ending」이라는 원제를 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불길한 예감은 '이 책을 펴는 순간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겠구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치기 어린 시절이 있고, 그 시절은 돌아보면 부끄러운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 시절을 돌아보는 60대의 토니조차 그런 마음에 사로잡힌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불확실한 나이를 보낸 토니의 기억 속에는 세 친구가 있다. 그 중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친구는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영리하던 에이드리언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는 역사 선생의 질문에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답하던 토니와는 달리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라그랑주의 말을 인용하여 답하곤 했다. 토니는 그 친구에 대한 기억들을 끄집어내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세월이 주는 경험치라는 것은 존중해야 하기에 60대의 토니가 말하는 그런 회상들은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잔잔하면서도 아름다워 보인다. 그의 그런 회상은 필립 로스의 「울분」에서 볼 수 있었던 격동의 시대에서 흔들리던 청춘들의 모습과도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그가 회상하는 과거들이 정말 일어난 것일까,라는 질문에 맞닥뜨리는 순간 엄청난 혼동은 오기 시작한다. 에이드리언이 죽은지 40년 정도가 지난 뒤 찾아온 한 통의 유언장, 그리고 그 유언장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왜곡된 정보를 하나 둘 바로 잡아 놓는 순간, 우리는 <올드보이>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소설이 너무 짧다,는 언론의 말에 줄리언 반스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처음부터 읽을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을 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전체 분량은 실제 분량의 2-3배 정도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출판사의 홍보 전략 같아 보이는 이 멘트의 진위여부는 실제로 이 책을 읽은 후에야 확인 할 수 있다. 나 역시 맨 마지막 장을 두 세번 읽은 후에 다시 책을 맨 앞으로 펼쳤고, 앞의 몇 장을 다시 읽은 후 다시 맨 마지막 장을 읽었고 그리고 다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매력이 이 책에는 충분했다. 책 속에 숨겨진 수 많은 복선들, 예를 들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토니의 답에 덧붙인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역사 선생의 말을 다시 발견해가며 읽게 되면 이 소설이 가진 의미는 더욱 풍부해 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이기에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오류들,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것들을 우리는 결국 인정하고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소설은 우리에게 되풀이하며 이야기한다. 베로니카가 토니에게 수 많은 질책을 퍼 부어도 독자의 입장에선 토니를 동정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던 시기, 그런만큼 어떤 확신도 없이 갖고 버리고 탐하고 잊어버릴 수 있던 날들, 그런 날들을 우리도 모두 지나왔지 않은가. 그리고 아무도 그 날들에 대한 완벽하게 정확한 기억을 갖고있지는 않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느낌은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그런 운명을 받아들여야 함을 인지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기에 다시 한 번, 그리고 몇 번이고 이 책을 다시 읽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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