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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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소설은 늘 단 한 줄로 기억된다. 그건, 책을 읽은 후의 감상이 아니라 책 속의 한 문장이 대부분이다. 이 책의 단 한 줄은 '고독은 고통보다 더 치명적인 것일까' (p.18) 라는 물음이었다. 이 물음에 대한 답들이 이 소설을 전개시키고 독자를 이해시킨다. 그렇기에 소설의 도입에서 이 질문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삐걱거림에 온전히 몰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살아가는 아픔을 핑계로 마지막에 도망쳤던 '류'와 온통 모순으로 뒤덮혀 그가 쓴 소설 따윈 읽고 싶지도 않게 만드는 퇴락 소설가 '요셉'의 이야기는 치명적인 고독이라는 키워드 없이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키워드가 그런 고독이 선사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해하게 한다. 즉, 이 소설은 매혹적인 주인공에 끌려 그들의 처지를 이해한다기 보다 매혹적인 키워드에 끌려 인물을 이해하게끔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치명적인 고독에 끌릴 준비가 독자에게도 필요한 셈이다.

세계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상실은 고통의 형태로 찾아와서 고독의 방식으로 자리잡는 것이었다. (p.72) 이것은 요셉의 이야기다. 류가 떠난 이후, 그에겐 상실만이 남았다. 이유도 알 수 없는 꽤나 무례한 이별, 그 앞에서 요셉은 무너진다. 그는 그 상실감이 제공한 고독을 대처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포장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포장하는 가식이라는 것은 수없이 쏟아지는 모순 된 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많은 여자들을 탐하며 그녀들을 단지 소모품 취급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의 그 모든 행동이 그의 고독을 대변하고 그의 고독을 합리화 시킨다. 물론 나는 결국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계는 고통을 실어나른다. 고통은 관계의 고독이고 고독은 개인 됨의 고통이었다. (p.77) 류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 사실을 알아야 했다. 사랑이 주는 열망에 쉽게 흔들렸던 부모는 관계 속에서 고통 받았고 고독해 졌다. 그 고독을 해소하는 방법이 달랐던 부모를 보며 류는 양쪽 모두를 이해하게 됐지만, 그 방법은 그녀 안에서 혼동만을 제공했다. 이해를 한다고 해서 온전해 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면, 나의 이런 몰이해 역시 하나의 고독일 수도 있다. 개인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고독, 하지만 그 고독이란 키워드가 나를 움직였으니 결국 모두는 보편적인 감정 안에서도 이타적인 반응을 보이는 존재이고 그것이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이 조금이나마 이 소설을 이해하게 만들어 준다. 몰이해에서 이해로 전환하는 그 과정에서 뭔가 은희경 작가 답다는 그런 시덥잖은 결론이 내려진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은희경 작가 다운 게 뭔데?' 라고 묻는다면 난 또 할 말을 잃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요셉처럼 모순 된 말로 내 지적 허영심을 자랑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가 이해할 수 없다던 나와 요셉은 비슷한 사람이 되는 순간을 갖게 되는 것이고 거기서 다시 한 번 이 소설을 이해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삶은 복잡하다. 그들의 삶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말로 말 꼬리를 흐리는 수 밖에 이 소설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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