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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맷하시겠습니까? - 꿈꿀 수 없는 사회에 대한 여덟 가지 이야기
김미월.김사과.김애란.손아람.손홍규.염승숙.조해진.최진영 지음, 민족문학연구소 기획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평점 :
어떤 작품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왜 평단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는지, 작품의 본래 의미와는 무관하게 특정한 문학적 경향에 의해 그 의미가 왜곡되거나 혹은 특정한 선입견에 의해 텍스트의 풍성함이 재단되는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의문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더욱 크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였습니다.
현재 젊은 작가들의 작품 세계는 그 의미가 다소 축소되어 조망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비평들이 젊은 작가들의 '새로움'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그 새로움을 추동한 이들 세대들의 현실 감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이들 작가들은 사회나 현실과 같은 무거운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오직 지적인 언어유희와 자폐적인 내면 고백에 함몰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 기획의 말 p. 5-6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한국문학에 뒤늦게 빠져버렸고, 제대로 국문학을 배워보고 싶었다. 대학원 준비를 했고, 연구계획서를 썼고, 면접을 봤다. 그 때 내 연구계획서에는 21세기에 작품 활동을 하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분석과 논의가 필요하며, 그것은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며 그들의 전반적인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젊은 학자들의 몫일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까였다. 아니 까였다기 보다 어리석게도 우물 속에서 보이는 좁은 하늘만 봤던 내 탓이다. 교수진은 내가 쓴 연구계획서와는 상관없는 자신들의 연구 분야에 대해 물었고 나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 당시 20대 중반이던 나는 치기에 어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중요했고, 내 이전 세대가 쌓아온 것들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조금은 억울했다. 그들이 보수적인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이제 주류가 되어야 할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축소하려고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 날 이후 대학원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길은 최선의 독자로 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의 기획의 말을 읽으며 그 날이 생각났다. 젊다는 이유로 선입견에 둘러 쌓인 것은 작가와 작품 뿐만이 아니라 독자도 마찬가지였다. 급속한 경제 발전은 사람을 둘러싼 많은 것들을 순식간에 변하게 했고, 그 흐름을 따라 사람도, 문학도 바뀌었다. 2000년대 이 전의 문학만 해도 시대의 우울을 반영한 사회에 대한 투쟁이나 저항, 혹은 시대의 동요 속에서 이뤄지는 자아 성찰이 문학이 다루는 주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우리 문학은 대부분 우울했고 어두웠다. 그리고 지금 젊은 사람들은 그 문학을 교과서 등의 참고도서에서 접해야 했다. 한 권의 소설책이 손에 들리는 여유도 없이 문단의 의미를 파악하고 중심생각을 찾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문학의 즐거움을 누리기란 어려웠다. 우울하고 어두운 텍스트 속에서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청춘들에게 그 의미를 찾으라고 종용하는 건 억지스러웠다. 그러니 자연스레 우리 세대에게 한국문학이란 지루한 것이 되어버렸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의 문학은 바뀌었다. 우울하던 시대는 사육제의 기간처럼 풍요로 넘쳐나게 되었고, 전통과 새 문물 속에서 혼란스럽던 세대는 지구시민으로써 모든 걸 자연스레 수용하는 세대가 되었다. 그리고 허구임에도 인간의 삶을 끝없이 반영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문학 역시 자연스레 그 시대와 세대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넘쳐나는 활기처럼 문학 역시 다양한 상상력을 보여주며 그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보수적인 지식층의 절대적인 평가를 받기는 더더욱 어려워졌다. 어떤 사람들은 문학이 더 이상 문학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고, 문학의 시대가 갔다고 하지만 그들의 말 속에 문학은 사전적인 문학이 아니라 그들이 아는 문학임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건 조금 창피한 일이 되어 버리니까.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포맷이란 그런 사고를 위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사고는 포맷당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형태, 새로운 주제도 수용할 수 있는 사고로 리셋 된다. 그리고 읽어본다. 지금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글을. 그들은 담백하게 동시대에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의 고민과 아픔을 다루며 이 풍요로운 시대에도 나름의 아픔은 존재함을, 삶을 지속시키는데 언제나 맑은 날은 없었음을 말한다. 결국 그들의 글 속에 등장하는 시대와 환경만 바뀌었을 뿐 사람의 감정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그들은 말한다. 그렇기에 소설의 경중은 따질 수가 없다. 어떤 시대에 어떤 감성으로 쓰여진 작품이 더 훌륭하고, 덜 훌륭하고는 없다. 그저 독자들을 유혹할 수 있을 때, 그 유혹에 넘어간 독자가 위로받을 수 있고, 소설을 통해 현실 감각을 느낄 때 한 편의 소설은 실체를 띈다. 그렇다면 지금 더 실체성있는 소설은 무엇인가.
기획의 말부터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해 버렸다. 그래서인지 김미월, 김애란, 손홍규 등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들에 더 애정이 갔다. 누군가 당신들을, 당신들의 소설을 제대로 평각하지 않아도, 부디 계속 소설을 써라, 당신들. 여기엔 뜨겁게 당신들을 응원해 주는 동시대의 독자들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