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도 그렇고 또 청춘 특강인가 싶어서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 저자 면면이 그냥 넘겨버릴 분들이 아니라서 주문하고 보니... 잘못 생각했던 거구나. 청춘은 웬 청춘. 특강의 첫 주자인 김진숙부터 피와 땀이 철철 흐르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크레인에서 309일을 버텨낸 기적이 나는 아직도 남의 일같고 낯설다. 그 기간 동안의 수많은 기사와 사진을 접하면서 가슴으로 눈물 한 번 흘려본 적이 있었나 되돌아보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사를 눈으로만 읽고 말은 입으로만 했다. 목숨을 이어가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그 1년여의 기간이 그녀에게, 그녀의 동료들에게, 또 이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슴 깊숙한 곳은 흔들림없이 무지했고 입으로만 뻔한 단어들을 주워섬겼다.

 

내가 사는 부산의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났던 작은 전쟁. 나는 그 때 편안한 내 방에서 모니터로 기사를 보고 마우스나 깔딱거리며 얄팍한 위로와 응원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그녀의 이야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고 해서 그 시간들의 절박함을 감히 이해한다고 할 수가 없다. 살아서 내려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가던 상황이 담담하게 이어질수록, 깃털보다 가벼웠던 내 '지지'가 수치스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메마르고도 뜨거운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녀의 토로에 가슴이 아프게 뛰었다. 그리고 이 말이 머리를 쾅. 쳤다.

 

1월 6일에 크레인에를 올라가는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춥단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새벽 3시에. 6시에나 올라갈걸, 그럼 세 시간은 덜 추웠을 것 아니에요.(웃음) 그 때는 무슨 대의명분, 이런 것 없었어요. 2003년도에 그 일 있고 나서 크레인을 어찌나 단도리를 해놓았는지, 자물통을 큼지막한 걸 매달아 놓고 쇠사슬을 몇 겹 둘러놓은 거에요. 그걸 자른다고 한 시간을 씨름하다가 올라갔는데요. 계단으로 사수대들이 있던 중간 지점을 지나서, 제가 있던 공간까지 올라가려면 원통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통이 20미터 높이에요. 그런데 거기는 깜깜절벽이거든요. 크레인의 동력선 자체가 끊어져 있으니까요. 사다리도 없어요. 철근 하나 끼워놨는데, 거기 올라가는 게 엄청 힘들어요. 안나푸르나를 타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그녀가 올랐던 CT-85호 크레인은 동지 김주익이 2003년 10월 정리해고에 항의하는 농성을 129일간이나 벌이다가 결국 목을 매 자살했던 그 크레인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죽음을 투쟁의 수단으로 삼던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의 문재인은 청와대의 모든 일을 정리하고 나와서 제2의 인생을 즐기기위해 안나푸르나로 트레킹을 떠났다.

 

2011년이 시작되던 겨울, 살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던 노동자도 트레킹을 떠났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를 35미터 상공으로. 삶이 휘청이다 그대로 스러져버린 동지들을 보내놓고, 웃는 것도 죄고 등 따순 것도 죄라서 한겨울에도 냉방에서 자고 찬물로 머리를 감았다는 김진숙. 밧줄 하나에 의지해 저 동굴같은 원통을 오르던 그녀에게 안나푸르나가 떠오른 것은,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김주익의 죽음과 그녀에게 곧 닥칠 지도 모를 죽음을 관통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재인은 참여정부의 실책을 잘 알기에 더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솔직히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지지하는 분이긴 하지만, 그 뼈아픈 후회를 얼마나 극복할 수 있겠느냐에 관해서는 아직은 회의적이다. 예전에 <운명> 북콘서트에서 하셨던 말씀도 불현듯 떠오른다. 경제정책 실패를 아프게 인정하고 노동문제를 소홀히 다뤘던 부분에 통감하면서도, "노동자들이 노무현은 다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너무 한꺼번에 많은 요구사항들을 들고 나왔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그거 받아달라고 하는 것이 잘못이었을까? 또, 받아주면 안 될 일이었을까? 나라가 망합니까?...

 

한때는 노동자들의 든든한 빽이었던 노무현. 한창 노동운동의 변호인으로 활약하던 시절, 김진숙이 수감되었을 때 면회를 와서는 재판 이야기는 안 하고 시시콜콜한 수다만 한 시간 동안이나 늘어놓는 것이 의아해 "대체 왜 오신 거냐"고 묻자 "진숙씨 수감생활 지루할까봐 놀아줄라고 왔지요" 라고 했다던 노무현. 그러던 노무현이 정치계로 떠나고 노동운동을 하던 '똑똑한' 사람들도 다 정치하러 가면서 노동자들은 외롭고 잔인한 섬으로 남았다. 살기 위해 싸우다 죽어나가는 동지들을 보면서 "시대가 변했다"는 대통령 노무현의 말을 들어야 했다. "당신들이 좀 너무했다"는 유력 대선 후보 문재인의 말도 들어야 했다. 눈 앞에서 여전히 동지들이 일자리를 잃고, 생활을 잃고, 가족을 잃고, 삶 전체를 잃어버리고 있는데, 어떻게 시대가 변한 것이며 우리가 너무한 것인가. 당신이 휴식 차 떠났던 안나푸르나보다 더 힘든 크레인을 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당장 살고 있는 현실인데.

 

김진숙의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정리해고는 살인이다, 라는 처절한 문장을 그저 늘 그렇게 심각한 사회문제의 하나로만 보아왔던 시간들이 사정없이 너덜거렸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일일 체험을 했던 문재인의 사진이 떠올랐다. 편의점에 잠깐 서있으면서 그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기업 본사와 점주와의 계약이 얼마나 불공정한지, 그 불공정계약으로 인한 손해를 결국엔 아르바이트생이 처참한 시급으로 부담하고 있는 약자착취 구조에 대해 관심이라도 갖게 되었을까? 개혁의지가 샘솟았을까? 최저임금 보장, 비정규직 철폐 따위의 추상적인 구호를 위한 형식적이고 일시적인 이벤트에 불과한 건 아니었을까.

 

올해 대선의 주인공이 누가 되든 실제 노동자들의 삶을 철저하게 한 번 들여다보시기를 바란다. 한걸음 물러선 자리에 앉아 머리로만 구상하지 말고 최소한 김진숙과 한번쯤 대화를 나눠보셨으면 좋겠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피고 땀인 그녀의 삶을 듣다 보면, 당신들이 평생 글자로만 습득했던 지식이 얼마나 허울뿐인 것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고 알바 체험따위 백 번 천 번 해도 알 수 없는 진짜 "사람이 먼저"라는 것이 무엇인지 뼛속까지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경영이라는 이름으로 사적인 부의 증대를 위해 숫자놀음이나 하며 피와 땀을 우습게 아는 자들의 징징거림에 속아넘어가는 "또 한 명의 바보"가 되지는 말기를... 다시는 노동자들이 안나푸르나보다 힘든 크레인을 타는 일이 없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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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07-2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건조기후님. 이렇게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해요.

박근혜와 차별화하려고 남성성을 내세우는 것도, 이해가 아닌 체험으로 그치는 것도 좀 아쉽네요.

건조기후 2012-07-22 21:19   좋아요 0 | URL
안나푸르나 라고 하는 순간 등골이 뻣뻣해지더라고요.. 무식하다고 고백하는 부끄러운 글이에요.

남성성을 내세운다고 하시는 것은 특전사 시절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와서 그런가 싶은데요 (혹시 다른 일이 있었나요?) 저는 그런 점은 의식하지 못 했고요.. 우리나라 고위공직자들이 워낙에 아들들까지 신의 아들이 많아서 차별화라면 그런 부분에서 차별화되는 거 같아요.

인간적으로 굉장히 훌륭하신 분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민주당도 그렇고 여러모로 못 미덥긴 해요. 지금이야 또 다른 훌륭한 대'안'이 있으니 다행이다 생각하고요. 어떻게 될 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요..

Arch 2012-07-24 09:38   좋아요 0 | URL
댓글 달면서 '한줄만 쓸걸' 했어요. 뒷부분은 건조기후님 글을 읽다 생각난거지만 앞 구절의 '남성성' 부분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쓴거라서요. 건조기후님이 짚은 부분이 맞아요. 남성성을 내세웠다기보다는 특전사 시절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온 부분을 언급하려고 했던거였어요.

건조기후 2012-07-25 13:57   좋아요 0 | URL
저는 여러가지 군사행정이 비합리적인 게 많고 군대문화라는 것도 좀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부분이 많아 혐오스럽긴 하지만 국방력 자체는 강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군대에서 적응 잘 하는 남자들 능력있는 군인들 멋있더라고요. ㅎ 제 바람 중의 하나가 민족주의적 사고로 무장하고 문무를 겸비한 제대로 된 군인 한 번 보는 거에요. ㅎㅎ 어딘가에 있긴 있겠죠?

스스로 남자답다고 내세울 거라곤 군대 갔다온 것 밖에 없는 저질 마초들은 답이 없지만요 ; 병역의무가 있는 나라에 태어나 젊은 시절 희생해가며 충실하게 수행한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는 것같아요.. (아치님께서 그랬다는 뜻은 아닌데 말이 좀 엉뚱하게 흘렀네요;;)

아그리젠토 2012-09-19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대'안'에도 회의적...안철수씨가 과연 노동자에 관한 발언이나 액션이 있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