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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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심으로 서재를 결혼 시키고 싶어서 첫 글을 읽었다.

  읽자마자, 열여덟 편의 에세이가 엮인 이 책을 단숨에 읽지 않는 것은 왠지 책에 대한 죄를 짓는 일이 될 것만 같은 느낌이 곧바로 들었다. 그 단숨을 내기가 무에 그리 어렵다고 책을 몇 년 동안 처박아 두게 되었는데, 그 사이 나의 서재는 호혜로운 결혼에 실패한 채 집을 식민화하고 말았다. 처가에 남겨진 유민들의 난민 신청은 여전히 받아들여질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읽다 만 책, 마저 읽기’ 한가위 프로젝트에 징발될 후보들은 여전히 책상 위에 한가득 쌓여 있다. 그러나 왠지 프로젝트의 일단락은 이 책이 짓도록 하고 싶었다[그나저나 책을 읽을수록 읽다 만 책들이 자꾸 떠올라 책상이 점점 더 너저분해지고, 새롭게 읽다 마는 책들이 도리어 늘어나고 있다. 하긴 집을 점령한 그 책들이 읽다 만 책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집서벽(集書癖)을 고백하는 일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젠 일도 하고 다른 책들을 개시하여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한글날은 또 어떻게 기념한다지?].


  11시에 밤 버스를 탔어야 했다. 20쪽 남짓을 남기고, 먼 길을 돌아와 준 이에게 차마 다시 같은 상처를 줄 수가 없었다. 결국 버스 표를 취소하고 책을 마저 읽었고, 그 선택은 옳았던 것 같다. 책장을 덮고 보니 11시 4분을 지나고 있다. 18세기 런던의 서적상 제임스 래킹턴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내로부터 전 재산 반 크라운을 받아들고 다음날 먹을 음식을 사러 나섰다가, 헌책방에서 에드워드 영의 『밤의 생각들 Night-Thoughts』을 발견하는 바람에 칠면조 대신 책을 사들고 돌아와야 했다. 잘못은 가는 길에 돌부리처럼 놓여 있었던 책이 했지, 래킹턴은 그의 말대로 지혜롭게 행동하였다.


  읽는 내내 빙긋이 웃음이 나는,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책이다. 처음에는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낯선 이름들에, 영미권의 책 마을 부족민은 이런 기벽과 강박을 가지고 살아 가는구나, 인류학 보고서처럼 읽었다. 그러다 다른 모든 것-고속버스 시간 따위-을 잊은 채 글쓴이와 함께 울고 웃다 보니, 지구 반대편에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 같은 풍습을 가지고, 같은 신을 모시고,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저 우주 너머에서 나를 똑 닮은 외계인을 발견하면 이런 기분일까.


  책 끄트머리의 다음 토막에서 결국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내가 이 책을 헌정한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어주었고, 그 때마다 매 음절에 책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실어 보냈다. 두 분 다 작가이기 때문에 그들의 비길 데 없는 업적의 무게로 작가 지망생인 나를 기죽일 만했건만, 어떻게 된 일인지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독자도 작가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선물, 그리고 다른 많은 선물들에 대해 두 분께 감사드린다."


  이제는 시력을 잃어버린 글쓴이의 아버지도 넉넉한 마음일 것이다. 그 분은 브루클린의 이민자 가정에서 성장했는데, 너무 가난해서 십대가 되기 전에는 외식 한번 못해 보았지만, 두 개의 검은색 호두나무 책장에 스콧, 톨스토이, 모파상을 채워넣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 분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여덟 살 때 입센을 읽었지. 하지만 그 전에도 입센은 거기에 있었어. 나는 그가 노르웨이의 위대한 극작가라는 것, 그가 있는 곳이 내가 향하고 있는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그동안 너무 자주 또 많이 타협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믿고 보는 옮긴이, 정영목 교수는 "책에 관한 책 중에서 앤 패디먼의 이 책이 둘째로 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썼다.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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