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들의 대한민국 - 한국 사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 빠지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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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때는 바야흐로 경제공화국의 시대란다. 이승엽의 홈런공을 줍겠다고 야구장이 잠자리채로 가득 매워지던 시대, 국가의 목표가 'GDP 20000불'이라는 수치로 제시되는 시대, 각자의 추억이 서린 삶이 터전이 헐리는 것을 박수치며 반기는 시대는 결국 '국민성공시대'라는 무슨 자기계발서적 광고문구 같은 슬로건을 내건 정부의 출범으로 귀결된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경제공화국의 시대에 정작 '경제적 인간의 합리적 행동'같은 것은 눈씻고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자신이 뻔히 손해볼 일들을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행하고 있다. 도시 재개발로 인한 집값 상승이나 한미FTA 체결, 혹은 각종 공공부문 민영화 등의 정책으로 인해 정작 극심한 피해를 보는 것은 대다수 서민들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그러한 정책에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낸다. 이런 현상을 두고 오늘날이 과연 경제공화국의 시대라 할 수 있을까?

혹자는 이를두고 경제'이성'이 아닌 경제'신앙'의 시대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도 이상하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해 어떠한 정부정책이 '진정' 서민을 위한 정책인지 조금만 노력하면 찾아볼 수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국민들은 자기 발등을 찍는 결정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경제라는 담론을 믿음으로라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애초 문제는 경제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이 어처구니 없는 현상에 대해 정치적 어법(혹은 프레임)의 문제라는 둥, 문화적 헤게모니의 문제라는 둥 여러 각도에서의 분석을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모두 조금씩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는데, 이러한 오늘의 난맥상이 다름아닌 '미학'의 문제라는 대담한 주장을 하고 나온 '경제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C급 경제학자'라는 우석훈이다.

애초 '대운하 책'으로 쓰여졌다는 본서는 단순히 대운하의 문제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본서가 단순히 대운하를 비판하려는 책이었다면 나 또한 굳이 만 얼마씩 써가며 본서를 구입하진 않았을 것이다. 대운하에 대한 어지간한 비판 논거는 인터넷에 널려있고 어렵게 생각 안해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서 대운하 건설이 얼마나 우스운 '짓'인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주목하는 점은 대운하 '그 자체'가 아니다. 대운하를 위시하여 그와 비슷한 일련의 국책사업들이 추진되고 시행될 수 있는 그 배경 자체에 저자는 줄곳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거의 '재앙적인' 건설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데에는 오늘의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미학'이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우리의 대통령은 한반도 대운하를 두고 '왜 이 좋은걸 안하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거대한 어항이랄법한 청계천이나 환기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주상복합 아파트를 보고 '멋지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문제를 이야기하고 파해쳐지는 국토를 보며 가슴아파하지만 돌아서서 하는 행동은 매우 다르다. 나무 몇그루 심어놓고 키치스런 건축물 한두개 세워 이것이 생태공원입네하는 도시 미학에서 생태적 함의란 눈씻고 찾아봐야 찾을 수 없는게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온통 개발개발개발로 귀결된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어느덧 돈과 경제성장의 문제를 넘어섰다. 부동산 거품은 커져만가고 수도권 과밀화로 인한 비경제성이 극에 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에는 동의하면서도 그러한 '문제'들에 한몫 기여(?)해보려고 안달들이다. 여기에 경제학적인 측면에서의 반대논거를 들이대는것이 과연 의미있는 일일까?

'재앙'이라고 여겨지는 라인강 운하를 보고 한반도 대운하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아름답다'라고 이야기 한다. 이런 상황에서 복잡한 수식의 경제 논리를 들이대는 것은 그야말로 남의 다리 긁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해서, 문제는 외려 우리의 미적 감수성에 있었고, 따라서 대안은 경제가 아닌 미학의 측면에서 나와야 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경제학은 세상을 해석하는 데에야 유용하지만, 세상을 바꾸는데는 무기력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자 또한 이러한 미학적 대안으로서 '생태미학'을 제시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생태미학이라는 것 또한-미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자체에서 배태되는 난점이기도 하다만-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안의 모호함에 있는 것 같다. 생태미학의 모호함은 역설적으로 그 생태미학의 급진적인 민주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딱딱한 경제학적 서술에서 벗어나 이런저런 사회심리학적, 미학적 논거들을 친근한 어조로 들이대며, 맞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대놓고 이야기하기에는 학자적 근엄성을 훼손하게 될 것 같아 다들 기피하는 이야기들을 마치 잡담하듯 천연덕스럽게 서술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도 책의 서술과 그 목적-생태미학이라는 대안의 창출?!-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본서의 그 산만함을 매우고도 남을 미덕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국토를 파해치고, 건물을 높게높게 올리고, '자연'이란 영역을 절멸시키는 방식으로의 성장은 언젠가 한계에 부딪힐 것임은, 아울러 그러한 성장이 우리 삶에 궁극적으로 전혀 이롭지 않을 것임은 우리 스스로도 이미 잘 알고 있다. 대운하 반대의 압도적인 여론과 지난 몇달간 이어진 촛불집회는 수십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그러한 건설미학의 균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불도저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되고 나아가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시대, 불도저의 것을 불도저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라도, 그리하여 우리의 살림살이-즉, 경제-가 좀더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대안이 절실한 오늘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저자가 제시한 '생태미학'은 오늘을 사는 우리모두가 한번쯤 고민해 볼만한 화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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