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이야기, 그냥 지금 떠오르는 것만요.
* 출판사나 편집자는 어떤 책을 내게 되면, '다음에는 이 책을 뛰어넘는 책을 내야지'라는 자기 검열 기준을 갖게 됩니다. 쑤퉁 책을 읽은 분들이 "왜 아고라에서 중국 소설이 더 안 나오죠?"라고 물었을 때, 저희가 "쑤퉁보다 더 좋은 중국 작가, <쌀>이나 <나, 제왕의 생애>보다 더 좋은 작품을 찾아야 할 텐데, 아직 못 찾았습니다"라고 대답한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호응이 좋은 편인 책이 있을 때 그 쪽으로 재빨리 리스트업을 하면 조금 더 손쉽게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보다는 한 권의 책이 출간되어야 할 이유와 책 만드는 사람의 자존감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저희가 생각하기에 <신데렐라>는 소설의 가치와 기능, 완성도 모두에서 최고점에 있는 작품입니다. 이 책 때문에 눈이 너무 높아져서리 앞으론 저희 출판사에서 소설을 많이 내지 못할지도 모르겠어요.
* 저희 출판사는 분량 많은 책을 낼 때가 자주 있는지라 그때마다 '어떻게 하면 보다 가볍고, 보다 얇은 책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가 늘 고민입니다. 그래서 인쇄 넘기기 직전까지 여백을 2~3mm 줄이면 글자가 몇 글자나 더 들어갈지, 한 페이지당 들어가는 줄 수를 늘리는 게 좋을지 어떨지를 고민할 때가 많아요. 저희가 아는 어떤 출판사는 책이 200쪽도 안 나와 고민일 때가 많다고, 300쪽 넘을 땐 아주 기쁘다고 하던데 저희랑 완전히 반대지요?
암튼 너무 빡빡하지 않은 선에서 최대한 글자를 넣었는데도, 이번 책도 600쪽이 넘더라고요. 많은 출판사들이 분량 많은 책들은 E-light지를 사용할 때가 많은데, 사실 이라이트지는 몇 가지 단점이 있어요. 조금 시간이 지나면 누렇게 변하고, 습기도 먹는 편이고. 그 부분에 불만을 갖고 계신 독자들도 있고, 출판사 입장에선 창고에 있던 책인데 본문 종이가 누래져서 아까운 책을 버려야 할 때도 있어요. 그래서 이라이트지보다 좋은 종이 찾아 삼만 리를 했건만, 결국 못 찾았어요. 이라이트지와 무거운 모조지(이라이트지는 대개 70~75g이 사용되고, 모조지는 80g이 사용되거든요. 책으로 나오면 무게 차이가 굉장히 큽니다. 모조지 70g도 생각해봤는데, 그건 얇아서 글자가 뒷장에 다 비쳐요.)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이번에도 이라이트지를 썼습니다. 혹시 가볍고 색깔 안 변하는 기적의 종이가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시걸랑 아고라에 제보해주세요.
* 처음에 했던 얘기로 돌아가서, 누군가가 물어보신다면 "<신데렐라>가 바로 아고라가 소설을 통해 추구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이 책, 아고라의 완소 책입니다. 그런데 아마 읽기에 쉽지도 않고, 많이 불편하실 거예요. 책 뒤표지에 적혀 있는 카피 중에 "우리의 계급, 욕망, 미래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이 책은 아름답고 희망적인 얘기를 들려주지도 않고요. 독자들이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 또는 대상화할 수 있는 주인공을 만들어서 독자가 편하게 '구경꾼'의 입장에만 머무를 수 있게 해주지도 않습니다. 대신 이 책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아주 팍팍한 세상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요. 끊임없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환기시키고, 로열 클래스가 아닌 우리 자신의 비루함과 곤궁함을 일깨웁니다. 그리고 간간이 '이래도 그냥 숨죽여 살 거야? 계속 이렇게 살 거냐고' 쿡쿡 찌르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아름답다고 믿고 싶은 분, 또는 세상이 엿 같단 건 알지만 거기에 대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분은 이 책을 안 읽으시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고단한 삶을 살고 있긴 하지만 진취적으로 살고 있는 분, 지금의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분, 문학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가 현실을 들여다보고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라면 이 책을 통해 아주 많은 것을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쌀>이나 <거짓된 진실>, <사토장이의 딸>,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 같은 책 냈을 때도 "아고라는 왜 이렇게 추악한 얘기만 끄집어내는 거지? 뭐야? 사는 게 그렇게 불만이야?"라고 말씀하셨던 분들이 많은데요. 그 점에서 이 책 역시 같은 부류지요. ^^ 음, 제가 지금 만들고 있는 소설은 주인공이 곰돌이 인형인데요. 곰돌이 인형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귀엽게 행동하지를 못 하는군요. 원서의 주요 카피 중 하나가 "곰인형이 악마로 변할 때"입니다. 이게 아고라의 스따~일인가 보아요.
* 사실 이 책은 여러분을 훨씬 일찍 만났을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야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연유를 말씀드리자면요. 이 책이 프랑스에서 출간되었을 때, 반응이 굉장히 뜨거웠답니다. 팔리기도 많이 팔리고, 유수의 문학상들에도 노미네이트 되고. 그런 상황에서 저희도 야심차게 출간을 결정하고, 번역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죠. 번역 기간은 7개월. 그런데 번역하시는 분 스타일이 출판사와 자주 연락하는 걸 좋아하는 분이 아니었어요. '일단 번역이 끝날 때까지는 독립성을 유지하게 해달라. 소통이나 협의는 그후에.'를 원하는 그 분 의사를 존중해, 계약 후 중간에 한 번 정도만 연락을 주고받았지요. 그런데 원고 마감일이 되었을 무렵! 전화로도, 메일로도 연락이 되질 않는 거예요. 다른 출판사들에 연락을 해보니, M사, 또 다른 M사, 또 또 다른 M사, B사 등도(나중에 제가 알게 된 곳들로만 8군데 이상) 저희와 마찬가지 상황이더군요. 모 출판사 편집장님은 저랑 통화하면서 격분한 나머지 "I SSYANG"을 외치셨고, 어떤 편집장님은 "저희랑은 오랫동안 여러 권의 책을 함께 만들었는데, 그 분께 느끼는 인간적인 배신감이 정말 큽니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걸 알려드리면,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모 출판사 편집장님과 모 출판사 편집장님은 함께 집까지 찾아가보셨다고 하던데, 이미 이사를 간 지 오래였다고 하더군요. 저흰 고소를 할까도 생각했는데, 사람이 있는 곳을 모르니까 방법이 없더군요. 계약금 100만 원 떼어먹었다고 수배를 내릴 수는 없다더라고요. 이렇게까지 생각했던 건, 번역은 정말 잘하시는 분이었지만 나쁜 건 나쁜 거니까요. '혹시 사고라도 난 건 아니야?'라는 걱정은 솔직히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작업을 할 수 없을 만큼의 최대한의 계약을 해놓고, 모두 펑크를 내버렸으니 의도적인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어쨌든 7개월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후 행방을 찾느라 또 한두 달 날리고, 다시 다른 번역자를 섭외하고, 100만 원이랑 책 두 권도 잃고... 그런 후에야 이 책이 임자를 만날 수 있었어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 책이 자기를 바르게 옮겨주기 위해 무진 애를 써준 고마운 번역자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분량도 많고, 번역하기 까다로운 책을 정성껏 번역해주신 이혜정 님께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