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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5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병철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평점 :
"내 의도는 우리나라 윤리사의 한 장을 쓰려는 데 있었다. 그 무대로 더블린을 택한 것은 이 도시가 마비의 중심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네 가지 형상으로 그것을 대중에게 제시하려고 하였다. 즉 소년시대, 사춘기, 성숙기, 노쇠기의 민중의 생활이 그것이며, 작품은 그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제임스 조이스가 출판사에 보낸 서한 中-
저자인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을 '마비의 중심'으로 보아 본 소설을 쓰게 되었다지만, 내 느낌에는 더블린이 '마비된 도시'라기보다는 '정서적 소화불량'(?)에 빠진 도시로 보였다. 이러한 '정서적 소화불량'이란 표현은 '마비되었다'는 표현과는 비슷하면서도 꽤나 다르다. 전자는 후자와 달리 강렬하게 욕망하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칙칙한 현실을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지만 그것을 실현할 방법도 모르거니와 정작 욕망을 실현하고자 행동하기엔 너무도 소심하다. 아울러 사회 또한 이러한 욕망들을 받아내 해결해주지 않는다. 아니, 숫제 이러한 욕망에 대한 장애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회는 여러 난맥상을 드러내고, 사람들은 '이상해진다'. 한쪽에서는 전통적 가치에 죽고 못사는 것처럼 하면서 다른 쪽에선 그 가치를 세속화시키느라 정신이 없고, 정치에선 사익과 공익이 혼재하여 돈된다고 신념에 반하는 선거운동이 너무도 자연스레 이루어지고 있다. 결사체는 구성원과의 사소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며, 아울러 단체의 구성원은 자신의 결사체에 대한 책임감도 전혀 없다. 상사에게 받은 비난과 스트레스를 풀어내지 못한 소시민은 애꿎은 자식에게 화풀이하며, 한편으로는 바깥 세상으로의 일탈을 꿈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혀있다. 시류에 영합하여 조용하게 살고싶은 욕망은 있지만, 세상은 그렇게 조용히 살만한 상황이 아니며(참고로, 소설의 배경이 된 아일랜드는 유럽에선 유일하게 '식민지 근대'를 겪은 나라이다) 누구로부터건 존경받고 싶지만 그로 인해 지게 되는 도덕적 책임감은 회피하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감정 때문에 그녀의 옛 애인에 대해 시기심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그 시기심의 대상에 대해 공감하고 연민을 느낀다.
이렇게 주욱 서술해놓고보니 이거 과연 20세기 초 더블린이라는 곳에 사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맞나 싶은 의문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어찌보면 이 소설은 21세기 서울을 위해 준비된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정서적 소화불량' 딱 이거 우리얘기 아닌가. 수많은 욕망들이 혼재하지만 분출할 곳이라고 해봐야 월드컵같은 것 정도고 정치, 사회적 담론은 언제나 교착상태다. 칙칙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어떻게 벗어나는지 아무도 모르고, 아울러 그런 식의 '일탈'로 인해 그나마 갖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걱정이다.
하지만 어찌보면 이러한 '정서적 소화불량'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반복되는 일상과 '저거 병 아니야?'싶은 사람들의 행태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우리들'이 비슷한 욕망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욕구들과 가능성이 표면화 되는 날, 지금의 교착상태는 (한번에 뒤집히기는 힘들더라도) 조금 더 나은 상태로의 변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15편의 길고 짧은 단편의 모음인 본 소설은 저자의 말마따나 시간순으로 유년기-사춘기-성숙기-노쇠기의 인간군상들을 다룬, 애초부터 '전체가 기획된' 단편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단편집과는 다소 차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단편단편을 별 생각없이 읽어도 꽤나 재미있으며, 더군다나 등장인물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심리묘사는 독자를 미소짓게 한다. (사실 1930년대 우리나라에 본 소설이 처음 소개될 때에도 전체로서 소개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단편별로 먼저 소개되었다고 한다.) 하여간 개인적으로는 꽤나 즐겁게(?)읽었다. 일독을 권함~!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