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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마법의 사중주 ㅣ 클리나멘 총서 1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5년 11월
평점 :
어린 시절 그깟 종이 몇장이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완구류보다 더 가치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던 때가 있었다. 찢으면 속에 금이라도 들어있을까 싶어서 화폐에 상채기를 냈다가 어머니께 혼났던 기억도 있고, 만원짜리 한장과 천원짜리 서너장을 바꾸자는 삼촌들의 짖꿎은 장난에 넘어간 기억도 있는데 이런 기억은 아마 나만의 기억은 아닐듯 싶다. 우리는-물론 위와 같은 특이한(?) 해프닝을 겪은 적이 없다손 치더라도-어떤 식으로건 화폐를 화폐로써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었을테고 그 과정을 역추적해나가다 보면 개인적으로 왜 우리는 화폐를 화폐로 받아들이며, 그 화폐를 위해 온갖것을 바치는가가 의아해지기 따름일 것이다.
이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화폐는 어떻게 화폐가 되었을까? 화폐가 어쩌다가 중요해졌을까? 그 중요한 화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폐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그저 알지못하면서 애초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자명하게'받아들일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가 화폐에 대해 무지한만큼 한쪽에선 화폐에 대한 '당연한'수탈이, 다른 한쪽에선 화폐에 대한 '당연한' 맹종이 판을 친다. 책에서 소개된 어느 조사대로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돈만 있으면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있을'지경인데, 저자인 고병권씨는 이처럼 '당연한'화폐가 어떻게 '당연'해졌는지, 그 당연해지는 과정에 어떠한 단절은 없는지를 고고학적으로 탐색한다.
저자는 화폐는 사회적 배치이자 역사적 생성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기반하에 화폐를 하나의 '구성체'개념으로 바라본다. 구성체란 어떤 것의 실존을 다양한 배치속에서 설명하면서, 그 배치의 역사적 측면 또한 고려하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하에 화폐의 경제적 차원(화폐거래 네트워크), 정치적 차원(화폐주권), 인간관계적 차원(화폐공동체), 인식적차원(화폐론)을 검토하며 그러한 차원이 화폐의 출현에 있어서 복합적으로 엮여져있음을 증명해낸다. 저자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과,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우리 모두 알고있었던 사실, 그리고 대다수는 처음 접할법한 역사적 '진실'들을 동원하여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다고 알고있는(하지만 그만큼 철저한 근거는 '전혀' 없었던-따지고보면 '당연하다'는 말은 별반 근거가 없기에 할 수 있는 소리다)상식들이 얼마나 우연적이고 단절적인 현상인지를 논증해내며, 근대화폐의 탄생이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와 상호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린비 '클리나멘 총서'의 첫번째 책인 본서는, 기본적으로 고병권씨의 박사학위 논문을 손질한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단순히 그의 다른 저서, 이를테면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같은 책을 생각했다가는 다소 '피 볼 수'도 있겠다. 생각보다 딱딱하고 지루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 20페이지에 가까운 참고문헌 목록에서 보듯 책은 오늘의 화폐가 화폐가 되는 과정에 대해 심도있는 학술적인 고찰을 하고 있다. 자본의 시대, 화폐의 시대에 살고있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우리 모두, 한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