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욕망의 리스트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김도연 옮김 / 레드박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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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소설 중 가장 사랑스럽다. 뒷표지에 나올 법한 한 마디 찬사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쏟아졌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이지 않은, 그러면서도 누구나 상상해봤음직하기에 더 현실적일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을 여성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읽다보면 누구나 이 이야기가 가진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내 마음이 울렁거렸다.

불운과 행운은 한 끗 차이라, 한 글자를 지우고 다른 글자를 쓰면 정 반대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고 조슬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매우 작은 확률의 사건들이 하필이면 그녀에게만 일어나는 듯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태어난 것도 지금껏 죽지 않고 살아난 것도, 오늘 우리가 만난 것도, 내일 우리가 이별하는 것도 다 매우 작은 확률의 사건들일 수 있다. 단지 그녀에게는 조금 특별한 일이 벌어진 것 뿐이다.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는 것이라고 한다. 예측 불가능이 수식어처럼, 정의처럼 따라 붙기 때문에. 그 앞에서 때로는 주춤 거리고 때로는 도망 가려고 하지만 우리가 그럴 수록 인생은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 붙는다. 그러니 두렵다고 피하지 말고, 걱정 된다고 외면하지 말고 당당히 맡서라도 수많은 책과 드라마와 강연 등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잘 안 되는 게 인생이기도 하다.

꿈, 동경, 희망 그 모든 것을 현실과 타협한 나, 그리고 당신, 우리, 또 조슬린이 그 인생에 산다.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은 수예점 주인으로 바뀌었고, 멋진 남자와의 사랑은 현실적인 남편으로 바뀌었고, 여자는 사람이 되었다. 그 모든 것들이 바뀌어 가는 동안에도 욕망이란 깊숙한 곳에 잘 숨어서 변하지 않고 살아 남았다. 그 욕망을 나는 이 곳에, 당신들은 어딘가에, 그리고 조슬린은 자신의 블로그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욕망은 위안 받는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나마 봐 줄만한 삶이기에, 작은 확률 속에서 생존하고는 있다고 하지만 언뜻 보면 평범하게 살고 있기에 그 욕망도 위안 받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불행을 끌어 안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얼마만큼인지 모르는 우리는 때론 고개를 드는 불행에 내가 이 세상의 온갖 불행을 다 끌어안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 절망한다. 그 불행의 원인은 결코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어떻게 보면 조슬린의 불행의 원인은 그녀의 유약함에 있었다. 인생을 마주하지 않은 점, 주춤거리고 도망가려고만 한 점, 그것들이 그녀의 불행을 키워버렸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후회하고 돌아보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것을. 그녀는 이미 늦어버린 일들을 다시 돌이키려 하는 대신, 새로운 시작을 꿈꿔보기로 결심한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그녀의 무기력, 무의지, 그 속에 남은 욕망 등이 그녀만의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이야기 속에서 나를, 우리를 만나는 순간은 아찔할 수 밖에 없다. 슬픔이라기 보다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지는 기분, 딱 그런 기분이 책을 읽는 내내 찾아온다. 그래서 이 책을 사랑스럽다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싫다고, 때론 지긋하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살고 있는 건 그런 인생들마저 사랑하는 감정이 욕망처럼 깊이 숨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랑하는 인생을 만나는 순간이 사랑스러울 수 밖에 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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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이븐 - 에드가 앨런 포 단편집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40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심은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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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한 선입견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역할이 작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 된다. 초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검은 고양이'를 접한 이후 나 역시도 고양이에 대한 극한 공포가 생겼고, 그 공포가 성인이 된 이후까지 이어져 왔다. 고양이를 무서워했을 때의 나는, 내가 가는 길목에 고양이만 있어도 지나치지 못했다. 어린 시절 머리 속을 강력하게 파고 들어 온 하나의 영상은 그것들을 피하게 하기 충분했다. 고양이 두마리와 함께 복작복작 살고 있는 지금 생각하면 웃을 일이긴 하다. 그러나 나의 경험에서도 드러나듯, 어린 시절에 강하게 들어 온 하나의 영상은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기에 충분하고, 텍스트만으로 그런 영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고전이 가진 힘이기도 하다.

에드거 앨런 포를 내세운 영화가 개봉되는 탓인지 영화와 같은 <더 레이븐>이란 제목으로 그의 단편들이 출간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그동안 '갈까마귀'라는 제목으로 소개 되었고, (책에는 '갈가마귀'로 표기되어 있길래 순간 헷깔렸다. 맞춤법상 '갈까마귀'가 맞다.) 이 책 속에서도 소제목은 '갈까마귀'로 되어 있지만 제목만 이렇게 정해진 듯 하다.

초등학교 때의 충격을 기억에 간직한 채 몇 번이고 '검은 고양이'를 다시 읽어보고 싶었지만 마땅한 기회가 없었던 지라, 영화를 보기 전에 다시 한 번 그의 단편들을 읽어보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 읽는 그의 단편들은 여전히 무서울지, 아니면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일지, 궁금했다.여전히 '검은 고양이'는 무서웠고, 내 기억 속에 다른 충격으로 자리 잡았던 '절름발이 개구리'도 무서웠지만 그것은 감정의 일관성이라기보단 그 때와 다른 방식의 공포였다. 시간이 흐르며, 사회를 경험하며, 내가 알게 된 악에 대한 모습들이 그 단편들과 오버랩 되었다. 세상에는 이유가 없는 악이라는 것이 있다. 즉 분출하는 악에 개연성이나 정당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악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존재한다고 해도 그 이면에는 죄책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악이 강하면 강할 수록 이 죄책감이라는 것은 자기합리화에 의해 뭉개지고 말지만 어떤 각성에 의해 죄책감이 고개를 들면 그건 자기가 표출한 악보다 더 큰 공포로 돌아온다. 그것이 바로 '검은 고양이'였고 그렇기에 이 단편은 무서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극한 공포는 '절름발이 개구리'에서 보여지는데, 권력을 가진 자의 지배욕이 피지배자에게 얼마나 큰 적대감과 더불어 복수심을 유발시키는지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단편이 무서운 것은 권력계층의 오만한 지배욕이 비단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보여지고 있기에 피지배계층 사이에서 쌓이고 있을 그 적대감에 오싹해 지는 것이고 그것이 조만간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한 바탕 발현되지 않겠느냐라는 걱정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이 두 단편이 포함 된 '공포'와 '추리', '환상' 이렇게 세 섹션으로 이뤄져 있다. '추리'와 '환상'은 앞선 '공포'만큼 다가오지 않는데 고전으로 분류되는 '추리'라는 것은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치밀해지고 거대해졌기 때문에 이것이 파격적으로 보이진 않고 '환상' 역시 시대에 포함 된 요소들이 많아지고 과거의 요소들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은 환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까닭도 있다. 쌓이고 쌓인 사회의 부산물들에 의해 과거의 이유있는 걸작들이 시들해지는 느낌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정해야 할 것들이다.

그럼에도 고전을 읽는 시간은 늘 축복이다. 과거의 예술들이 아주 많은 시간을 건너 내게 오고있다는 느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이 책으로 다시 한 번 그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영화로 만날 존 쿠삭의 에드거 엘런 포를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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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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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소설은 늘 단 한 줄로 기억된다. 그건, 책을 읽은 후의 감상이 아니라 책 속의 한 문장이 대부분이다. 이 책의 단 한 줄은 '고독은 고통보다 더 치명적인 것일까' (p.18) 라는 물음이었다. 이 물음에 대한 답들이 이 소설을 전개시키고 독자를 이해시킨다. 그렇기에 소설의 도입에서 이 질문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삐걱거림에 온전히 몰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살아가는 아픔을 핑계로 마지막에 도망쳤던 '류'와 온통 모순으로 뒤덮혀 그가 쓴 소설 따윈 읽고 싶지도 않게 만드는 퇴락 소설가 '요셉'의 이야기는 치명적인 고독이라는 키워드 없이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키워드가 그런 고독이 선사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해하게 한다. 즉, 이 소설은 매혹적인 주인공에 끌려 그들의 처지를 이해한다기 보다 매혹적인 키워드에 끌려 인물을 이해하게끔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치명적인 고독에 끌릴 준비가 독자에게도 필요한 셈이다.

세계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상실은 고통의 형태로 찾아와서 고독의 방식으로 자리잡는 것이었다. (p.72) 이것은 요셉의 이야기다. 류가 떠난 이후, 그에겐 상실만이 남았다. 이유도 알 수 없는 꽤나 무례한 이별, 그 앞에서 요셉은 무너진다. 그는 그 상실감이 제공한 고독을 대처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포장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포장하는 가식이라는 것은 수없이 쏟아지는 모순 된 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많은 여자들을 탐하며 그녀들을 단지 소모품 취급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의 그 모든 행동이 그의 고독을 대변하고 그의 고독을 합리화 시킨다. 물론 나는 결국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계는 고통을 실어나른다. 고통은 관계의 고독이고 고독은 개인 됨의 고통이었다. (p.77) 류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 사실을 알아야 했다. 사랑이 주는 열망에 쉽게 흔들렸던 부모는 관계 속에서 고통 받았고 고독해 졌다. 그 고독을 해소하는 방법이 달랐던 부모를 보며 류는 양쪽 모두를 이해하게 됐지만, 그 방법은 그녀 안에서 혼동만을 제공했다. 이해를 한다고 해서 온전해 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면, 나의 이런 몰이해 역시 하나의 고독일 수도 있다. 개인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고독, 하지만 그 고독이란 키워드가 나를 움직였으니 결국 모두는 보편적인 감정 안에서도 이타적인 반응을 보이는 존재이고 그것이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이 조금이나마 이 소설을 이해하게 만들어 준다. 몰이해에서 이해로 전환하는 그 과정에서 뭔가 은희경 작가 답다는 그런 시덥잖은 결론이 내려진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은희경 작가 다운 게 뭔데?' 라고 묻는다면 난 또 할 말을 잃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요셉처럼 모순 된 말로 내 지적 허영심을 자랑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가 이해할 수 없다던 나와 요셉은 비슷한 사람이 되는 순간을 갖게 되는 것이고 거기서 다시 한 번 이 소설을 이해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삶은 복잡하다. 그들의 삶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말로 말 꼬리를 흐리는 수 밖에 이 소설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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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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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것은 왠지 위험한 기분이다. 그 사람의 생활을 알게 된다면, 그의 작품에서 그가 보인다. 그럼 그 때부터 그의 작품은 소설로서의 가치를 그만큼 잃게 된다. 소설은 허구일 때 그 매력이 두드러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라고 하면 말이 달라진다. <단순한 열정>이라는 대표작으로 알 수 있듯 그녀는 자신의 실화를 글로 표현하고, 그것으로 에세이와 소설 사이를 교묘하게 드나든다. 이것은 자신의 이야기임을 아예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이 엿볼 틈을 주지 않고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적절히 꾸며진 이야기를 듣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금기시 되는 욕망이기도 해 은밀하고 때로 그것은 보편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기도 해서 아련하다. 그리고 <남자의 자리>는 후자에 속하는 이야기이다.

내가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아빠와 처음 술을 마셨을 때였을 것이다. 그 전까지 우린 가장 가까우면서도 서로를 이해 못하는 가장 먼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를 실망시킬까 두려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외면하다가 뒤늦게 조심스레 그것을 이야기했고, 그 때는 그의 실망한 표정을 외면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실망시킬까 두려워했을 뿐,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조심스레 꺼냈던 내 미래에 대한 허무맹랑한 바람들을 아빠는 인정했고 지지해 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처럼 지지해 줄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내가 실망할까 내게 애써 감추려 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실망을 두려워하다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처음 술을 마시며 우린 그런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에 솔직해졌고, 진정한 이해를 해 보려 노력하게 되었다. 지금 아빠와 나는 아주 괜찮은 관계로 지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딸들은 그렇지 못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빈자리를 느끼고 슬픔은 뒤늦게 찾아온다. 그건 단지 이 시대, 이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녀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이해할 수 있지만, 서로에 대한 두려움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며 그 시간들을 회상한다. 아버지는 주변의 눈을 의식하며 딸을 마음껏 자랑하지 못했고 마음껏 사랑해 주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그의 지갑에는 그녀의 자랑스러운 모습이 담겨있었고 이젠 빛이 좀 바랜 추억도 들어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아버지를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되어버렸다.

아니에르노의 글들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건, 모든 사건들을 말하는 그녀의 덤덤한 말투 탓일 수도 있다. 덤덤하게 말을 잇다가 순간 멈칫해 버리면, 모든 것이 일시정지 된 것처럼 멈춰 서며 그 시간과 공간이 선명하게 두드러진다. 그런 경험들을 적시적소에 배치하는 그녀의 능력은 역시나 탁월하다. <단순한 열정>과 <집착>에서 느꼈던 은밀하고 농염한 감정들이 이번엔 저릿하고 따뜻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작가라고 느꼈던 그녀가, 냉정을 빼고 열정으로만 자리잡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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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처럼 나는 혼자였다 - 화가 이경미 성장 에세이
이경미 글.그림 / 샘터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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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사람을 휘어잡는 책들이 있다. 나는 그런 책들이 마음에 든다. 비록 책을 폈을 때, 그 내용이 제목이 줬던 느낌을 따라잡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구매자의 마음을 끌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상품이 가진 최고의 매력이다. 자료 혹은 관심사에 의해 책을 구매했다면, 내용이 충족되지 않는 것에 분노하겠지만, 잠시 마음을 쉬려 읽을 책을 구매했다면 제목 자체에 끌렸다면 이미 그 자체에서 공감하고 치유받은 것이다.

고양이를 키워본, 혹은 키우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확신은 공감으로 이어진다. 창문 틀에 도도하게 꼬리를 틀고 앉아 창문 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를 침대 맡에서 오도카니 바라보고 있자면 우리는, 결국, 혼자, 라는 생각이 낯설게 다가온다. 별 거 아닌,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 왠지 처음 안 사실처럼 다가올 때의 순간과 공간과 그걸 함께하는 고양이가 애틋해진다. 제목에서 이미 그것을 공감해 버린다.

작가에게 있어 그림이란 주변인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했다. 사람에 국한하지 말자. 작가는 그림으로 주변인과 고양이의 마음을 얻는다. 그녀의 그림 속에 항상 들어가 있는 고양이들, 그들은 그녀의 그림을 통해 영생을 얻고 인간과의 진정한 소통을 시작한다. 자신을 애정한 주인과의 소통을 넘어 세상의 모두와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림을 넘어 자신의 이야기로서 소통을 시작한다. 그래서 제목과는 달리 고양이 이야기가 많지 않아도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 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그림을 떠올리면, 그것이 바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고양이에 대한 추억과 마주하는 일이 된다. 이런 소소한 감성들이 글로 풀어져 가고 있는 책의 지면 한 장, 한 장이 참으로 고양이스럽다. 즉, 온전하다는 이야기다.

사소함 속에 우주가 있다, 라는 작가의 말이 책 한 권을 다 넘기도록 페이지를 옮겨다니며 따라온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풀어놓으며, 그 사소한 일상 속에 자신의 예술관과 자신의 인생관과 더불어 자신의 소통방식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결국 개인의 우주가 된다. 그리고 그 우주 안에 떠돌아 다니는 고양이, 그것을 떠올렸기에 우주복을 입고 있는 고양이가 있는 그녀의 그림이 나의 페이보릿이 되고야 만다.

그녀의 우주를 구경하는 사이, 파란 눈의 하얀 고양이가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초록 눈의 우아한 러플을 가진 고양이는 내 무릎에 누워 만족의 소리로 나를 유혹한다. 문득, 나는 고양이처럼 혼자이고 고양이와 함께라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나의 작은 우주가 되고, 우리의 큰 우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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