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들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것은 왠지 위험한 기분이다. 그 사람의 생활을 알게 된다면, 그의 작품에서 그가 보인다. 그럼 그 때부터 그의 작품은 소설로서의 가치를 그만큼 잃게 된다. 소설은 허구일 때 그 매력이 두드러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라고 하면 말이 달라진다. <단순한 열정>이라는 대표작으로 알 수 있듯 그녀는 자신의 실화를 글로 표현하고, 그것으로 에세이와 소설 사이를 교묘하게 드나든다. 이것은 자신의 이야기임을 아예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이 엿볼 틈을 주지 않고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적절히 꾸며진 이야기를 듣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금기시 되는 욕망이기도 해 은밀하고 때로 그것은 보편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기도 해서 아련하다. 그리고 <남자의 자리>는 후자에 속하는 이야기이다.

내가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아빠와 처음 술을 마셨을 때였을 것이다. 그 전까지 우린 가장 가까우면서도 서로를 이해 못하는 가장 먼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를 실망시킬까 두려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외면하다가 뒤늦게 조심스레 그것을 이야기했고, 그 때는 그의 실망한 표정을 외면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실망시킬까 두려워했을 뿐,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조심스레 꺼냈던 내 미래에 대한 허무맹랑한 바람들을 아빠는 인정했고 지지해 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처럼 지지해 줄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내가 실망할까 내게 애써 감추려 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실망을 두려워하다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처음 술을 마시며 우린 그런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에 솔직해졌고, 진정한 이해를 해 보려 노력하게 되었다. 지금 아빠와 나는 아주 괜찮은 관계로 지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딸들은 그렇지 못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빈자리를 느끼고 슬픔은 뒤늦게 찾아온다. 그건 단지 이 시대, 이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녀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이해할 수 있지만, 서로에 대한 두려움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며 그 시간들을 회상한다. 아버지는 주변의 눈을 의식하며 딸을 마음껏 자랑하지 못했고 마음껏 사랑해 주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그의 지갑에는 그녀의 자랑스러운 모습이 담겨있었고 이젠 빛이 좀 바랜 추억도 들어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아버지를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되어버렸다.

아니에르노의 글들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건, 모든 사건들을 말하는 그녀의 덤덤한 말투 탓일 수도 있다. 덤덤하게 말을 잇다가 순간 멈칫해 버리면, 모든 것이 일시정지 된 것처럼 멈춰 서며 그 시간과 공간이 선명하게 두드러진다. 그런 경험들을 적시적소에 배치하는 그녀의 능력은 역시나 탁월하다. <단순한 열정>과 <집착>에서 느꼈던 은밀하고 농염한 감정들이 이번엔 저릿하고 따뜻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작가라고 느꼈던 그녀가, 냉정을 빼고 열정으로만 자리잡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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