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사회 카이로스총서 1
김만수 지음 / 갈무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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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어떠한 논점으로 보느냐, 혹은 어떠한 맥락 안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끌어 낼 수 있는 분석은 매우 상이해진다. 맑스가 자본주의 경제의 거래관계를 C-M-C'가 아닌 M-C-M'로 놓는 순간 그의 정치경제학이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듯,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은 그 내용상의 간단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만큼의 간단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본서의 저자 또한 굳이 특별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즉, 책에 나와있는 내용 또한 정치경제학적 기본 지식이 있다면 충분히 추론 가능한 내용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저자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라던지, 그에 따른 이윤율 저하 경향성을 '실업'의 프리즘으로 해석한다. 한마디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가 실업률의 증가 경향성을 만든다는 것인데, 책은 이처럼 지금과는 살짝 틀어진(하지만 현실적으로 매우 절박한) 부분에 방점을 찍어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사회학적 상상을 가능케 하는 것 같다.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 있다. 우선 저자는 그간의 실업률 통계를 분석하며, 국제기준에 맞추어진 우리의 실업률 통계가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논한다. 단순히 1주일에 1시간만을 일한 사람들을 그것도 이런저런 이유로 '경제활동인구'라는 표본대상에서 제외한 채 집계되는 실업률은, 어찌보면 자본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산업예비군들의 불만을 억누르고자 하는 기만책으로 보일 지경인데, 저자는 이러한 실업률 통계에 관한 논쟁의 소모성을 감안해서인지 이후로 줄곳 '실업률'대신 '가변자본'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즉, 실업률이 몇퍼센트인지를 떠나서 산업구조 속에서 근로자들의 몫이 얼마인지를 파악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듯 한데, 이는 상당부분 비정규직 등 불완전노동이나 '나쁜직장'을 통해 실업률을 낮추려하는 국가정책을 감안하면 합리적인 고려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 저자는 지난 30년간 주요 기업의 재무제표 등을 분석하여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 및 실업률 증가 경향을 '실증적'으로 분석해내는데, 이 부분이 이 책을 참신하게 하는 요소일 뿐 아니라 논쟁의 여지가 되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결정적으로 재무제표라던가 기타 기업 통계들을 통해 가변자본을 정확히 파악하기에는 매우 난망하다는 점에 있는데, 아무튼-개인적으로 회계학적 지식이 일천한바-이러한 분석은 일단, 우리의 상식에 부합하는 '추정'정도로 감안해서 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러한 실업사회에서 '상대적 과소인구'와 '상대적 과잉인구'의 삶이 어떠한지, 그리고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저자의 '격정토로'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구직자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채워진 마지막 부록은 어느정도 연결되어 읽히는 부분도 있다.

사실 대략의 내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 본서는 매우 모호한 성격의 책이다.(이는 저자 또한 서두에서 밝힌 바 있다.) 대략 통계학-회계학-사회학이 각 장의 중심축을 잡는 듯 하며, 거기에는 정치경제학적 마인드가 곳곳에 스며있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알 수 있는것은 실업이란 것이 숫자 몇퍼센트에 '국민성공시대를 열어가겠습니다 여러부운~'이라는 단순한 수사로 커버될 수 있을만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을 포함한)경제학은 차디찬 숫자로 인간의 그 복잡다단한 문제를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해석하여 우리를 냉소하게 만들고, 사회학은 그 강렬함이 지나쳐서 숫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강요하는듯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의 제안-한편으론 살아남기위해(?) 개인적으로 노력하며, 다른한편으론 서로간의 연대를 도모하자로 요약하면 될라나?-는 저자 스스로도 의문부호를 붙히긴 했지만(마지막 장 목차의 제목은 무려 '대안?' 이다)은 다소 미흡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일런지도 모른다.

자신을 파괴해야 자신을 증식해 나갈수 있도록 운명지워진 자본주의 사회는, 그것이 고도화 되면 될수록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거대한 산업예비군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이 사회가, 그러한 필요에 의해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는 다수의 청년들에게 그러한 실업의 책임을 온전히 개인적 문제로 돌려 그들 자신의 삶의 희망과 나아가 인간적 존엄성까지 앗아가 버린다는 점에 있다. 대외적으로는 틈만나면 젊은이들의 사회의 희망이라고 외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이 사회가 언제나 청년들에게 이토록 가혹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자명하다. 청년들이 현실을 바로보게 되는 것, 그리하여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기득권 유지에 불안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처럼 주기적으로 파괴되고 수습되는 자본주의의 싸이클은 그만큼 '비경제적'이고 그러하기에 '비영구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세상을 바로보는 것, 그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것. 어떠한 좌절에도 자신감을 잃지않고 꿈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되, 우리가 발딛고 있는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지 않는 것, 그리하여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연대하는 것이 아닐런지. 너무 추상적이라고?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글쎄, 그에 대해서는 루쉰의 그 유명한 희망에 대한 잠언으로 답하는 수밖에.

 '희망이란/본래 있다고도 할수 없고/없다고도 할 수 없다/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루쉰-

해서, 우리의 연대가 희망을 향한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힘일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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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23 17:39   좋아요 0 | URL
경제학 책이라서 저자가 강만수인줄 알았어요.마르크스 경제학의 범주로 실업을 분석했군요.경제학 서적도 많이 보시나 봐요.

率路 2008-08-23 20:13   좋아요 0 | URL
앗, 이렇게 방문해주시니 영광(?^^;;)인걸요. 체계없이 누군가 추천해주는건 그때그때 읽는 편이라 어찌하다보니 이런책들도 적지 않게 읽은 셈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4 00:23   좋아요 0 | URL
하하하...영광은 법성포의 굴비가 유명한데요.이거 군사정권 때 우스개인가요?

率路 2008-08-24 17:24   좋아요 0 | URL
시대를 초월한 유머 아닐까요?? 으흐흐흐흐^^;;;;;

노이에자이트 2008-08-24 20:37   좋아요 0 | URL
요즘 분위기가 군사정권 같아서 우스개도 그 당시 것으로....좀 서글프네요.

率路 2008-08-31 19:46   좋아요 0 | URL
그래도 조금 웃기잖아요?-_-;;;(맑스를 염두에 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ㅋㅎ)
 
현대 철학의 흐름 - 학술총서 16
박정호 외 지음 / 동녘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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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들어선 이후 시중에는 다양한 인문학 입문서 및 해설서가 꾸준히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교과서'라 할만한 서적을-특히 현대철학의 경우에는-찾아보기 쉽지 않던 판에 선택하게 된 것이 본서이다. 실제 적지 않은 대학에서 수업 교재로 쓰여지곤 한다는 본서는 현상학-비판이론-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분석철학의 네 꼭지로 각각의 흐름에서 중요한 철학자의 사상을 검토하고 있다.

대부분 입문서라고 하는 것들이 너무 분석철학에만 치우친다던지, 구조주의에만 치우친다던지 하는 식의 우를 범하고는 하는데, 본서는 목차에서 드러나듯 그러한 난점을 '공저'라는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다. 허나 문제는 본서가 공평무사함이라는 덕목을 취하기 위해 선택한 '공동작업'이라는 수단이, 다시 그 자체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는 점에 있다. 우선 현대 철학의 중요한 네가지 흐름을 500페이지 남짓되는 분량에 압축시키려다보니 꼭지에 따라 지나치게 불친절한 부분이 종종 보인다. 때문에 공정성을 기한다고는 했지만, 어느정도 읽기 수월하고 분량도 많이 할애된 구조주의나 비판이론 쪽에 책 자체의 무게중심이 많이 쏠리는 듯한 인상이다.(물론 구조주의 안에서도 라캉과 데리다의 비중은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난다.) 뿐만아니라 현대철학이 많은 경우 한 흐름에 속한다기보다는 그 흐름의 경계마저 종종 무화시킬 정도로 불분명해지곤 하는데, 너무 네 부문을 명확히 나눠 서술함으로 인해 적지 않게 놓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후기구조주의'에 속한다는 데리다를 이야기하면서 '현상학'자인 하이데거의 영향을 간과할 수 있을까. 여기에, 출간된지 12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볼 때 몇몇 학자에 대한 그 이후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다보니 본서를 읽으면서 이미 알고 있던 부분에 대해서는 그 이해가 좀 더 확실해지거나 혹은 너무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져 지루하거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지만, 애초부터 그 이해수준이 떨어지던 부분(개인적으로는 분석철학 쪽)은 기초 개념들 몇몇만 파편적으로 이해되거나 혹은 아예 공란으로 남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본서가 어느정도 수준이 되는 철학 논문 모음집이 아닌 입문서를 지향한다고 했을 때, 간과할 수 없는 약점으로 보인다.

물론 본서에 입문서로써의 미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서의 무시 못할 장점은 역시 현대철학의 각 흐름에 속하는 학자를 논하기 전에 그 흐름의 철학에 대한 총괄적인 개관과 문제의식을 제시한다는 점인데, 이는 그 난해함으로 인하여 문제설정이라는 학문적 접근의 기초적인 단계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텍스트에 함몰되고만 마는 우를 종종 범하는 초심자에게 괜찮은 나침반이 되주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 또한 아쉬움이 남는 것이, 단순히 몇 페이지 정도로 개관할 것이 아니라, 이후의 철학자에 대한 소개를 좀 더 간명히 하는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그러한 철학의 흐름이 파생되게 된 연원 같은것을 좀더 자세히 언급하였더라면 외려 입문서로써 더 나은 결과를 내 놓을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것이다.

아무튼 출간 취지야 괜찮았고, 몇몇 학자에 대한 소개(개인적으로는 후설, 하이데거 푸코, 그리고 데리다가 특히 좋았다)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그 방향성이 모호한 결과물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물론 강의용으로 쓴다거나, 현대철학에 대한 어느정도의 이해가 있는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면야 나쁘지 않을수는 있겠다만 독학(?!)으로 현대철학에 접근해보고자 하는 초심자가 읽기에는 애매한 교재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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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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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책은 크게 전문적인 미학서적과 사회비평서적의 두 유형으로 나뉜다. 지식인의 저서가 이렇게 전공분야-사회분야의 두 유형으로 나뉘는 경우야 생소하다기보단 외려 일반적인 경우라 할 수는 있지만, 진중권의 경우는 다른 저자에 비해 그 편차가 굉장히 크다는 것이 특징이다.(심지어 각 유형의 책은 문체나 분위기마저 다르다) 그런 그가 한국인의 몸을 화두로 그 '구성된' 층위를 파악해 본다기에 그 주제부터가 그의 미학적 식견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독설(?!)이 융화되어 표출될 것 같아서 굉장히 기대하고 읽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실망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의 원인은 본서를 읽으면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압축근대'를 지내온 한국 사회에는 그 엄청난 변화의 속도로 인하여 전근대-근대-탈근대의 모든 성격이 복마전처럼 얽히고 섥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저자도 그러한 세간의 평가에 동의하는지 크게 우리사회의 근대성-전근대성-탈근대성이 어떤식으로 표출되어 우리의 몸에 담지되었는지를 논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설명이-진중권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에 비하자면-너무 진부하다는 데에 있다. 우리 사회의 전근대나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가 오랜기간(?) 유학했던 독일에 비교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과연 얼마나 현상학적(?!)인가 하는 물음은 뒤로 하더라도 도대체 '한국이 일본을 죽어도 따라잡지 못하는 몇가지 이유'운운하는 책들과 차별점이 뭐일까 의문스러울 지경에 이른다. 게다가 저자가 서문에서 조심한다고 하긴 했지만, 이런 식의 비판이 한국인 일반을 전체적으로 싸잡아 이야기 하느라 왜곡아닌 왜곡을 일삼게 되는 민족주의적 담론과 얼마나 차이가 있겠느냐는 생각마저 들기까지 하는데, 이는 많은 부분 저자가 어떠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우리의 전근대-근대성을 비판하는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러한 서술행태로 인해 개인적으로는 많은 부분, 리얼함과 위험함 사이에서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우리사회의 굉장히 전위적이지만 우습고 가벼운 탈근대적 흐름을 분석하는 곳에서 진중권의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데-에필로그를 감안하지 않은 상태에서-개인적으로 느낀바, 차라리 이 부분만 가지고 책한권을 썼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자문화와 구술문화를 설명하며 새로운 시대의 대안으로 문자문화적 미덕을 갖춘 구술문화로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다소 갈팡질팡하는 듯 싶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자면 각종 예술작품을 재미있게 비평하며 오늘, 우리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서술은 굉장히 신선하고 날카롭게 읽혔다. 문자문화의 쇄퇴를 바라보며 중세와 탈근대가 합류하는 아이러니를 논하고 인쇄매체마저 자신의 논조를 천연덕스럽게 바꾸는 원인을 구술문화에서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지적하며 발터벤야민으로 키치스런 예식장 건물을 감상하고 보드리야르로 짝퉁에 대한 사회비평을 하는 그의 서술은, 독자로 하여금 역시 진중권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그리고 짧은 에필로그. 비로소 여기에서야 독자는 저자가 왜 진부함이나 위험함을 무릅쓰고 우리 몸의 전근대나 근대적 질곡(?)을 하나하나 까발렸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전근대나 근대성의 덕목이 모조리 악덕으로만 채워진 것도, 혹은 꼭 미덕보다 악덕이 더 많은 것도 아니다. 서양의 전근대적 귀족문화는 이후의 서양의 근대를 구성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으며, 근대성이 과연 총체적으로 '악'이었는가하는 점은 아직도 학문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해서 어찌보면 중요한 것은 전근대든 근대든 탈근대든 그것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배격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접합하느냐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주장도 바로 그 부분에 맞추어져 있고, 아울러 이러한 전근대-근대-탈근대에 관한 왜곡된 접합의 결과물로서 오늘날 우리의 '몸'은 저자의 전공분야와 사회분야에 대한 이중적인 서술의 이유에 대한 어떤 단초를 제공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전근대적 양반문화로부터 근대성의 미덕이 될법한 부분보다는 권위주의만을 받아들이고, 근대성으로부터도 그 합리성보다는 전투성이나 속도성만 받아들여 표피적인 탈근대 문화 속으로 질주하고 있는 우리의 그로테스크한 몸은, 사실 고도의 미학적인 분석이 무색할 정도로 그 난맥상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외려 오늘 여기의 이 꼬이고 꼬인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리 첨단(?)이론을 들이대기 보다는 기본부터 차근차근 생각해 나가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욱 절실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해서 진중권이라는 미학자가 이런 식으로 소비되는 것이 어찌보면 굉장히 유감스런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식의 소비가 지금, 여기에서는 더더욱 절실하다 아니할 수 없겠다. 사실 본서는 오늘의 문명의 질곡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는 소위 '좌파'가 읽기엔 굉장히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줄곳 미래는 상상력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시대이고 새로운 산업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몸을 이야기한다. 즉 의도적으로 저자는 자본주의 '이후'까지는 염두에 두지 않고 서술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자본주의 그 '이후'를 논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이후를 논할 수 있는 상식, 그리고 그것이 담지된 신체이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해서 본서는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합해서 소위 '우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고 받아들여져야 하는 내용, 그리고 그들의 전환을 위한 '각성'이 아닌, 지금 상태를 기초로 한 '발전'을 도모하려는 듯한 제언으로 가득 차 있다. 극우파로 이루어진 세상이 악몽이듯, 급진파로 가득한 세상도 결코 권장할만한 사회는 아니다. 때문에 사회는 언제나 건전한 우파, 건전한 좌파를 요구한다. 진정 자기'계'발을 원하는 우파라면, 그리하여 우리사회를 좀 더 아름답게 가꾸길 원하는 우파라면, 괜한 자기계발서적들고 헛짓하지 말고 진중권을 읽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어쩌면 '사회비평가'로서의 진중권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첨단을 걷는 자유주의자일지도 모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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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_com 2008-08-15 23:0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진중권이 처음 대중적으로 알려진 게 미학오디세이이긴 해도 실제로는 악플러로 데뷔(?)를 한 셈이니 저도 사회비평가 자유주의자 진중권이 더 좋습니다. 워낙 화끈하시니 보는 사람 맘이 조마조마하여 더 애착도 생기고. 실제로도 학교 강의실에서 만큼은 혹시나 기대하고 들어간 청강생이라면 몸이 근지러워질 정도로 조용조용하다고 전해지더군요...^^ 개인적으론 좋아하는 외모라 보고 싶긴 한데....////

率路 2008-08-19 00:16   좋아요 0 | URL
전 운문체로 글쓰는 사람을 보면 일종의 경외(?!)같은걸 느끼는터라(뭐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너~무 만연체라 그런것도 있구요.)미학자 진중권을 조금 더 좋아하긴 해요. 근데 진중권씨가 참 대단한게, 표현은 화끈해도 개별 행동을 보면 굉장히 신중한것같아서 말이죠.^^;;

ps.좋아하는 외모라...미감이 독특하시....(앗, 진중권씨한텐 죄송ㅋ)

노이에자이트 2008-08-24 00:24   좋아요 0 | URL
진중권 씨 보면 윤종신 씨가 생각나서...

率路 2008-08-24 17:25   좋아요 0 | URL
누가 더 기분나빠할까, 생각해보니

정말 둘다 비슷하게 기분나빠할 것 같아요ㅋㅎ

노이에자이트 2008-08-24 20:38   좋아요 0 | URL
노래는 윤종신 씨가 월등하고 입담은 비슷비슷할 거 같아요.

率路 2008-08-31 19:47   좋아요 0 | URL
사견입니다만, 방송인으로써 윤종신씨는 지금이 전성기이신듯ㅋㅎ

가시장미 2008-10-15 01:14   좋아요 0 | URL
아.. 읽고 싶은 책이였는데- 리뷰를 보니,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망설여집니다. -_ㅠ
책 내용이 어려운 건가요? 님의 리뷰가 어려운 건가요? 제가 무식한 걸까요?
셋 중에 하나일 듯 합니다만 ㅋㅋ 확인해보기 위해 지릅니다. 땡스 투~ ^^

率路 2008-10-15 11:33   좋아요 0 | URL
어렵게 느껴지셨다면 제가 리뷰를 잘못썼나봐요.ㅠㅠ
어려운 책은 아니거든요. 사실 좀 진부하다 싶은 부분마저 있을지경ㅋㅎ
 
직선들의 대한민국 - 한국 사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 빠지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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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경제공화국의 시대란다. 이승엽의 홈런공을 줍겠다고 야구장이 잠자리채로 가득 매워지던 시대, 국가의 목표가 'GDP 20000불'이라는 수치로 제시되는 시대, 각자의 추억이 서린 삶이 터전이 헐리는 것을 박수치며 반기는 시대는 결국 '국민성공시대'라는 무슨 자기계발서적 광고문구 같은 슬로건을 내건 정부의 출범으로 귀결된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경제공화국의 시대에 정작 '경제적 인간의 합리적 행동'같은 것은 눈씻고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자신이 뻔히 손해볼 일들을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행하고 있다. 도시 재개발로 인한 집값 상승이나 한미FTA 체결, 혹은 각종 공공부문 민영화 등의 정책으로 인해 정작 극심한 피해를 보는 것은 대다수 서민들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그러한 정책에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낸다. 이런 현상을 두고 오늘날이 과연 경제공화국의 시대라 할 수 있을까?

혹자는 이를두고 경제'이성'이 아닌 경제'신앙'의 시대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도 이상하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해 어떠한 정부정책이 '진정' 서민을 위한 정책인지 조금만 노력하면 찾아볼 수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국민들은 자기 발등을 찍는 결정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경제라는 담론을 믿음으로라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애초 문제는 경제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이 어처구니 없는 현상에 대해 정치적 어법(혹은 프레임)의 문제라는 둥, 문화적 헤게모니의 문제라는 둥 여러 각도에서의 분석을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모두 조금씩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는데, 이러한 오늘의 난맥상이 다름아닌 '미학'의 문제라는 대담한 주장을 하고 나온 '경제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C급 경제학자'라는 우석훈이다.

애초 '대운하 책'으로 쓰여졌다는 본서는 단순히 대운하의 문제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본서가 단순히 대운하를 비판하려는 책이었다면 나 또한 굳이 만 얼마씩 써가며 본서를 구입하진 않았을 것이다. 대운하에 대한 어지간한 비판 논거는 인터넷에 널려있고 어렵게 생각 안해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서 대운하 건설이 얼마나 우스운 '짓'인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주목하는 점은 대운하 '그 자체'가 아니다. 대운하를 위시하여 그와 비슷한 일련의 국책사업들이 추진되고 시행될 수 있는 그 배경 자체에 저자는 줄곳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거의 '재앙적인' 건설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데에는 오늘의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미학'이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우리의 대통령은 한반도 대운하를 두고 '왜 이 좋은걸 안하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거대한 어항이랄법한 청계천이나 환기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주상복합 아파트를 보고 '멋지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문제를 이야기하고 파해쳐지는 국토를 보며 가슴아파하지만 돌아서서 하는 행동은 매우 다르다. 나무 몇그루 심어놓고 키치스런 건축물 한두개 세워 이것이 생태공원입네하는 도시 미학에서 생태적 함의란 눈씻고 찾아봐야 찾을 수 없는게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온통 개발개발개발로 귀결된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어느덧 돈과 경제성장의 문제를 넘어섰다. 부동산 거품은 커져만가고 수도권 과밀화로 인한 비경제성이 극에 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에는 동의하면서도 그러한 '문제'들에 한몫 기여(?)해보려고 안달들이다. 여기에 경제학적인 측면에서의 반대논거를 들이대는것이 과연 의미있는 일일까?

'재앙'이라고 여겨지는 라인강 운하를 보고 한반도 대운하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아름답다'라고 이야기 한다. 이런 상황에서 복잡한 수식의 경제 논리를 들이대는 것은 그야말로 남의 다리 긁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해서, 문제는 외려 우리의 미적 감수성에 있었고, 따라서 대안은 경제가 아닌 미학의 측면에서 나와야 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경제학은 세상을 해석하는 데에야 유용하지만, 세상을 바꾸는데는 무기력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자 또한 이러한 미학적 대안으로서 '생태미학'을 제시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생태미학이라는 것 또한-미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자체에서 배태되는 난점이기도 하다만-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안의 모호함에 있는 것 같다. 생태미학의 모호함은 역설적으로 그 생태미학의 급진적인 민주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딱딱한 경제학적 서술에서 벗어나 이런저런 사회심리학적, 미학적 논거들을 친근한 어조로 들이대며, 맞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대놓고 이야기하기에는 학자적 근엄성을 훼손하게 될 것 같아 다들 기피하는 이야기들을 마치 잡담하듯 천연덕스럽게 서술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도 책의 서술과 그 목적-생태미학이라는 대안의 창출?!-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본서의 그 산만함을 매우고도 남을 미덕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국토를 파해치고, 건물을 높게높게 올리고, '자연'이란 영역을 절멸시키는 방식으로의 성장은 언젠가 한계에 부딪힐 것임은, 아울러 그러한 성장이 우리 삶에 궁극적으로 전혀 이롭지 않을 것임은 우리 스스로도 이미 잘 알고 있다. 대운하 반대의 압도적인 여론과 지난 몇달간 이어진 촛불집회는 수십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그러한 건설미학의 균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불도저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되고 나아가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시대, 불도저의 것을 불도저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라도, 그리하여 우리의 살림살이-즉, 경제-가 좀더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대안이 절실한 오늘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저자가 제시한 '생태미학'은 오늘을 사는 우리모두가 한번쯤 고민해 볼만한 화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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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기초이론 - 개정증보판, 기초학습문고 4
백산서당 편집부 엮음 / 백산서당 / 1990년 6월
평점 :
절판


신림동 인근의 헌책방에 가면 수도 없이 꽂혀 있는 책, 아직도 이런 책이 나오느냐는 반문을 들을 법한 책, 특정인의 이름이 아닌 그저 '백산서당 편집부'라고 적혀있는 저자명에서 느껴지듯, 본서는 80년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책이다.(라고 쓰기는 한다만, 개정판의 출간연도는 1990년이고, 적어도 90년대 말까지는 여전히 대학 내 각종 단위에서 세미나 교재로 심심찮게 쓰여진 책이다.)

아마도 구 소련이나 동독의 철학 교과서 요약본을 번역한 것이거나, 아니면 구 동구권 어느어느나라의 철학 교과서를 우리 선배들이 직접 학습(?!)하면서 요약한 결과물을 출판한 것이겠거니 싶을만큼 구성면에서 다소 단선적인 면이 있으며(매 장마다 소위 '학습지침'이라는게 떨어지는데 지금보면 조금 귀엽다는 생각도 든다.^^;;;) 때문에 구닥다리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실제 그런면이 없는것도 아니긴 허다ㅋ) 그 때 그 시절 전지구의 절반을 지배했던 사상을 그 어떤 책보다도 간단명료하게 접해볼 수 있다는 미덕을 지닌 책이기도 하다.

'세상을 해석하기 위한 것이 아닌 변혁하기 위한'철학의 학습 의의와 학습 요령을 설명한 후 유물론, 변증법, 사적 유물론 등등등을 소개하며 이것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의 당위로까지 이어지는지를 정말 '숨가쁘게', '거침없이' 이어가는 본서는, 그 목적을 향한 직선적인 형식으로보나 서술체계의 명료성으로보나 '근대'라는 필드의 극점으로서의 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온몸으로 재현해내는 듯 싶다. 때문에 굉장히 닫힌 형식의 책이고, 세미나 교재용이라고 하기엔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토론할 꺼리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 듯한 내용의 책이기는 하나, 반영론이니 변증법적/사적 유물론이니 하는, 다른 '현대적인' 텍스트를 읽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한 개념이 아주 솔직하고 명료하게 등장한다는 점은 이 책의 악덕이자 미덕인 것으로 사료된다.

한 때 인류의 절반이 고민했던 사상적 결과물을 다이제스트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사상의 현실적인(혹은 잠정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전히 일정정도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맑스주의의 단선적인 타락의 결과물로 읽든, 불굴의 발전과정에서의 중간 결과물로 읽든 그것은 독자의 마음이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세상을 모색하는 데 있어 과거에 우리의 선배들이 했던 생각을 다시금 곱씹어본다는 것이 아무 의미없는 작업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맑스주의에 대한 협애하고 단선적인 해석에 며칠을 두고 시간을 투자하기는 솔직히 다소 머뜩잖을 수 밖에 없는 일, 해서 그런 사상을 단순명료하게 설명해놓은 본서는 아직도 읽혀질만한 가치가 있겠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인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철학에세이보다 외려 더 재미있게(?) 읽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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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08-08-07 14:57   좋아요 0 | URL
ㅋ. 줄여서 <철기>라고 했던 기억이..재미있게(?)읽으셨군요..부럽삼^^

率路 2008-08-07 14:59   좋아요 0 | URL
의미심장한 물음표라죠?ㅋ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