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이제 가야만 한다

이제 가야만 한다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동사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詩 최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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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그리고 까미유 끌로델
정금희 지음 / 재원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프리다 칼로, 나혜석, 카미유 끌로델...세 명의 여성 예술가의 삶을 그들의 작품과 함께 담고 있다. 그들의 작품은 당연하지만 그들의 삶을 담고 있다.

프리다 칼로...족쇄처럼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코르셋을 화려한 색채로 아름답게 장식해 놓은 사진이 실려있다. 평생 갖고 싶었던 태아의 그림도 함께 그려서. 짙은 눈썹때문일까 울고 있는 자화상마저도 강인해보인다. 46세때 무릎아래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난 뒤 일기장에 '내게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 왜 다리가 필요하겠는가' 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녀가 겪었을 많은 고통이 결코 그의 날개를 꺽지 못했나보다.  

나혜석...책에 실린 그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1896년 생. 흔히 보아온 흑백사진속의 100년 전 사람들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는 말이 그녀의 사진을 보니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당시로서는 당연할거다) 결국은 무연고 병실에서 행려병자로 세상을 떠난 그의 생이 안타깝다.

까미유 끌로델...그녀에 대한 영화나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책에 실린 그녀의 작품들을 보니 그녀를 다시보고 되살리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좀더 강인한 정신으로 모든 걸 이겨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크다. 어머니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30년을 그곳에서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에 그래도 나의 삶은 살만 한 거군 하는 생각을 차마 갖지 못하겠다. 

이 책을 읽고나니 나의 삶을 책으로 쓴다면 어떤 읽을거리를 줄 수 있을지 새삼 궁금해진다.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하고 생각하다보니 얼마나 남았을지 누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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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방을 얻다

방을 얻다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막 밭에서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 계신 저녁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 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가.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걸.


詩 : 나희덕

 


 

 

 

 

 

 

 

 Edouard Boubat -Saint Germain-Paris Bl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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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그랬다지요

그랬다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詩 :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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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거미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거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詩 이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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