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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철학의 흐름 - 학술총서 16
박정호 외 지음 / 동녘 / 1996년 8월
평점 :
2000년대에 들어선 이후 시중에는 다양한 인문학 입문서 및 해설서가 꾸준히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교과서'라 할만한 서적을-특히 현대철학의 경우에는-찾아보기 쉽지 않던 판에 선택하게 된 것이 본서이다. 실제 적지 않은 대학에서 수업 교재로 쓰여지곤 한다는 본서는 현상학-비판이론-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분석철학의 네 꼭지로 각각의 흐름에서 중요한 철학자의 사상을 검토하고 있다.
대부분 입문서라고 하는 것들이 너무 분석철학에만 치우친다던지, 구조주의에만 치우친다던지 하는 식의 우를 범하고는 하는데, 본서는 목차에서 드러나듯 그러한 난점을 '공저'라는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다. 허나 문제는 본서가 공평무사함이라는 덕목을 취하기 위해 선택한 '공동작업'이라는 수단이, 다시 그 자체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는 점에 있다. 우선 현대 철학의 중요한 네가지 흐름을 500페이지 남짓되는 분량에 압축시키려다보니 꼭지에 따라 지나치게 불친절한 부분이 종종 보인다. 때문에 공정성을 기한다고는 했지만, 어느정도 읽기 수월하고 분량도 많이 할애된 구조주의나 비판이론 쪽에 책 자체의 무게중심이 많이 쏠리는 듯한 인상이다.(물론 구조주의 안에서도 라캉과 데리다의 비중은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난다.) 뿐만아니라 현대철학이 많은 경우 한 흐름에 속한다기보다는 그 흐름의 경계마저 종종 무화시킬 정도로 불분명해지곤 하는데, 너무 네 부문을 명확히 나눠 서술함으로 인해 적지 않게 놓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후기구조주의'에 속한다는 데리다를 이야기하면서 '현상학'자인 하이데거의 영향을 간과할 수 있을까. 여기에, 출간된지 12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볼 때 몇몇 학자에 대한 그 이후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다보니 본서를 읽으면서 이미 알고 있던 부분에 대해서는 그 이해가 좀 더 확실해지거나 혹은 너무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져 지루하거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지만, 애초부터 그 이해수준이 떨어지던 부분(개인적으로는 분석철학 쪽)은 기초 개념들 몇몇만 파편적으로 이해되거나 혹은 아예 공란으로 남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본서가 어느정도 수준이 되는 철학 논문 모음집이 아닌 입문서를 지향한다고 했을 때, 간과할 수 없는 약점으로 보인다.
물론 본서에 입문서로써의 미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서의 무시 못할 장점은 역시 현대철학의 각 흐름에 속하는 학자를 논하기 전에 그 흐름의 철학에 대한 총괄적인 개관과 문제의식을 제시한다는 점인데, 이는 그 난해함으로 인하여 문제설정이라는 학문적 접근의 기초적인 단계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텍스트에 함몰되고만 마는 우를 종종 범하는 초심자에게 괜찮은 나침반이 되주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 또한 아쉬움이 남는 것이, 단순히 몇 페이지 정도로 개관할 것이 아니라, 이후의 철학자에 대한 소개를 좀 더 간명히 하는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그러한 철학의 흐름이 파생되게 된 연원 같은것을 좀더 자세히 언급하였더라면 외려 입문서로써 더 나은 결과를 내 놓을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것이다.
아무튼 출간 취지야 괜찮았고, 몇몇 학자에 대한 소개(개인적으로는 후설, 하이데거 푸코, 그리고 데리다가 특히 좋았다)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그 방향성이 모호한 결과물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물론 강의용으로 쓴다거나, 현대철학에 대한 어느정도의 이해가 있는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면야 나쁘지 않을수는 있겠다만 독학(?!)으로 현대철학에 접근해보고자 하는 초심자가 읽기에는 애매한 교재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