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의 문화와 글쓰기의 윤리
리처드 앨런 포스너 지음, 정해룡 옮김 / 산지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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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창성 숭배'는 시공간적 맥락에 종속된 '경제현상'이다(102쪽).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표절'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13쪽). 셰익스피어의 연극들은 제목이나 플롯은 물론이고, 대사 가운데 수천 행을 다양한 자료들에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혹은 거의 흡사하게 베끼고 있다. 작가는 그런 사실을 어디에도 밝히지 않았고, 관객들도 그가 다른 작품을 전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그에 관심이 없었다. 당대에 '창의성(creativity)'이란, 독창성(originality)'이라기보다는 '개량(improvement)' 혹은 '창조적 모방(creative imitation)'을 의미했다(75~80쪽). 즉, 과거의 예술가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료들을 개작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을 가치 있는 작업으로 여겼다(12쪽). 현대에 와서도 공공연한 표절은 비판받지 않는다. T.S.엘리어트의 「황무지」는 이전 문학들의 (대개는 출처표시 없는) 인용으로 짠 피륙과도 같지만, 오히려 원본의 가치를 더 높인 것으로 인정받는다. 엘리어트는 자신의 기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15, 81~84쪽).

 

  "미숙한 시인은 모방하고 성숙한 시인은 훔쳐온다. 나쁜 시인은 자기가 가져온 것을 훼손하지만 좋은 시인은 그것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든다. 아니면 적어도 다른 것으로 바꾼다. 좋은 시인은 도둑질해온 것을 용접하여 독특한 감정으로 통합하기 때문에 가져오기 이전의 원래 것과 완전히 다른 무엇으로 만든다. 반면 나쁜 시인은 그것을 함부로 쑤셔 넣어 아무런 통일성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좋은 시인은 시대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며, 관심도 다양한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기꺼이 빌려오고자 한다." - T.S.엘리어트

 

  (스티브 잡스는 피카소를 인용하여 "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라고 말하곤 했다. 엘리어트의 위와 같은 논급은 이를 연상시킨다. 스트라빈스키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원조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다음 페이지를 참조. http://quoteinvestigator.com/2013/03/06/artists-steal/ ) 

 

  저명한 법경제학자인 포스너 판사는 '표절'을 정의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다. '베끼기는 범죄행위이고 무조건 나쁘다'거나 '독창성이 없는 지적 상품은 전혀 창조적이지 않다'는 생각은 단순한 생각이다. 포스너는 훌륭한 예술이 전적으로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기존 작품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아무리 독창적인 작품이라도 작품의 가치가 없을 수 있다(13~14쪽). 즉, '창의적'이라는 규범적 판단으로까지 자동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굳이 구분하자면) 도덕적 개념에 가까운 '표절(plagiarism)'과 법적 개념인 '저작권 침해(copyright infringement)'도 구별되어야 한다. 저작권이 만료되면 저작물은 공공의 영역(public domain)에 속하게 되어 누구든 법적 책임을 질 위험없이 자유롭게 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공공의 영역에 있는 저작물을 복제하더라도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여전히 표절로 간주될 수 있다(14쪽). 그 점에서 표절의 핵심은 '베끼기'보다는 오히려 '숨기기'이다. 표절은 표절자와 표절된 작품을 실제보다 더 좋게 보이게 만드는, 즉 소비자(독자, 관객, 감상자)를 오인·혼동시키는 '상표권 침해'에 가깝다. 그러나 출처를 굳이 표시하지 않는 '패러디', 교과서, 판결문의 경우에서 보듯 '표절은 숨기기'라는 명제 역시 완벽한 것은 아니다. 루벤스, 앤디 워홀의 작업형태나 성경의 경우처럼 작가와 저자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다. 저자(author)는 인준(authorize)하는 사람이다(41~53쪽).

 

  표절 여부 판단에는 표절자가 어떤 이익을 얻었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가 섬세하게 분석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표절을 한 학생, 교수, 작가는 동료들이나 다른 작가들에게 돌아가야할 높은 성적이나 교수직, 평판을 빼앗을 수 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저작권 침해 여부를 기준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표절 문제에 형법이라는 비용이 만만찮은 무거운 기계를 동원하는 것은 낭비적이다(저작권 침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국역본의 제목은 이상과 같은 포스너의 논지와는 거리가 있다. 역자는 '보론'으로 '윤리적 글쓰기의 가이드라인'을 실었는데, 책 후반부의 보론만을 대표할 수 있는 제목이 아닌가 싶다(보론도 물론 가치가 있다). 번역본 편집·출간 과정에 포스너의 법경제학자로서의 면모가 부각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이 책 내용을 포괄하는 보다 상세하고 심도 있는 논의는 다음 책을 참조할 수 있다. 통념을 깨는 질문들을 많이 던지고 있어 '두뇌가 풀가동'되고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걸작이다.

 

 

  포스너 판사가 미국 법/경제학계에 차지하는 위상에 비하여 볼 때, 국내에는 그의 작업이 충분히 소개되어 있지 않다. 국내에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이 출간되었다. 자유기업센터에서 나온 『법경제학 (상/하)』는 1973년 처음 출간된 포스너 판사의 저명한 교과서 『Economic Analysis of Law』 5판이나, 이미 2014년에 9판이 나왔다. 이외에도 번역되어야 할 책들이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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