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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평점 :
꽤나 유명한 희곡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만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역시나 그의 또다른 작품 '행복한 나날들'이 내가 처음으로 본 연극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 연극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그 난해함은 베케트에 선뜻 다가서기 어렵도록 만드는 좋은(?) 핑계꺼리가 되어왔었거덩.^^;;;;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기에 수많은 평들이 있을 것이고, 그 멋진 평들에 쓸데없는 글하나 더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럽고 민망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개인블로그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올리고 본다ㅋ 극 중의 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포조와 럭키라는 인물이 지나가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과 주인공은 소통이 되지 않는다. 모두들 자신의 이야기만 할 뿐이고 대화의 의미는 어긋나기 마련이라 마치 '덤앤더머'를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 오지않는 '고도'덕분이라는 것, 그 '고도'가 주인공들의 삶에 일정한 룰(?)을 부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사실 소년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그리 대단한 인물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도를 기다린다는 점에선 공통되며 덕분에 불만족스럽더라도 어쨌건 '고도'를 매개로 서로 소통하며 이해한다. 고도의 부재의 현존, 마치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를 연상시키는 이 장치는, 어찌보면 한 개인의 일생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바로 그 유령같은 신앙 혹은 신념이 갖는 비중이 적지않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본'에 대한 '신앙'덕택에 유지되고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처럼.
때문에 '고도를 기다리는' 그 행위 자체는 문제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따지고보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사회가 어떻게건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고도'덕분일테니깐. 외려 문제가 되는 것은 고도에 대한 주인공들의 기다림의 맹목적이고 수동적인 성격 아닐까?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고도에 '눈이 멀어' 서로 소외되고 고립되는 주인공들을 보며 종교로부터, 이념으로부터,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현대인의 군상이 보여졌다면 내 억측일까? 결국 주인공들의 부조리함(?)은 '어떤' 고도를 기다리느냐, 그리고 고도를 위해 우리가 기다리느냐 우리를 위해 고도를 기다리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ps.여담이다만 올해가 베케트 탄생 100주년이라고 한다. 이로써 우리가 베케트의 연극을 관람해야 할, 혹은 그도 아니라면 책이라도 읽어야 할 또 하나의 핑계꺼리가 생긴 셈 아닐까? 고로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