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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 엄원태 시집 ㅣ 창비시선 363
엄원태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엄원태 선생님의 네 번째 시집. 직전의 『물방울 무덤』(창비, 2007)과는 시선과 시각이 다소 달라진 느낌이다. 서늘하다.
"시는 단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제 몸을 잃어가면서 마련하는 풍경"이라고 하는 양경언 평론가의 해설이 마음을 붙잡는다.
지금 여기 (90쪽)
우연 아닌 삶이 또 있을까마는
단순한 방문객으로 살기엔
내 눈은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몸의 감각 지나치게 예민하여
괴로움 또한 적지 않았다
나를 가둔 방은 춥거나 더웠으며
음식은 식었거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떤 날은 국물에서 바퀴벌레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의 단 한번뿐인 이 삶은
대체로 살아볼 만한 것이었으니,
태초에 별들 사리를 흐르는 음악같은 것이 있어
그 무시무종의 음률을 따라
나는 왔고 또 돌아가리란 걸 겨우 이해하고 나니
오고 감 또한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이 무상(無常)을 견딜 방편이란
오로지 내가 당신을 껴안는 것
도리없이 끌어안는* 것이니
지금 여기 이 삶은
너와 나라는 우주가 덩어리째 유정**하여
서로 끌어안아 얽히고설킨 하나였고 하나님이었다는
그 근원을 향해 가고 가는
도정(道程)에 다름 아닐지니
이 초라한 간이역***일지언정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
또한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 *** 심보선의 「지금 여기」에서.
** 문인수의 시 「달북」에서.
2013년에 나온 시집인데, 다음의 시는 2016년 판 바슐라르라 해도 좋을 듯 싶다.
아름다운 얼굴 - 촛불 앞에서 (90쪽)
이 반투명의 흰 몸뚱어리는 오래된 기억의 숲을 거느린다. 몸의 미립자들은 숲의 낡은 목책(木柵)을 부수고 일시에 어둠을 터뜨릴 듯 몰려나온다. 갇혀 있던 희고 작은 애벌레들이 꼬물대며 길 위로 쏟아지는 심상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촛불은 혁명이다.
그대의 흰 얼굴과 짙은 눈썹은 가장 견고한 신념의 한 양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동성애적 연정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그대는 자신의 열정을 온전히 자신에게로 되돌려놓음으로써 무화(無化)될 수 있는 자세를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지사(志士)이다.
이것은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아니,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 자체에 대한 지극한 이해의 한 모습이다. 그 집중력! 그대가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부분이다. 오로지 소멸을 지향하는 집중력이야말로 존재의 근원적인 에너지라는 이 역설을, 고요히, 그러나 전심전력 타오르는 촛불에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