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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우더의 비밀 - 시그마 북스 006 ㅣ 시그마 북스 6
엘러리 퀸 지음, 이제중 옮김 / 시공사 / 1994년 10월
평점 :
품절
어릴 적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로 엘러리 퀸을 만났고, 작년에 <황태자 인형의 모험>이라는 짧은 단편과 <Y의 비극>을 접했으나 진짜 엘러리(작가가 아닌 캐릭터)는 만나지 못했음을 이 책을 읽으며 새로이 깨달았다. 그리고 곧 ‘대체 그동안 나는 무얼 읽은 거냐.’라고 머리 쥐어뜯으며 엘러리 팬클럽에 확실히 가입 신고서 날렸다.
라이벌이라고 할 만한 번즈가 고상하고 우러러볼 타입의 탐정이라면, 똑같이 머리가 좋아도 이 엘러리는 굉장히 친근하다. 특히 아버지 퀸 경감과 말로 치고 박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살인사건이라는 엄청난 배경 속에서도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소설에서는 주로 아버지 쪽이 풀이 죽어 있고 엘러리는 자신만만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데,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경감이 질투하는 듯 몇 마디 던지는 게 어찌나 우스운지! 부자가 참 다정하기도 하다.
물론 사랑스러운 가족애 때문에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그것만한 난센스는 없을 터. 무엇보다도 추리소설에는 추리가 1순위 아닌가. 하지만 조잡한 추리는 작가 엘러리 퀸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작년에 읽은 <Y의 비극>에서 이미 확실히 확인해두었으므로 믿고 소설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사실 작가가 주구장창 주장하는 ‘페어플레이 정신’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무책임하고 수동적인 독자이기 때문에, 그저 생각치도 못했던 범인이 지목되는 것만으로도 ‘좋은 추리소설이로군.’이라며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나의 낮은 커트라인에서 보자면 이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은 수석입학으로 들어온 추리소설이 된다. 뭐, 나처럼 무책임한 독자가 아니라 잔뜩 날이 선 독자들도 대체로 엘러리 퀸의 페어플레이 정신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후회는 없었다는 장렬한 전사통보를 날리는 걸 보면 높은 기준에도 들어맞는 잘 만든 작품인 건 분명한 것 같다.
게다가 욕심도 많은 작가는 이 즐거운 추리 한 판에 본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회적인 메시지도 넣으려고 한 모양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좀 실패인 것 같다. 오히려 나는 그 시도가 실패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 잘생긴 청년 탐정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사회의 어둠을 응시하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단 말이지.
반 다인의 어깨에 힘 가득 들어간(가끔 그것도 웃기긴 하지만) 추리소설도 좋고 더 극단적으로 ‘후까시’를 잡는 필립 말로도 좋지만 엘러리 퀸처럼 대놓고 ‘나는 킬링타임용이여’라고 웃으며 뛰어다니는 편이 역시 이 여름 보내기에는 더 낫지 않을까. 덕분에 어지간히 근엄한 소설 좋아하시는 나도 이 귀여운 가족(엘러리, 퀸 경감, 그리고 작은 주나까지)에 푹 빠져 오늘도 학교 도서관에 목매달고 있다.
마지막으로, 프렌치(프랑스) 백화점, 고마워. 멋진 남자를 소개시켜 줘서.(프렌치 가족의 불행에는 심심한 애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