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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신광영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평점 :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듯, 책은 E.P.톰슨의 고전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톰슨의 그 두터운 분량의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읽은 바 있는 강성호씨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 소개된 바에 따르자면 계급을 경제적 측면 뿐 아닌 문화적 측면에서의 형성과 쇠퇴를 고려하여(그리하여 톰슨은 이야기한다. '계급은 주어진 구조가 아닌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스탈린주의적 환원론의 한계를 벗어난 역작으로 알고 있고, 이 책 또한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에 있어 단순히 경제주의적 환원이 아닌 사회, 문화, 역사적 고찰을 해내고 있다.
사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야기함에 있어 노동계급에 대한 분석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물론 질좋은 노동력과 세계 최장시간을 자랑했던 노동강도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한국사회의 노동부문을 '수동적'으로만 파악할 뿐 능동적인 경제주체로는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바 없다. 그도 그럴것이 동양사회는 오랜 유교문화의 전통으로 인해 가부장주의의 규정력이 상당히 강한 공간이었고,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저 열심히 일하는 공돌이 공순이 정도로 치부되어 그들의 구체적인 경험 자체가 학술적 고려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점도 있긴 했다. 하지만 분명 한국의 노동자들은 다른 동아시아 문명권의 국가들에 비해 자신의 노동조건에 대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반응했으며 대만이나 싱가폴을 제외하자면 제3세계 국가들보다 양호한 소득분배구조 속에서도 자신의 계급정체성을 서서히 확립해갔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고찰하기 위해 노동자의 경험과 사회 정치적 현상을 굉장히 합리적이고 균형감각있게 설명하고 논증해낸다.
책을 찬찬히 읽다보면 정말이지 우리나라에 있어서 노동'계급'이 이만큼이라도 형성되었다는 것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초 서양처럼 장인의 전통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고, 외려 한국전쟁으로 인해 과거 독립운동의 자랑스런 기억까지도 지워야 했던 노동계급은, 국가의 여러 법적 제도적 물리적 장치로 인해 조직행위가 불가능했었고(따지고보면 우리사회에 어용노조가 아닌 자주적 노조로서 민주노조가 '합법적으로' 인정된게 10년이 채 안된다), 아울러 사회 전반에 깊게 뿌리박혀있는 가부장주의와 유교윤리의 전통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부끄러워하고 계급으로부터 이탈하려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유에는 물론 경제적인 불평등도 있었지만, 그보다 우선적인 것은 사회로부터의 '비인간적 대우'때문이었다. 수많은 노사분규의 방점이 애초 임금의 대폭인상보다는 숨막히는 노동조건과 비인간적 처우에 대한 반발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이 그 증명이다.(파업에 임한 87년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에는 세상에나 '두발자유'혹은 '아침체조 중지'도 들어가있다.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 그들은 한편에선 산업역군으로 미화되었지만, 현장에서는 공돌이 공순이로 천시받으며(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비인간적인 처우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조차 힘들었던 그들은 초기에 교회나 사회단체에 손을 벌렸고, 학생들과 사회 전반의 '민중문화'의 도움을 받았지만, 87년 이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물론 오늘날에 와서 소위 '선진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소수를 대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안락함을 쫓고 소극적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르겠다.(자본가만 그러란 법있나?) 하지만 산별노조로의 전환조차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계급은 그 격렬한 투쟁성과 전투성에 비해 여전히 조직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취약할 따름일 뿐만아니라, 사회운동 노조주의로의 발전조차 되지 못해 스스로를 대변할 '유의미한' 정당이나 지역조직조차 만들지 못한 노동계급에게는 아직도 많은 숙제가 남겨져 있다. 위르겐 코카는 '계급은 항상 진화하거나 퇴화하는 과정에 있다'고 했다지만, 과연 지금이 노동계급에게 '안녕을 고해야 할 때일까?' 어쩌면 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은 진화하느냐 퇴화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노동계급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건간에 그들이 한국사회를 좀더 풍요롭고 정의롭게, 그리고 민주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그들의 역할이 오래 기억되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특별히 개인적으로는 초기의 노동운동을 이끌어간 주체로서 여성노동자들을 언급하던 부분과 초기 노동운동과 87년 이후의 노동운동을 비교 설명하는 부분, 학생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부분은 그 분석 자체도 매우 흥미로웠고, 뿐만아니라 가슴 뭉클했다. 아울러 지금의 노사관계가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 노사간에 신뢰도가 극도로 낮을 뿐 아니라 상황을 보는 시각자체가 다른 점의 이유가 무엇인지 그 단초를 어느정도는 살짝 알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이 책의 내용이 자신의 기록이고 경험이기에 그닥 새로워 보이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올해의 책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 책을 꼽게 될 것 같다. 읽어보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정말이지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