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3
홍성욱 지음 / 책세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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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공하나 갖고 절절매는 나에게는 이런저런 학문들을 횡단하는 사람들에 대해 신기함을 넘어 경외감 비슷한게 느껴진다. 저자인 홍성욱씨 또한 그런 경우인데, 그 '횡단'이란게 인문학 분과내의 횡단 뿐 아닌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이에서의 횡단이란 측면에서 더욱 놀라웠고 신선했다.

책은 파놉티콘에 관한 논의로부터 시작한다. 파놉티콘은 '공리주의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벤담이 구상한 감옥인데, 이 감옥은 중앙의 감시공간에서 간수가 죄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포착할 수 있음에도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없는 형태라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지닌다. 간수는 언제든 눈을 돌려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의 행동을 보지 못하기에 언제나 자기감시를 통해 규율을 내면화하게 된다. 시선의 '비대칭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이러한 파놉티콘이 다시 논의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통해서였다. 푸코는 이러한 파놉티콘의 논리가 오늘날 사회전반의 통제와 규율에 쓰여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책은 이러한 논의와 다른 학자들의 반박을 소개하며 과연 그렇다면 현대 사회 권력의 '감시'와 '규율'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기계' 그 자체에 의해 작업장을 감시, 통제했던 포디즘의 시대를 지나 개개인에 대한 정보수집을 강화하여 '과학적'인 통제를 하는 정보파놉티콘 시대의 권력은 범위에 있어서 한계가 없다는 그 '정보수집'의 특이성으로 인해 규율사회를 지나 통제사회로 나아갔고, 이를 사례별로 자세히 고찰해주는 저자의 언급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심지어 피감시자가 감시자에게 직접 정보를 제공해주는 '수퍼파놉티콘'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저자의 언급과 실제 사례들을 보면서 정말이지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감시는 감시와 같은 방법으로 역감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해방의 공간을 제공한다. 생각만 바꾸면 권력의 감시와 같은 메커니즘으로 피감시자 전원이 권력을 감시하는 것 또한 가능하고, 실제 그러한 사례들도 종종 있었다. 언론이나 인터넷, 시민단체를 통한 참여와 권력에 대한 감시는 다른 한편으로 대중의 권력통제 기능을 그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강화시켜 결국 권력의 감시를 권력에 대한 감시로 전복시키고 있다. 아울러 감시 그 자체 또한 사회복지 시스템의 정립이나 작업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 또한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술의 궤적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 그 자체 뿐만 아니라 기술과 사회세력들의 다양한 개입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저자의 주장, 그러하기에 정보접근의 비대칭성을 도모하는 권력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그 권력을 감시하고자 하는 시민의 참여가 중요하다고 하는 주장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한가지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은 든다. 정보를 공유하고 접근하는 문제는 그렇다쳐도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자 하는 자유, 즉 프라이버시권은 어쩌겠냐는 것이다. 저자 말마따나 프라이버시권은 문제제기조차 힘든 권리이다. 일단 사람들은 단기간의 이익을 위해 너무도 쉽게 그러한 권리를 포기하며, 피해를 입기 이전에는 중요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아울러 개개인 또한 자신의 정보는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도 남의 정보를 일정정도 알고자 하는 욕구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의 사생활 관련 뉴스가 나올때마다 제기되는 공인의 정보공개와 프라이버시 침해의 기준문제 또한 이와 연동된다고 생각된다. 이 부분 또한 무시할 수 없을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고, 저자 또한 마지막 장에서 어느정도 지적은 하고 넘어갔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빠뜨린 것 같다. (물론 역시나 그 대안은 '사회적 합의'라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겠지만 말이다ㅋ)

아무튼 책은 오늘의 '정보 사회'에 자신의 정보가 어떻게 유출되고 있는지 고발하며, 그러한 정보유출은 어떠한 문제를 낳는가, 우리가 진정 정보를 통해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을 함께 얻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괜찮은 책이고, 수많은 흥미로운 사례들 덕택에 자칫 지루할수도 있는 주제를 지루하지 않게 잘 풀어내고 있는 듯 싶다.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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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사나이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7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흥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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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때였나 중딩때였나, (아님 고딩때였나?-_-;;;) 하여간 머나먼(?)옛날 일요일이면 EBS에서 '고전'이라 불릴만한 옛날 영화를 해주곤 했었는데, '야구 중계가 없다면'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와 함께 그런 영화들을 시청했던 터라 적지 않은 '고전 영화'를 관람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원채 오랜 시간(?)이 지난 터라 대부분의 영화는 제목조차 기억이 없지만 그 와중에 단 하나, 바로 '제3의 사나이'라는 영화의 '제목만큼은' 기억이 난다. 아니, 사실 제목 뿐만이 아니라 몇몇 장면들도 기억이 난다. 오스트리아의 대관람차, 웬지 모르게 어두우면서도 매력적이었던 배경, 오손 웰스(맞나?)의 정말이지 소름끼칠 정도의 갑작스런 등장 등등등. 내용이 확실히 기억나진 않아도 영화장르가 스릴러물이었다는 것은 아직도 기억이 나고, 굉장히 재미있게 봤었기에 언젠가 한번 다시보고 싶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문예출판사에서 얼마전 그 영화의 원전소설이 번역되어 나왔다길래 아쉬운 김에 구입해 읽게 되었다.

전후 미-영-프-러 4개국에 의해 분할통치되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빈(당시 빈은 독일로 치자면 베를린과 비슷한 유형의 분할통치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본 소설은 명목상 3류 서부극 소설가, 실질상 백수(?)인 '롤로 마틴스'가 절친한 친구인 '해리 라임'으로부터 초청을 받고(사실은 일거리를 부여받고) 빈에 입국해 갖가지 알수없는 일들을 겪게되고, 그러한 이상한 일들을-구체적으로는 해리의 죽음(?)으로 인해 촉발된-마틴스가 순전히 '우정'과 '정의감'에 불타서 투박하지만 날카롭게 파해쳐가는 것이 기본적인 스토리다. 따지고보면 본 소설은 일종의 추리물이고, 나름 극적인 반전(?)도 있는 터라 내용을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것은 독자가 '될'분들을 위한 예의가 아닌 것 같기에 내용에 대한 서술은 여기서 줄이고 감상으로 바로 넘어간다면.

우선 주인공 캐릭터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본서 뒤의 해제에 보면 마치 본 소설이 선과 악의 뚜렷한 대립을 기반으로 서술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점에 대해 다소 의문스럽다. 주인공인 롤로 마틴스는 저자 말마따나 어색한 세례명인 '롤로'와 완고한 네덜란드식 성(姓) 사이의 갈등(?)에서 보여지듯 '결정 불가능한'인물이다. 굉장히 단순하고 무조건적인 충성만을 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순진하고 정의로우며, 무뚝뚝하고 경우가 없으며, 무식한 것처럼 보이지만 따뜻하고 절도있으며 날카로운 면모도 종종 보인다. 이는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친구인 해리 또한 마찬가인데 한 여자를 포함하여, 적지 않은 친구들이 그를 죽고 못살 정도로 따르게 될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알고보면 잔혹하고 무책임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캐릭터들은 소설을 더욱 흥미있게 만들고 있으며, 사실상 본 소설의 재미의 근본적인 기반(?)이 되고 있는 듯 싶기까지 하다. 아울러 '해리'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태도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이 부분도 혹여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까 싶어 압축적으로 감상을 적자면) 해리의 일탈에 대한 슈미트의 반응과 마틴스의 반응은 비슷하지만 결국 상이한 선택을 한다. 따지고보면 양자의 태도 모두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어떤것이 옳은 행동이었을까? 사람이 하는 일이 늘상 그렇듯 둘의 태도 모두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그런 태도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마치 '영화화'되는 것을 예정한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롤로 마틴스가 자신의 필명(마틴 덱스터)으로 인해 겪게되는 해프닝(벤자민 덱스터라는 당대 훌륭한 소설가와 혼동되어 마틴스는 엉겁결에 문화협회 세미나에까지 참여하게 되며-당연하게도-그 세미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이나 극적인 반전 순간의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레 영화적 상황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암튼 본 소설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다'. 심심하신 분은 일독을 권함.^^

ps. 문예출판사의 '제3의 사나이'(라고 언급하긴 하겠는데, 국내에 지금 '유통'되고 있는 '제3의 사나이'는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것 뿐이다)에는 그레엄 그린의 또 하나의 소설인 '정원 아래에서 (Under the Garden)'가 수록되어 있다. 삶의 의지를 잃고 있던 주인공이, 자신이 생의 목표의 근원으로 삼아왔던 어린시절 살던 집 정원에서의 경험을 반추하기 위해 옛집으로 돌아와 느끼게 되는 실망감(크고 나서 보니 전부 그저 자신의 헛된 상상의 산물이었더라는)으로 인해, 자신의 지난 삶을 뉘우치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는 것이 본 소설의 기본적인 스토리.

이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노골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어떻게 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특히 주인공의 어린 시절 정원에서의 경험 부분) 어떻게 보면 심오한 철학서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때문에 다소 지루한 면도 없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이 기존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희망의 덧없음'을 깨닫게 되어 외려 '삶의 의지'를 갖게 되는 부분이 꽤나 흥미로웠는데 비교적 보수적인(?) 결말을 보면서 뜬금없게도 저자의 만년의 삶이 어땠는지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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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5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병철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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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도는 우리나라 윤리사의 한 장을 쓰려는 데 있었다. 그 무대로 더블린을 택한 것은 이 도시가 마비의 중심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네 가지 형상으로 그것을 대중에게 제시하려고 하였다. 즉 소년시대, 사춘기, 성숙기, 노쇠기의 민중의 생활이 그것이며, 작품은 그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제임스 조이스가 출판사에 보낸 서한 中-

저자인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을 '마비의 중심'으로 보아 본 소설을 쓰게 되었다지만, 내 느낌에는 더블린이 '마비된 도시'라기보다는 '정서적 소화불량'(?)에 빠진 도시로 보였다. 이러한 '정서적 소화불량'이란 표현은 '마비되었다'는 표현과는 비슷하면서도 꽤나 다르다. 전자는 후자와 달리 강렬하게 욕망하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칙칙한 현실을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지만 그것을 실현할 방법도 모르거니와 정작 욕망을 실현하고자 행동하기엔 너무도 소심하다. 아울러 사회 또한 이러한 욕망들을 받아내 해결해주지 않는다. 아니, 숫제 이러한 욕망에 대한 장애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회는 여러 난맥상을 드러내고, 사람들은 '이상해진다'. 한쪽에서는 전통적 가치에 죽고 못사는 것처럼 하면서 다른 쪽에선 그 가치를 세속화시키느라 정신이 없고, 정치에선 사익과 공익이 혼재하여 돈된다고 신념에 반하는 선거운동이 너무도 자연스레 이루어지고 있다. 결사체는 구성원과의 사소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며, 아울러 단체의 구성원은 자신의 결사체에 대한 책임감도 전혀 없다. 상사에게 받은 비난과 스트레스를 풀어내지 못한 소시민은 애꿎은 자식에게 화풀이하며, 한편으로는 바깥 세상으로의 일탈을 꿈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혀있다. 시류에 영합하여 조용하게 살고싶은 욕망은 있지만, 세상은 그렇게 조용히 살만한 상황이 아니며(참고로, 소설의 배경이 된 아일랜드는 유럽에선 유일하게 '식민지 근대'를 겪은 나라이다) 누구로부터건 존경받고 싶지만 그로 인해 지게 되는 도덕적 책임감은 회피하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감정 때문에 그녀의 옛 애인에 대해 시기심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그 시기심의 대상에 대해 공감하고 연민을 느낀다.

이렇게 주욱 서술해놓고보니 이거 과연 20세기 초 더블린이라는 곳에 사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맞나 싶은 의문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어찌보면 이 소설은 21세기 서울을 위해 준비된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정서적 소화불량' 딱 이거 우리얘기 아닌가. 수많은 욕망들이 혼재하지만 분출할 곳이라고 해봐야 월드컵같은 것 정도고 정치, 사회적 담론은 언제나 교착상태다. 칙칙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어떻게 벗어나는지 아무도 모르고, 아울러 그런 식의 '일탈'로 인해 그나마 갖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걱정이다.

하지만 어찌보면 이러한 '정서적 소화불량'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반복되는 일상과 '저거 병 아니야?'싶은 사람들의 행태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우리들'이 비슷한 욕망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욕구들과 가능성이 표면화 되는 날, 지금의 교착상태는 (한번에 뒤집히기는 힘들더라도) 조금 더 나은 상태로의 변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15편의 길고 짧은 단편의 모음인 본 소설은 저자의 말마따나 시간순으로 유년기-사춘기-성숙기-노쇠기의 인간군상들을 다룬, 애초부터 '전체가 기획된' 단편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단편집과는 다소 차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단편단편을 별 생각없이 읽어도 꽤나 재미있으며, 더군다나 등장인물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심리묘사는 독자를 미소짓게 한다. (사실 1930년대 우리나라에 본 소설이 처음 소개될 때에도 전체로서 소개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단편별로 먼저 소개되었다고 한다.) 하여간 개인적으로는 꽤나 즐겁게(?)읽었다. 일독을 권함~!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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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마법의 사중주 클리나멘 총서 1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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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깟 종이 몇장이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완구류보다 더 가치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던 때가 있었다. 찢으면 속에 금이라도 들어있을까 싶어서 화폐에 상채기를 냈다가 어머니께 혼났던 기억도 있고, 만원짜리 한장과 천원짜리 서너장을 바꾸자는 삼촌들의 짖꿎은 장난에 넘어간 기억도 있는데 이런 기억은 아마 나만의 기억은 아닐듯 싶다. 우리는-물론 위와 같은 특이한(?) 해프닝을 겪은 적이 없다손 치더라도-어떤 식으로건 화폐를 화폐로써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었을테고 그 과정을 역추적해나가다 보면 개인적으로 왜 우리는 화폐를 화폐로 받아들이며, 그 화폐를 위해 온갖것을 바치는가가 의아해지기 따름일 것이다.

이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화폐는 어떻게 화폐가 되었을까? 화폐가 어쩌다가 중요해졌을까? 그 중요한 화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폐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그저 알지못하면서 애초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자명하게'받아들일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가 화폐에 대해 무지한만큼 한쪽에선 화폐에 대한 '당연한'수탈이, 다른 한쪽에선 화폐에 대한 '당연한' 맹종이 판을 친다. 책에서 소개된 어느 조사대로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돈만 있으면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있을'지경인데, 저자인 고병권씨는 이처럼 '당연한'화폐가 어떻게 '당연'해졌는지, 그 당연해지는 과정에 어떠한 단절은 없는지를 고고학적으로 탐색한다.

저자는 화폐는 사회적 배치이자 역사적 생성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기반하에 화폐를 하나의 '구성체'개념으로 바라본다. 구성체란 어떤 것의 실존을 다양한 배치속에서 설명하면서, 그 배치의 역사적 측면 또한 고려하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하에 화폐의 경제적 차원(화폐거래 네트워크), 정치적 차원(화폐주권), 인간관계적 차원(화폐공동체), 인식적차원(화폐론)을 검토하며 그러한 차원이 화폐의 출현에 있어서 복합적으로 엮여져있음을 증명해낸다. 저자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과,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우리 모두 알고있었던 사실, 그리고 대다수는 처음 접할법한 역사적 '진실'들을 동원하여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다고 알고있는(하지만 그만큼 철저한 근거는 '전혀' 없었던-따지고보면 '당연하다'는 말은 별반 근거가 없기에 할 수 있는 소리다)상식들이 얼마나 우연적이고 단절적인 현상인지를 논증해내며, 근대화폐의 탄생이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와 상호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린비 '클리나멘 총서'의 첫번째 책인 본서는, 기본적으로 고병권씨의 박사학위 논문을 손질한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단순히 그의 다른 저서, 이를테면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같은 책을 생각했다가는 다소 '피 볼 수'도 있겠다. 생각보다 딱딱하고 지루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 20페이지에 가까운 참고문헌 목록에서 보듯 책은 오늘의 화폐가 화폐가 되는 과정에 대해 심도있는 학술적인 고찰을 하고 있다. 자본의 시대, 화폐의 시대에 살고있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우리 모두, 한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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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za 2007-08-04 08:25   좋아요 0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당연하다는 논리는 언제나 위험한 거 같아요. 그런 당연함마저 뒤집어 볼 수 있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답겠죠.

率路 2008-07-21 00:2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근데 나이먹을수록 당연하다 여겨지는 것만 늘어나는것 같아 조금 걱정이네요.
(이러면 제가 뭐 엄청 나이든 것 같겠습니다만ㅋ)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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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유명한 희곡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만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역시나 그의 또다른 작품 '행복한 나날들'이 내가 처음으로 본 연극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 연극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그 난해함은 베케트에 선뜻 다가서기 어렵도록 만드는 좋은(?) 핑계꺼리가 되어왔었거덩.^^;;;;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기에 수많은 평들이 있을 것이고, 그 멋진 평들에 쓸데없는 글하나 더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럽고 민망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개인블로그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올리고 본다ㅋ 극 중의 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포조와 럭키라는 인물이 지나가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과 주인공은 소통이 되지 않는다. 모두들 자신의 이야기만 할 뿐이고 대화의 의미는 어긋나기 마련이라 마치 '덤앤더머'를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 오지않는 '고도'덕분이라는 것, 그 '고도'가 주인공들의 삶에 일정한 룰(?)을 부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사실 소년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그리 대단한 인물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도를 기다린다는 점에선 공통되며 덕분에 불만족스럽더라도 어쨌건 '고도'를 매개로 서로 소통하며 이해한다. 고도의 부재의 현존, 마치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를 연상시키는 이 장치는, 어찌보면 한 개인의 일생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바로 그 유령같은 신앙 혹은 신념이 갖는 비중이 적지않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본'에 대한 '신앙'덕택에 유지되고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처럼.

때문에 '고도를 기다리는' 그 행위 자체는 문제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따지고보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사회가 어떻게건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고도'덕분일테니깐. 외려 문제가 되는 것은 고도에 대한 주인공들의 기다림의 맹목적이고 수동적인 성격 아닐까?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고도에 '눈이 멀어' 서로 소외되고 고립되는 주인공들을 보며 종교로부터, 이념으로부터,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현대인의 군상이 보여졌다면 내 억측일까? 결국 주인공들의 부조리함(?)은 '어떤' 고도를 기다리느냐, 그리고 고도를 위해 우리가 기다리느냐 우리를 위해 고도를 기다리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ps.여담이다만 올해가 베케트 탄생 100주년이라고 한다. 이로써 우리가 베케트의 연극을 관람해야 할, 혹은 그도 아니라면 책이라도 읽어야 할 또 하나의 핑계꺼리가 생긴 셈 아닐까? 고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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