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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음악
백대웅 / 어울림 / 2001년 9월
평점 :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였지만, 내게는 사실 생각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전거가 된,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교과서와도 같은 책이다. 부분 부분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들이 있지만, 동시대의 음악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분들과 한번쯤 이야기 나눠보고픈 지점들이 많이 담겨 있어 이 기회에 공유한다.
그중 한 꼭지.
“음악에서의 빠롤과 랑그
(...) 음악의 빠롤은 소리의 울림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음악의 랑그는 빠롤 안에 있는 소리의 질서입니다. 이 질서 안에는 음색의 개념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빠롤은 물리적인 현상이고 랑그는 그것을 있게 하는 인간의 의식 안의 체계입니다. 그래서 빠롤이 울림의 결과라면 랑그는 울림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울림은 귀를 통해서 느끼는 것이고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소리이니까요. 그러나 질서는 귀로도 알 수 있지만 눈으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질서’를 기록해놓은 것을 우리는 악보라고 합니다. 말의 랑그를 기록한 것을 문자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악보는 문자와 같이 일종의 기호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악보의 기호체계는 문자와 같이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악보를 소설처럼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빠롤을 위한 것이지요. 음악의 랑그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결과를 우리는 음악이론이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음악이론을 넓은 뜻으로 사용해서 음악역사, 음악미학 등을 포함하는 경향이 있지만 음악이론은 음악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음악의 랑그가 빠롤로 바꾸어지지 않는 한, 음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음악은 귀를 통해서 인식되는 예술이라는 정의가 타당하다면 말입니다. 음악이론은 반드시 빠롤의 현실성을 대상으로 하는데 비하여, 음악역사나 음악미학은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음악의 빠롤을 위해서 랑그가 설정되는 과정을 작곡이라고 합니다. 작곡은 악보에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머리로 생각하고 그것을 바로 소리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음악에서 작곡이라는 말이 창작(creation)이 아니고 구성(compositon)이라는 사실은 매우 재미있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것에는 첫째, 창작이라는 말은 하이든의 ‘천지창조’라는 오라토리오처럼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이때는 대문자 Creation으로 씁니다-할 때나 쓰는 말이지 인간이 무엇을 만들 때는 쓰지 않는다는 기독교적인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또 하나, 구성이라는 말은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짜 맞춘다는 뜻입니다. 즉, 구성이라는 말에는 음악도 말과 같이 공동체의 약속체계와 제약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음악에 대한 이론이 매우 엄격해지겠지요. 이것이 중세의 서양음악이론이 엄격했던 이유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낭만주의시대라고 부르는 19세기 이후에는 서양 사람들도 음악이 공동체의 제약이나 약속체계에 얽매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는 음악의 흐름을 강의할 때 이야기하지요.
한편 음악의 랑그를 빠롤로 바꾸는 행위가 곧 연주(performance)입니다. 이 연주도 악보 연주, 구전 연주, 즉흥연주 등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서양 음악의 콩쿨이라 하면 악보대로 그려내는 연주를 생각하지만 (...) 그러나 베토벤 시대만 해도 즉흥연주를 잘 하는 사람이 연주를 잘 하는 사람으로 꼽혔지요. 여러분이 아는 변주곡(variation)이 바로 그러한 생각의 소산입니다. 단순한 흉내보다는 해석과 변용이 연주에서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콩쿨을 기준으로 해서 음악인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
나누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인용하는 김에 한 가지만 더.
“소리의 높이에 집착한 서양음악과 소리의 음색에 집착한 동양음악
동서음악의 차이를 크게 보면 서양음악은 주로 소리의 높이와 크기에 집착해왔고 동양음악, 그중에서도 우리 음악은 소리의 길이(리듬)와 음색에 집착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리의 높이에 집착하게 되면 자연히 높이의 미세한 차이까지 신경을 쓰고 또 높이가 서로 다른 소리의 어울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양음악은 화음이라는 거대한 선물을 받게 되었지요. 이 화음은 그 원리가 배음구조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니까 여러 가지의 높이를 한데 합치는 소리를 음색으로 생각할 수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음악이 추구한 화음은 음색의 추구라는 면보다도 주로 조성과 관련된 화음의 진행방법이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화음에서 새로운 음색의 추구는 20세기 이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즉 서양음악은 19세기까지 배음구조의 원리 안에 있는 3도씩 쌓아 올리는 방법에서 탈피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3도씩 쌓아 올리는 화음은 그 원리가 소리의 원리 안에 있는 배음구조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인간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소리이고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좋은 소리이고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일곱 번째 시간에 얘기하겠어요(눈의 대칭과 관련지어서). (...) 그러나 동양의 음악은 소리의 높이와 관련된 생각보다는 소리의 음색과 관련된 생각을 더 많이 해온 음악입니다.
여러분은 팔음(八音)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말 그대로 여덟 가지 소리라는 뜻입니다. 이 여덟 가지 소리는 음의 높이나 크기와는 상관없는 소리의 음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팔음은 악기를 만드는 재료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쇠, 돌, 실, 대, 나무, 가죽, 흙, 바가지입니다. 음악에서 팔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물질의 소리가 서로 어울릴 때 좋은 소리가 난다는 우주론적인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동양에서 소리의 어울림이나 화음의 개념은 높이가 다른 소리의 어울림이 아니라 음색이 다른 소리의 어울림입니다. 그래서 공자를 제사지내는 문묘제례악이나 나라의 조상인 역대 임금을 제사지내는 종묘제례악에서는 악단구성의 원칙으로 이 팔음을 모두 갖추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후대에 오면 조금씩 변동이 있지만. 여러분은 ‘금슬이 좋다’는 말을 알 것입니다. 부부의 사이가 금(琴)과 슬(瑟)이라는 악기소리의 어울림과 같이 좋다는 뜻입니다. 금과 슬은 모두 우리나라의 가야금과 비슷한 중국의 현악기인데 이 두 악기의 음색은 잘 조화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양과 서양은 소리를 인식하는 방법과 가치관이 달랐습니다. (...)”
기본적으로 강의록을 바탕으로 써진 책이다 보니 인용된 문장들이 다소 투박하다. 그래도 본지는 전달되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