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요즘 무슨 음악 듣고 계세요?
Hyde - Roentgen - Special Package For Korea
하이도 (Hyde)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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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c en ciel에서 벗어나 솔로 가수로서 낸 Hyde의 앨범은 그가 어떤 음악관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L'Arc en ciel 시절부터 주로 가사를 통해 표현되던 Hyde의 '심미주의'가 이 앨범에서 오롯이 그의 것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음악관에 따라 만들어진 Hyde의 솔로 앨범 Roentgen. 이 앨범은 노래 하나하나를 모아놓았다기보다는 각각의 수록곡이 마치 길고 아름다운 서사시의 작은 부분인 것처럼 들린다. 그만큼 분명하고 일관된 분위기로 이 앨범은 전개된다.


1번 트랙인 Unexpected는 그 긴 서사시의 프롤로그 역할을 한다. 끝도 없을 듯 반복되는 가사는 그 단조로움 속에서 오히려 무언가 암시를 주는 듯 하다. 귓가에 들릴 듯 말 듯한 비밀스러움이 특별히 강조되는 부분 없이 흘러가는 사운드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는 듯 해 듣는 이의 은근한 호기심을 끄는 곡이다.


바로 이어지는 White song은 이러한 은근함과 신비로움을 그대로 살려 아름다운 겨울밤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속삭이는 듯 신미스럽게 시작하는 곡은 중반에 들어오면서 탁 트인 듯, 넓은 스케일로 전환된다. 얼어붙었지만 차갑지 않고, 밤이지만 결코 어둡지 않은, 오로라가 내린 북극 밤을 연상시킨다. Unexpected의 예상치 못한 만남이 풍요로운 눈의 흰 빛 속에서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3번 트랙인 Evergreen에서는 왠지 모를 슬픔이 감지된다. Hyde의 저음과 어쿠스틱 기타에 실려 한없이 투명하고 순수한 노래지만, 오히려 그 비현실적인 순수와 망설이듯 절제된 멜로디에서 이유 모를 거리감이 느껴진다. 가장 아름다울 때 이별이 보이는 슬픔, 그 안타까움을 애써 숨기는 듯해서 괜히 눈물이 쏟아지는 노래다.


이어지는 Oasis에서는 분위기가 반전된다. 순식간에 배경은 뜨겁고 목마른 사막으로 바뀌어 있다. 결국 사랑을 잃기라도 한 것일까? 끝도 없이 메마른 열기 속에서 죽음의 신과 춤추는 이의 얼굴은 슬픔보다는 허탈한 절망이 스며들어 있을 듯하다.


5번 트랙인 A drop of colour에서는 이러한 절망이 그리움으로 바뀐 듯 보인다. 당신이 없는 이 시끄러운 도시 속에서 자신에게 끝없이 자문하고, 이 세상 많은 풍경들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모습에서는 안타까움이 엿보인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대로 안고 잠에 든 모습을 그렸을법한 Shallow sleep. 색소폰과 Hyde의 중저음이 돋보였던 A drop of colour와 달리 Shallow sleep은 나른하고 옅은 보컬, 세련된 팝 사운드로 달콤한 꿈속에서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다음 노래인 7번 트랙 New days down은 Shallow sleep의 나른함을 깨고 들어온다. 묵직한 사운드는 냉소적이고 공격적으로까지 들린다.


그러나 이어지는 Angel's tale은 다시 조용한 회상으로 빠진다. 과거를 돌이키게 하는 조용한 멜로디와 저음의 보컬은 '1년 전 겨울'이라는 단어와 애틋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드디어 이 긴 이야기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The cape of storm에서는 빠르고 드라마틱한 곡 전개가 눈에 띈다. 그리고 가장 고통스럽기도 하다. 이제 폭풍 속에서 헤매며 Angel's tale의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이라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연민이 느껴지기도 하고, 왠지 내 이야기 같이 느껴지기도 하는 곡이다.


그러나 이대로 끝은 아니다. 나는 이 앨범에서 가장 중요한 곡은 마지막 곡인 Srcret letters라고 생각한다. Hyde는 이 앨범의 에필로그에 해당되는 이 곡에서 자신이 진짜 심미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했다.

Secret letters에서는 바라보는 대상이 이제껏 그토록 그리워했던 '당신'으로 바뀐다. Evergreen의 그 5월의 장소에 그대로 남겨져 먼 창밖만 바라보는 당신.

과연 사랑하는 이의 아픔은 모르는 것일까?

아름다우면서도 이국적인 곡은 아름답게만 전개된다. 그러나 작은 흥얼거림 같은 후렴구에서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I remember, remember you.

I remember, still close to you.'


 가슴 한 켠을 아련하게 하는 흥얼거림이다. Hyde는 암담한 현실에서 결코 이야기를 끝맺지 않았다. 그는 애틋한 희망과, 그리움과, 아름다움을 조용히 남겨놓으면서 그는 이 앨범을 끝맺었다.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랑을 그려넣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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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우더의 비밀 - 시그마 북스 006 시그마 북스 6
엘러리 퀸 지음, 이제중 옮김 / 시공사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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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로 엘러리 퀸을 만났고, 작년에 <황태자 인형의 모험>이라는 짧은 단편과 <Y의 비극>을 접했으나 진짜 엘러리(작가가 아닌 캐릭터)는 만나지 못했음을 이 책을 읽으며 새로이 깨달았다. 그리고 곧 ‘대체 그동안 나는 무얼 읽은 거냐.’라고 머리 쥐어뜯으며 엘러리 팬클럽에 확실히 가입 신고서 날렸다.

 라이벌이라고 할 만한 번즈가 고상하고 우러러볼 타입의 탐정이라면, 똑같이 머리가 좋아도 이 엘러리는 굉장히 친근하다. 특히 아버지 퀸 경감과 말로 치고 박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살인사건이라는 엄청난 배경 속에서도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소설에서는 주로 아버지 쪽이 풀이 죽어 있고 엘러리는 자신만만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데,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경감이 질투하는 듯 몇 마디 던지는 게 어찌나 우스운지! 부자가 참 다정하기도 하다.

 물론 사랑스러운 가족애 때문에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그것만한 난센스는 없을 터. 무엇보다도 추리소설에는 추리가 1순위 아닌가. 하지만 조잡한 추리는 작가 엘러리 퀸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작년에 읽은 <Y의 비극>에서 이미 확실히 확인해두었으므로 믿고 소설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사실 작가가 주구장창 주장하는 ‘페어플레이 정신’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무책임하고 수동적인 독자이기 때문에, 그저 생각치도 못했던 범인이 지목되는 것만으로도 ‘좋은 추리소설이로군.’이라며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나의 낮은 커트라인에서 보자면 이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은 수석입학으로 들어온 추리소설이 된다. 뭐, 나처럼 무책임한 독자가 아니라 잔뜩 날이 선 독자들도 대체로 엘러리 퀸의 페어플레이 정신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후회는 없었다는 장렬한 전사통보를 날리는 걸 보면 높은 기준에도 들어맞는 잘 만든 작품인 건 분명한 것 같다.

 게다가 욕심도 많은 작가는 이 즐거운 추리 한 판에 본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회적인 메시지도 넣으려고 한 모양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좀 실패인 것 같다. 오히려 나는 그 시도가 실패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 잘생긴 청년 탐정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사회의 어둠을 응시하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단 말이지.

 반 다인의 어깨에 힘 가득 들어간(가끔 그것도 웃기긴 하지만) 추리소설도 좋고 더 극단적으로 ‘후까시’를 잡는 필립 말로도 좋지만 엘러리 퀸처럼 대놓고 ‘나는 킬링타임용이여’라고 웃으며 뛰어다니는 편이 역시 이 여름 보내기에는 더 낫지 않을까. 덕분에 어지간히 근엄한 소설 좋아하시는 나도 이 귀여운 가족(엘러리, 퀸 경감, 그리고 작은 주나까지)에 푹 빠져 오늘도 학교 도서관에 목매달고 있다.

 마지막으로, 프렌치(프랑스) 백화점, 고마워. 멋진 남자를 소개시켜 줘서.(프렌치 가족의 불행에는 심심한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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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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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마지막 이야기였던 <회전목마>에서부터 발전한 소설이고 먼저 읽은 <황혼녘 백합의 뼈>의 전편인 이야기. 이렇게 쭉 써놓고 보니, 새삼 온다 리쿠가 제목 하나는 참 잘 뽑는구나 싶다. 나는 제목을 잘 뽑는 사람을 참 부러워하기 때문에, 새삼 이 지칠 줄 모르는 이야기꾼이 더욱 부러워졌다.

 개인적으로 이 일련의 시리즈 중에서는 <황혼녘 백합의 뼈>를 가장 좋아한다. 온다 리쿠가 아름다운 소년 소녀를 사랑한다면, 나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완전에 가까운 글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나마 <황혼녘 백합의 뼈>은 꽤 ‘소설다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는 아무래도 그만한 견고함은 떨어진다. 게다가 이미 <황혼녘 백합의 뼈>를 본 상태였기 때문에 요한이 누구이며 교장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덕분에 미스터리적인 즐거움은 절반정도 댕강 잘려나간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배경이나 인물이 너무 비현실적이 아닌가. 온다 리쿠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계속 생각한 거지만, 이 작가는 학교라든지 아름다운 소년 소녀에 대한 엄청난 환상이 있다. 그리고 이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는 그 환상의 정점에 다다라 있다.

 하지만 가끔 단점이 장점이 되기도 하는 일도 있고, 미치면 미친다는 말도 있는데, 이 소설도 어찌 보면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황당하리만큼 이상적인 배경과 인물들이 도리어 내가 이 책을 읽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이 소설은 눈이 즐거운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보장한다. 온다 리쿠가 묘사하는 학교는 완벽하고(심지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비밀까지도!)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눈부시다. 역자 후기에 이 소설의 인물들이 인기투표에서 상위권을 독점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말 확실히 동감한다. 이를테면 요한은 만화 <몬스터>의 그 요한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이고, 레이지는 어른스러움과 아이다움이 중층적으로 복합된 이미지에, 레이코는 소싯적 하이도(Hyde)의 긴 머리 모습에 정신병자와 같은 불안함을 한 두 방울 첨가한 이미지이다. 도리어 <황혼녘 백합의 뼈>에서 그토록 매력적이던 리세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는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어중간한데, 어쩌면 그것도 기억을 잃고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한 방법인가 슬쩍 의심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흐리멍덩한 계집애(笑)를 요한이나 레이지와 같은 미소년이 좋아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분하다는 것. 이 정도면 확실히 즐겁게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엄밀히 말해 온다 리쿠는 소설가가 아니라고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이야기꾼이다. 스스로 <회전목마>에서 밝혔듯이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예술적으로 완결된 소설’이라는 작품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듯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나도 소설로서는 실격이다, 라는 말은 거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소설로서는 미완이지만 이야기로서는 거침이 없다. 나는 일찌감치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을 접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작정으로, 중반 이후에는 편안히 캐릭터들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캐스팅 놀이에 전념했다. 낯선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즐거운 경험이기도 했다. 조약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에는 눈을 떼지 못하는 작가의 힘에 몇 번이나 감탄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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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제이 2007-08-14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미치면 미친다니 참으로 시원시원한 표현이시네요^^ 멋진 리뷰 잘읽었습니다~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비즈니스맨을 위한 아티스트 웨이
줄리아 카메론 외 지음, 원은주 옮김 / 웅진윙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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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맨을 위한 아티스트 웨이



오랜만에 보는 알찬 실용서



오랜만에 실용서 치고는 좋은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이른바 ‘모닝페이지’라고 부르는 아침에 자유롭게 (그러나 집중하여) 쓰는 3페이지의 글로 창조적이고 자유롭게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 여기까지는 딱히 다른 실용서보다 좋을 것이 없어 보인다. 이미 우리는 다른 많은 책들을 통해 각기 다른 도구들과 지침들을 수 없이 추천받아 왔지 않은가. 그러나 처음 말했듯이 이 책은 그런 흔한 책들과 달리, 보기 드물게 좋다. 사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특별한 제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책들과 달리 그 ‘모닝 페이지’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와 유용한 툴(tool)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점에 있다.

지금 당장 모닝페이지가 무엇인지, 그 활용법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바꾸는 지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책을 읽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서평은 책의 요약이 아니니까. 하지만 당신이 내가 본래 12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단 1주일 실행에 옮겨본 경험담을 듣고 싶은 의심 많은 사람이라면 이 서평을 계속 읽기를 바란다.

일단 나로서는 따로 모닝페이지를 쓰기에는 여러 악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 아침에 시간을 내기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이미 학원 수강을 위해 매일 5시에 일어나고 있고 일을 마치고 나면 10시가 훌쩍 넘어 있는 경우도 잦았다. 모닝페이지를 위해 1시간 정도 더 일찍 일어난다면, 최악의 경우 4시간밖에는 자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잠이냐 모닝 페이지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자면 나는 당연히 잠을 선택할 터였다. 두 번째 문제점은 내가 이미 일기를 써 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책에서는 일기와 모닝페이지가 다르다고 말하지만 내 일기는 조금 독특한 방식이어서 모닝페이지와 아주 비슷한 구조였다. 그것이 어째서 곤란한 경우냐, 라고 묻는다면, 내가 글 쓰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한 번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 거기에 매진하느라 2~3시간씩 다른 일은 못 하고 일기에 매달린다는 사실을 말해주겠다. 그런 이유로 나는 최근 일기장을 펴는 일 자체를 꺼리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책을 간단히 쭉 읽어나간 나는 몇 가지 사항만 내 삶에 맞게 변동시킨다면 이 프로그램을 충분히 따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일단 나는 아침에 일어나 모닝페이지를 쓰는 대신 학원을 마치고 남들보다 일찍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 도착했을 때 모닝페이지를 쓰기로 했다.(그동안 나는 그 시간을 인터넷을 하느라 소모시키곤 했다.) 그리고 모닝페이지(이자 일기)의 분량을 철저히 3페이지로 고정시키기로 하여 쓸데없는 시간의 낭비를 줄였다.

그렇게 해서 ‘아티스트 웨이’의 1주일이 지났다. 솔직히 아직까지는 삶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점차 내 삶이 정돈되는 기분을 느낀다. 프랭클린 다이어리를 사용하는 것처럼 스케줄을 정리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내가 내 삶(감정적인 면을 포함하여)을 조율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기분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분노하기도 좌절하기도 방황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닝페이지에 그러한 감정을 솔직히 적고 그 위에서 대안을 생각하는 일이 익숙해지면 더욱 나 자신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전의 일기는 감정의 늪을 더 깊게 만들어 내가 끊임없이 그 구렁텅이에 빠지게 만들었다면 모닝페이지는 오히려 단단하고 다정한 시선을 나에게 베푼다. 나는 나머지 11주의 프로그램을 계속할 용의가 있고, 11주가 지나면 내가 분명 달라져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의 장점은 굳은 의지로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정하고 부드러운 방법으로 자신을 현명하게 바꾼다는 것이다. ‘일단 마음가짐부터 바꿔라!’라고 시끄럽게 외치는 강건한 책들에게 지친 사람들이라면 12주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책의 프로그램을 따라오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밑져야 본전 아닌가. 하다못해 모닝페이지 덕분에 하루 1시간씩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라도 생긴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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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오늘을 위한 인도의 지혜
잭 홀리 지음, 이지수 옮김 / 체온365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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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얇았다. 하드커버에 이정도 두께면, 그냥 페이퍼 북이었으면 어느 정도일까 짐작해보고는 살짝 실망을 했다. 내가 아는 바가바드기타는 꽤 두께가 있었는데, 이건 어떻게 된 건가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앞장을 들춰보니 그나마 얇은 책에 작가와 번역가의 말이 절반이다. 그걸 읽으며 이 책이 축약본이라는 사실을 알고 긴장까지 했다. 지금까지 축약본을 보고나서 좋은 기억을 가진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축약본이라는 점에서 위험요소를 담고 있다. 물론, 읽는 동안은 편안했다. 쉽고 간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를 다 읽고 난 후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어쩐지 조금 왜곡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몇 천 년 전에 머나먼 이국 인도의 사람 역시 자신과 신과 세계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그런 본질적인 질문을 전 세계, 전 세대가 공유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해법에 있어서(더 정확히 말하면 해법에 다가가는 방식에 있어서) 나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나는 이 책이 속한 힌두교와 태생적으로 얽혀 있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다. 물론 불교가 힌두교의 비판과 더불어 나타나긴 했지만, 기본적인 세계관은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불교도 힌두교의 신들을 포용했고 힌두교도 붓다를 힌두의 신들 중 하나로 여기고 있을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겐 ‘크리스트교’적으로 보였다. 서양인이 서양에서 힌두교를 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편집한 책이라서 그럴까? 책에서는 신과 신앙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기독교와 같은 일신론 기반의 종교와 힌두교와 같은 종교는 신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크리슈나가 신과 신앙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너무나 ‘일신론’적으로 나타나있는 것에 대해 꽤 놀랐다. 어떻게 읽다보면 기독교인들이 신앙적 논리를 세우기 위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빌린 것처럼 바가바드기타의 논리를 빌리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종교가 섞이는 것에 대해서는 큰 거부감이 없지만, 그렇다면 이 책은 역시 원전에는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물론 <바가바드기타> 자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맛보기로 보기에도 나쁘지만은 않지만, 그들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에게 권하고 싶다. 나처럼 불교인 사람이 보기에는 역시나 위화감이 느껴질 것 같으니.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깊은 지혜는 흔들림이 없어, 여전히 책 곳곳에는 기억해 두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누군가 (다른 번역의) 바가바드기타를 읽으며 형광펜으로 밑줄을 잔뜩 쳤다고 하더니 뒤늦게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아무래도 완역 바가바드기타를 읽어야지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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