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 오랜만에 PD수첩을 봤다. 수 년에 걸친 치졸한 탄압을 지켜보면서 결국 피디수첩에 관심을 꺼버렸지만, 우연히 <벼랑에 선 사람들, 주거취약자>라는 부제가 눈에 띄어 보게 됐다. <안철수의 생각> 대담자로 잘 알려진 제정임 교수와 단비뉴스취재팀의 책 <벼랑에 선 사람들>을 읽은 후였고, 그 처절한 기록이 아직도 머리에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피디수첩이 그 서러움을 어떻게 영상에 담아낼지 궁금했다. 시용PD, 시용기자라고 비하되는 이면에 그래도 조금쯤 다른 모습이 있지 않을까 기대도 잠깐.
일단 제목과 아이템을 그대로 갖다 쓰고 있었으므로 이 책에 관해 한 번이라도 언급이 나올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책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주거 불안정에 관한 기사는 뉴스에도 많이 나오는 거고 사회비판적인 보도프로그램 성격상 사회과학 책과 아이템이 겹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제목까지 저렇게 똑같이 쓰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을까? 실제 시사 프로를 제작하는 현장에서 이런 문제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만화방 숙식"을 체험하고 쪽방과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면서 주거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아픔을 깊이 있게 담아낸 이 책의 저자들이 방송을 봤다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더라도 방송 자체로 내용이 좋았다면 이런 사소한(?) 트집같은 건 잡을 마음이 생기지도 않았을텐데. 많이 부실하더라. 국가의 주거정책에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도,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하다못해 힘든 사람들의 사정과 입장을 진지하게 알아보려 노력하는 것도 아닌, 그냥 "이 사람들 참 불쌍하다" 였다. 선진국의 사례와 전문가의 의견을 토대로 실천가능한 해법을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에 비해, 최대한 비참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 이외에 어떤 지점에서 그들의 철학이나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방송이었다.
<벼랑에 선 사람들>이라는 책이 훌륭한 이유는, 소외계층의 현실을 가감없이 전달하면서 그들의 삶이 그토록 내려갈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냉정하게 지적하고 그를 위한 해결책까지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도 우리처럼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허약한 사회안전망 안에서는 누구나 이렇게 하루아침에 삶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공감과 비판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참 좋은 책이었다. 취재 대상이 곧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과 취재 대상은 말 그대로 취재 대상일 뿐이라는 거리를 두고 만들어진 방송은 그대로 수준의 차이를 보여줬다.
MBC 사태의 본질을 잘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척하며 언론 탄압의 빈 자리를 꿰찬 자들에게 무슨 언론인의 소명과 자질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애초부터 권력의 충복이 될 것임을 직간접적으로 맹세하고 들어간 자리에서 권력감시역할을 할 리도 만무하지만, 뻔한 민생르포를 특집처럼 내놓으면서 그나마도 이렇게 아무런 방향성 없는 방송이라니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예전같은 대담한 주제나 심층적인 보도를 기대하지도 않았으나 저렇게 남의 것을 도용하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뒷북 겉핥기 방송을 만들 줄이야. 국가나 권력이 불편해하는 영역에는 그 근처도 얼씬거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확고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비판정신이 사라진 저널리즘... 소망교회를 취재하다가 전출된 최승호 피디가 본다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날 것 같다. 화면에 크게 박힌 PD수첩이라는 글자가 마치 남의 나라 언어인 양 낯설게 느껴졌다..
작년 1월 17일 이후 붕 떠버린 시간을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가슴이 신산해진다. 광우병 보도를 시작으로 잔인하게 짓밟히며 그토록 긴 암흑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진실이라는 든든한 빽.. 뿐만 아니라 정권교체라는 절대당위성과 확신에 있었을 텐데 ㅜㅜ 앞으로의 시간을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견뎌낼 지 내가 다 막막 ㅜㅜㅜㅜ
20주년 기념으로 출판된 인터뷰집을 읽으며 한없이 존경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며 외부 압박이며 심지어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회 곳곳을 그토록 끈질기게 파헤치고 다니는지... 일상이 처절하게 너덜거릴지언정 스스로에게 사명을 부여하고 양심을 지켜가는 삶은 아름답다. 제 역할에 열심이었다고 오히려 핍박을 당하는 뒤틀린 세상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은 이들(중 일부는 '변절'하기도 했으나)을 보며 이 사회와 그 안에 속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도 된다. 기자도 아니고 피디도 아니지만 그냥 한 시민으로서의 시선, 삶의 방향도 다시 한 번 다잡게 된다.
재작년에 이사를 하면서 책 책 책 책에 너무 진저리가 나서(이사업체에 책은 손대지 말아달라 한 건 나였지만ㅜ) 이제는 읽은 후 웬만해선 중고샵에 팔아버리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간직하고 있는 책 중의 한 권이다. 또 이사를 하게 되더라도 기꺼이 이고 지고 다니면서 곁에 늘 두고 싶은 책.
이 책을 읽던 즈음에 20주년 특집방송도 했었다. 촛불집회, 용산, 미네르바와 함께 PD수첩 그 자신이 탄압의 대표상품이었던 지난 5년. 그 때 MB정권 몇 년이나 남았네, 이제 몇 년만 참으면 되네 했던 말들이 귓가에서 부서진다. 하. 내 30대가 고스란히 이명박근혜로 점철되어버리다니 ㅜ 여차하면 그냥 신경끄고 밥벌이 일상으로 돌아가도 그만인 소시민의 심정이 이런데, 사회정의를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언론의 역할을 박탈당하는 동시에 유치한 밥벌이위협까지 받는 당사자들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할까.
먼 훗날, 또 몇 주년의 특집에서는,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시절의 이야기도 아프게 오고가겠지. 다시 또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해결책"일지 모를 5년을 보내게 되었지만, 변함없이 언론인의 자리를 지키며 제 역할을 하는 것 이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역시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잊지 않는 것 이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뉴스타파 등 대안언론의 외연이 조금씩 확장되고 있고, 국민TV 창설을 위한 논의도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다. 하나하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꼼꼼하게 하는 것이 18대의 비극을 저지하고 19대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길이라고, 다시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괜히 비장해지는 마음에 웃음이 나고 한숨이 난다. 하... 무슨 이런 다짐같은 걸 해야하는 상황이라니. 안철수와 문재인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던 때가 불과 몇 달 전인데. 세상에, 안 철 수 도 있고 문 재 인 도 있었는데. 안철수가 사퇴하던 때 충분히 절망했던 나로선 선거결과에 남들만큼 심한 멘붕을 겪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가끔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꿈일 리가 없어서 더 잔인한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