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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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소재의 독창성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곤한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능력있는 젊은 인문학자들을 새로이 발굴해내는 기능 또한 이 시리즈의 무시못할 장점이기는 하지만, 이 문고본의 가장 큰 의의는 역시 그 짧은 분량상의 한계를 독창성으로 커버해 낸다는 점에 있는 듯 싶다.

아리스토텔레스 관련 서적들을 검색하다보면 대부분은 철학과 정치학 관련된 것들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는 제목부터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사실 책의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이라고만 국한해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외려 본서는 '경제학의 계보학'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맑스가 '자본'을 쓸때만해도 '경제학'이라는 용어는 없었다. 단지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만 있었을 뿐.(때문에 '자본'의 부제는 '경제학 비판'이 아닌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그 이전에도 경제학은 경제학 그 스스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과거 아테네의 폴리스 운운하던 시절까지 내려갈 것도 없이 산업화 초기단계까지만해도 경제학을 다룸에 있어, 무엇이 좋은 삶이고, 무엇이 옳은 삶인지에 대한 논의를 경제학으로부터 떼어놓지 않았다. 그거 아는가? 오늘날 경제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아담스미스는 경제학자(물론 당대에는 그나마도 '경제학자'가 아닌 '정치경제학자'로 불리웠다)이기 이전에 윤리학자였음을. 경제학을 사회, 정치 및 가정으로부터 독립시키고, 희소성(사실, 희소한 물건은 '없다' 단지 그것을 독점해낼 수 있는 권력이 희소할 뿐이다.)과 시장가격이란 개념을 우상화 시키는 행태는 유구한 인간 역사속의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경제 관료들과 경제학자들에서부터 오늘도 여기저기서 찌질한 댓글달고 앉아있는 키보드 워리어들까지 경제가 우리 삶의 가장 우선된 무엇이라는 가정하에 세상만사를 논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것이 '경제'라면 '경제학'을 인간이 배제된 '순수한'경제학으로 다루는 것은 경제학 자신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박탈하는 일일게다. 실제로도 그런 '순수한'경제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파레토 최적이니 이런게 실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은, 모든걸 시장에 맡겨야 하기에 노동시장도 '완전개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임은, 다른 누구보다 경제학자들과 관료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경제학은 수익성이 맞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을 실업의 구덩이로 몰아놓고, 혹은 제3세계 어린이들을 저임금과 장시간의 중노동 속에서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해놓고, 그것이 시장의 뜻입네 하는 식의, 그저 가진자의 좋은 핑계꺼리가 되고 말았다.(그런면에서 오늘의 고상한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도덕적 판단 기준조차 시장에 맡기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알고보면 불쌍한 영혼들인지도 모르겠다.)그럼, 시장이 신인가? 이것이 신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극복해 내어야할 신이 아닐까? 안되면 되게하라는 식의 구호는 사회적 약자를 탄압하는 곳이 아닌 이런 곳에 써먹으라고 있는 멘트이다.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기 보다는 오늘의 삶이 피폐해진 이유를 변명하는 데에나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이러한 오늘의 경제학 속에서는, 사실상 어떤 한 순간에라도 '경제가 좋아졌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저 한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경제학을 극복해 내고 새로운 경제학에 대한 논의를 해 나아가는 것은 기존 경제학의 '신화'가 너무도 강고하기에 쉬운 일은 아닐게다. 아마 저자가 오래전 철학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경제학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한 것은 그 새로운 논의를 위한 시작지점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 시작지점을 만들기 위한 저자의 이러한 '희생타'는 매우 멋졌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제 문제는, 저자의 그 멋진 희생타를 기초로 삼아 새로이 경제를 이야기 해 나가야 할 우리 모두의 노력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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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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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목가적(?)으로 보이는 책의 제목은 독자로 하여금 태국이나 인도쪽 동화책이 아닌가 싶은 첫인상을 갖게 만들지만, 이 책의 부제-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에서 쉽게 알 수 있듯 본서는 다소 정파적인, 그러면서도 건질 것이 무궁무진한 정치서적 되겠다.(참고로 '코끼리'는 미국 공화당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책의 저자는 촘스키와 함께 언어학계의 양대 거두로 불리울 정도로 그쪽 학계에서는 원래부터 유명했던 분이라고 하며, 이 책과 일전에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는 '도덕의 정치'(그 책에서는 저자가 레이'커'프로 표기되어 있다-_-;;;;)의 성공으로 이제는 언어학계 뿐만 아닌, 미국 사회 전반에서 꽤나 유명인사가 되었다고 한다.

책의 문제의식은 소개글-왜 평범한 서민들은 부자와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정당에 투표할까?-에 나와있듯 비교적 명확하다. 사실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한 연구가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가 좌파적 입장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수준을 뛰어넘은 차원에서 전개되어 왔다면 이 책에서는 리버럴의 입장에서 지극히 정파적으로 선거민주주의(?)적 차원의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는 점,(아마도 미국은 유럽과 달리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좌파정당이 없기에 그런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아울러 기존의 연구는 문화사회학적, 혹은 심리학적 측면에서 이루어져 온 데 비해 본서는 언어학과 인지과학의 측면(물론 언어학이니 인지과학이니 개인적으론 문외한이지만, 암튼 책 소개에서 그렇댄다)에서 문제의 해법을 찾는다는 점에서 우리가 알아왔던 연구들과는 그 궤를 크게 달리하고 있기도 하다. 암튼, 책의 결론은 단 한문장으로 축약된다. '문제는 프레임이다.'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투표를 할때 경제적 이익이나 진리에 따라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도 않으며, 마케팅적 사고(즉, 구매자인 유권자의 구미에 잘 맞춘 공약을 제시하면 표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로 선거운동에 접근하면 패하기 딱 좋다는 것이다. 저자는 외려 사람들이 투표할때는 자신의 가치관에 맞춰 투표를 한다고 주장한다.(개인적인 생각을 말하라면, '맞는것 같다.' 이런저런 어이없는 사건들과 그 당의 지울수없는 역사적?, 존재론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지지율 고공비행을 멈추지않고 있는 우리나라의 모당만 봐도 말이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프레임을 형성하고, 이 프레임에 맞지 않는 사실들은 전부 튀겨낸다. 때문에 '프레임에 맞지 않는 진실은 보여줘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예를 들어 이런거다. 요즘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중에 '세금 폭탄'이란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논의를 전개할 때 세금폭탄이냐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한다면 이미 세금을 '폭탄'으로 설정해 버린 프레임에 들어가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도 대처리즘의 신화에 푸욱 빠져있는 상대를 설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애초 '세금폭탄'이라는 프레임을 해체하고 우리가 세금의 의의, 납세의 필요성 등등을 이야기하는 등으로 '우리의 프레임'을 만든 후 증세나 감세에 대해 논의를 하는 것이 상대를 설득하는 첫걸음이라고 책은 제시한다.

아울러 '엄격한 아버지'모델과 '자상한 부모'모델을 제시하는데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이 양 측면이 모두 있으며 그때그때 상황에따라 모델을 가동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집에서 엄청 가부장적인 시민운동가나 꼴통소리 듣는 보수주의자이지만 집에서는 한없이 탈권위적인 가장을 상정해볼수도 있겠다.(이런 경우들은 우리 주변에서 생각보다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내재된 이 두 모델 중 '자상한 부모'모델을 어떻게 정치적인 측면에서 발휘시키느냐, 이를 발휘시키기 위한 프레임을 어떻게 갖추어 논의를 전개시키느냐에 따라 선거에 있어서 진보세력의 승패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엄격한 아버지'나 '자상한 부모'모델이라는 명칭은 미국냄새가 많이 난다는 느낌은 들지만, 인간의 이중적 측면을 제시했다는 면에서 저자의 주장이 어느정도 보편성은 가지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뿐만 아니라 책은, 어떠한 프레임을 조성해서 어떤 논점 자체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지만 중요한 정책들에 영향을 미치는 '전략적 주도', 변화의 첫걸음을 통해 이후의 결과까지 계속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만드는 '미끄러운 비탈형 주도' 뭐 이런것도 제시하는데 흥미로웠다. 이렇게 쓰고보니 정치가 완전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사실, 실제로 우리 정치란게 많은 부분 말장난으로인해 좌우되는 경향이 없지 않긴하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프레임은 말장난이 아니라 '개념'을 바로 새우는 것이라고. 진실된 뜻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우리가 목표로 한 진보를 실행시키는 것이라고. 쓰고보니 저자의 말이 새로운 것도 아닌듯 싶다. 공자는 이미 정치를 '이름을 바로 붙히는 것'이라고 했다지?^^

물론 저자의 주장에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왜 서민들이 보수정당에 투표할까'에 대한 의문은 기본적으로 문화나 심리적 측면에서의 분석이 주가 되어야지, 이런식의 '프레임'을 통한 분석은 궁극적인 처방방이 될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중요한 것은 어떠한 물적 토대(?)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프레임'에 대한 저자의 지나친 강조는 일종의 프레임 '환원론'으로 빠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의문스러운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조건이 존재할 경우 결코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인지과학의 일종의 '법칙'이라면 어쨌거나 현존하는 보수세력의 프레임을 완전히 외면하여 새로운 프레임을 구성해 내는 것이 가능할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 저자가 제시한 소위 '대안적 프레임'이라는 것이 보수적 프레임을 얼마나 극복한 것인지? 암튼 저자도 프레임론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는지, '완고한 보수주의자를 개종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뿐만아니라 앞에서도 언급했듯, 아무래도 미국의 현실 정치상황에 대한 단기처방전 정도로 쓰여진 책이 된 터라 우리의 실정과 얼마나 부합하느냐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해방 후 우편향적 정치지형에서 대부분의 진보적 언술들이 빨간칠 되어진 우리의 상황에서 이러한 프레임의 해체와 형성이 얼마나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또, 대다수의 사람들이 '엄격한 아버지'모델과 '자상한 부모'모델을 둘 다 가지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도 다시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싶은데, 저자는 전자를 상징하는 드라마도, 후자를 상징하는 드라마도 특정성향을 띠는 사람 뿐 아닌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들었지만, 조금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 드라마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공감'을 얻었는지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기적인 측면에서 진보적 성취를 위해서는 저자의 처방이 결코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되며, 결과적으로 타인을 설득하려면 타인의 말을 그가 정해준 틀 내에서 방어하려고만 들지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물론,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단순한 '방어'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면, 정보를 취합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까지 필요할테니까) 누군가에게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입장을 상대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물론, 이 책에서 그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을테지만-한번쯤 읽을만한 책이다. 이런저런 예들을 들어 프레임에 관한 썰들을 제시하는 것도 흥미롭고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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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하룻밤의 지식여행 19
제프 콜린스 지음, 이수명 옮김 / 김영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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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상의 난해함도 그렇지만,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저서들이 대부분 오역으로 뒤범벅 되어있다는 점에서 꽤나 자자한 명성을 얻고 있는 데리다는, 그럼에도 철학, 사회학, 정치학, 문학등등등 적지않은 분야의 수많은 서적들이 그의 사상을 독자들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라 전제한 채 서술해나가고 있기에 평범한 독자들에게 있어선 또한 난감하기 이를데 없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 제대로 읽자니 부담스럽고 지나치자니 호기심을 참을수 없기도(?)해서 '하룻밤의 지식여행'시리즈에 나와있는 데리다를 읽게 되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생각보다 괜찮았다.

우선 김영사의 '하룻밤의 지식여행'시리즈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본다면, 이 시리즈는 영국 아이콘 북스에서 발행된 말랑말랑한 만화(?)형식의 철학/사상 입문서인데,(사실 이 책의 경우 만화형식이라고 하기에는 같은 시리즈의 다른 책들에 비해 텍스트가 지나치게 많은 감이 없지 않았다. 텍스트만 뽑아도 문고본 한권 분량은 거뜬히 될 듯) 실험적인 일러스트레이션과 갖가지 시각적 효과를 이용하여 간단 명확하게 인물의 사상이나 어떠한 학문 분과를 전달하고 있는 듯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전에 이 시리즈 중 다섯번째인'철학'과 여섯번째인 '사회학'을 서점에서 친구기다리면서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해치운적이 있는데, 그 책들 또한 나쁘지 않았다는점에서 일단 어느정도 신뢰할만한 시리즈라는 생각은 든다.(성급한 일반화의 오류?ㅋ 아울러 여담이다만 이런 책이 출판될 수 있는 영국 출판 시장이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책은 데리다가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을 때 벌어진 흥미로운 해프닝을 시작으로 그의 사상 및 개념들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정도의 입문서 한권 읽고 데리다 철학이 어떻네저떻네 하는 것이 얼마나 웃긴 일인지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그래도 무리해서(?) 그의 주된 작업이었던 해체에 대해 논하자면 책 서두에 소개된 수많은 설명들 중 하나만큼 진실에 근접하게 설명된 것이 없어보인다. '당신이 해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어떤 것'.

데리다의 해체작업은 솔직히 말하자면 '말장난'이었을런지도 모른다.(때문에 그의 명예박사수여에 대한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들의 반응 또한 이해못할바도 아니다.) 실제 데리다 자신도 그의 작업을 해체'놀이'라고 한다.(물론 개인적으론 뭐 이런 놀이가 다 있냐 싶긴하다-_-;;;) 아울러 책의 말미에 언급된대로, 정의를 하는 순간 미끄러지는 이 해체라는 개념이 윤리적, 실천적 함의를 갖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비해체적인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모순 또한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인 듯 싶다. 하지만, 모든 분류의 사이사이에 있는 '결정불가능한' 수많은 항들의 다발들을 이야기하여(사실 그것들마저도 곧 해체가 가능하다) 현대철학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던 그의 작업은 충분히 매혹적이었고 실제 상당한 의의를 지녔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세간의 말마따나 설령 '해체는 죽었'다 하더라도 해체 그 자체는 좀더 오래 존속하게 될 것 같다. 그가 열어젖힌 또다른 사유의 영역은-우리도 모르는 사이-이미 우리 모두의 사유의 영역에 들어왔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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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신광영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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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듯, 책은 E.P.톰슨의 고전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톰슨의 그 두터운 분량의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읽은 바 있는 강성호씨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 소개된 바에 따르자면 계급을 경제적 측면 뿐 아닌 문화적 측면에서의 형성과 쇠퇴를 고려하여(그리하여 톰슨은 이야기한다. '계급은 주어진 구조가 아닌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스탈린주의적 환원론의 한계를 벗어난 역작으로 알고 있고, 이 책 또한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에 있어 단순히 경제주의적 환원이 아닌 사회, 문화, 역사적 고찰을 해내고 있다.

사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야기함에 있어 노동계급에 대한 분석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물론 질좋은 노동력과 세계 최장시간을 자랑했던 노동강도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한국사회의 노동부문을 '수동적'으로만 파악할 뿐 능동적인 경제주체로는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바 없다. 그도 그럴것이 동양사회는 오랜 유교문화의 전통으로 인해 가부장주의의 규정력이 상당히 강한 공간이었고,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저 열심히 일하는 공돌이 공순이 정도로 치부되어 그들의 구체적인 경험 자체가 학술적 고려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점도 있긴 했다. 하지만 분명 한국의 노동자들은 다른 동아시아 문명권의 국가들에 비해 자신의 노동조건에 대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반응했으며 대만이나 싱가폴을 제외하자면 제3세계 국가들보다 양호한 소득분배구조 속에서도 자신의 계급정체성을 서서히 확립해갔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고찰하기 위해 노동자의 경험과 사회 정치적 현상을 굉장히 합리적이고 균형감각있게 설명하고 논증해낸다.

책을 찬찬히 읽다보면 정말이지 우리나라에 있어서 노동'계급'이 이만큼이라도 형성되었다는 것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초 서양처럼 장인의 전통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고, 외려 한국전쟁으로 인해 과거 독립운동의 자랑스런 기억까지도 지워야 했던 노동계급은, 국가의 여러 법적 제도적 물리적 장치로 인해 조직행위가 불가능했었고(따지고보면 우리사회에 어용노조가 아닌 자주적 노조로서 민주노조가 '합법적으로' 인정된게 10년이 채 안된다), 아울러 사회 전반에 깊게 뿌리박혀있는 가부장주의와 유교윤리의 전통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부끄러워하고 계급으로부터 이탈하려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유에는 물론 경제적인 불평등도 있었지만, 그보다 우선적인 것은 사회로부터의 '비인간적 대우'때문이었다. 수많은 노사분규의 방점이 애초 임금의 대폭인상보다는 숨막히는 노동조건과 비인간적 처우에 대한 반발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이 그 증명이다.(파업에 임한 87년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에는 세상에나 '두발자유'혹은 '아침체조 중지'도 들어가있다.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 그들은 한편에선 산업역군으로 미화되었지만, 현장에서는 공돌이 공순이로 천시받으며(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비인간적인 처우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조차 힘들었던 그들은 초기에 교회나 사회단체에 손을 벌렸고, 학생들과 사회 전반의 '민중문화'의 도움을 받았지만, 87년 이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물론 오늘날에 와서 소위 '선진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소수를 대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안락함을 쫓고 소극적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르겠다.(자본가만 그러란 법있나?) 하지만 산별노조로의 전환조차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계급은 그 격렬한 투쟁성과 전투성에 비해 여전히 조직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취약할 따름일 뿐만아니라, 사회운동 노조주의로의 발전조차 되지 못해 스스로를 대변할 '유의미한' 정당이나 지역조직조차 만들지 못한 노동계급에게는 아직도 많은 숙제가 남겨져 있다. 위르겐 코카는 '계급은 항상 진화하거나 퇴화하는 과정에 있다'고 했다지만, 과연 지금이 노동계급에게 '안녕을 고해야 할 때일까?' 어쩌면 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은 진화하느냐 퇴화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노동계급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건간에 그들이 한국사회를 좀더 풍요롭고 정의롭게, 그리고 민주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그들의 역할이 오래 기억되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특별히 개인적으로는 초기의 노동운동을 이끌어간 주체로서 여성노동자들을 언급하던 부분과 초기 노동운동과 87년 이후의 노동운동을 비교 설명하는 부분, 학생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부분은 그 분석 자체도 매우 흥미로웠고, 뿐만아니라 가슴 뭉클했다. 아울러 지금의 노사관계가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 노사간에 신뢰도가 극도로 낮을 뿐 아니라 상황을 보는 시각자체가 다른 점의 이유가 무엇인지 그 단초를 어느정도는 살짝 알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이 책의 내용이 자신의 기록이고 경험이기에 그닥 새로워 보이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올해의 책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 책을 꼽게 될 것 같다. 읽어보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정말이지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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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문화
배리 글래스너 지음, 연진희 옮김 / 부광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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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미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도 출연한바 있는 배리 글레스너씨의 책이다. 본서는 미국에서 '가장 듬직한 사회학 서적'으로 꼽히며 그 해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지만, 책을 본 나의 느낌으로써는 미국에서 출간되는 사회학 서적의 고질적인 난점-이전에 황광우씨가 그의 책 '레즈를 위하여'에서 지적한바대로 '사상의 빈곤, 내용의 과다'-을 본것같아서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저자가 '공포 행상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언론일수도 있고 정부관료일수도 있으며 학자일수도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말장난과 통계장난 혹은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는 방법등으로 대중들에게 공포를 '판매'한다. 그들이 이렇게 공포를 판매하는 이유는 세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는데, 1)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의 흐름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2)돈을 벌기 위해 3)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고 책이 루즈벨트가 말한바대로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것은 공포 그 자체'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는 것에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 그리하여 정작 공포를 느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부분이 가려지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미국의 사례들을 들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PC'라는 딱지를 붙혀 진보정치에 대해 조건반사적인 공포감을 조성한다는 사례나, 범죄자에 대한 일벌백계식의 센세이셔널한 보도만을 일삼으면서도 정작 범죄의 핵심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빈곤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오히려 복지 예산을 삭감할 생각만 하고있는) 정치세력이나 기업의 이야기를 보며, 이것이 과연 미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긴가 싶을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책이 명확한 주제의식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예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은-물론 이게 어느정도는 이 책의 장점일 수도 있겠지만-본서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보인다. 책에는 대부분 미국에서 센세이셔널하게 다뤄진 일화들이 수록되어 있어 미국독자들이 보기에는 흥미롭기도 하고 반성도 되겠지만 한반도에 사는 우리로서는 대다수의 예들이 그저 남의 나라 일처럼 보일 따름이다.(물론 언론의 작동방식은 우리나 그들이나 정도의 차이일 뿐 그닥 다를껀 없기에 이런저런 생각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정도 문제를 알기위해 과연 우리가 이렇게 많은 예들을 읽어봐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고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다면,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되시는 분들께는 일독을 권한다만, 책의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생각한다면 본서보다는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을 추천하고 싶다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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