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쯤 읽다 덮어둔 책을 다시, 마저 읽었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1918~1933)부터 나치 정권 초기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미의식을 정치화하려 했던 독일 신보수주의 지식인(보수혁명론자)들의 초상과 그들의 반정치적 이념을 다뤘다.
나치즘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탐구되어 마땅한 주제인데, 국내에는 참고할 문헌이 많지 않다.
선구적 연구는 이종훈, "독일 신보수주의 이념의 형성과 전개: 1853~1933(下)", 역사학보 제97집 (1983).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465065
이 책을 쓴 저자의 "바이마르 시기 '보수혁명' 담론에 나타나는 반근대주의", 독일연구: 역사, 사회, 문화 창간호(2001). 한국독일사학회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www.germanhistory.co.kr/page/page_view?menu_num=88
한때 비판자로서의 보편성을 (지금 와서 보면 우연히, 한시적으로, 일부나마) 담지하였으나, 어느덧 종파주의적 권력의지만 남아 칼 슈미트적 결단주의로 퇴행해버린 정치세력이 오버랩된다.
지금의 반자유주의, 반지성주의적 정치 지형을 보면, 어느 쪽이라도 극단적, 파국적일 것 같아 우려스럽다.
헌법이론가 카를 슈미트의 경우야말로 민주주의 개념을 보수혁명적으로 전유한 대표적 사례이다. 그의 『헌법론』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국가 형식 및 정부-또는 입법 형식으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통치자와 피통치자, 명령 하달자와 복종하는 자 간의 일치이다." 슈미트의 민주주의관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를 모델로 했으며 따라서 그것의 기본 원리는 전 구성원 간의 "일체성"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근대 의회민주주의의 대의 체제는 민주주의 본연의 일체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결국 의회민주주의는 천박한 대중민주주의로 전락할 운명이라는 것이 슈미트의 입장이다.
보수 혁명론자들에 의한 민주주의 개념의 도용은 이처럼 매우 자의적이었으며 결코 그들의 반민주주의적인 정치관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았다.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그들은 민주주의 개념을 자신들의 결단주의 정치관에 맞게 변조시키는 교묘한 방식을 통해 수행했던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보수주의 특유의 문화 비판의 시각에 따라 모든 종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불신하고 오로지 혁명적 결단만을 호소했다. 보수 혁명 담론은 이처럼 모순에 가득 찬 담론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갖가지 어휘들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려 든다면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데올로기 대신 행동을 요구하면서도 스스로 추상적인 언어 게임에 몰두해 있고, 민주주의를 혐오하면서도 그것을 자신들의 이념으로 독점하려는 이들이 바로 보수 혁명론자들이었다. (책 77-8쪽)
20세기 독일 보수주의 정치·헌법 이론의 거두인 슈미트는 "사회세력"에 의한 국가의 장악과 이로 인한 "정치적인 것"의 소멸을 근대 문명의 핵심 문제로 부각시켰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이상적으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개개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친구와 적"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갖는다. 친구와 적은 항시 상대적이며 따라서 인간은 끊임없이 "결단"을 요구받는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속성이다. 그런데 유럽의 전통 세계에서 이러한 정치적 결정권은 "절대주의" 국가에 집중되었고 그럼으로써 유럽 민족들 특유의 "법질서"가 유지되어 왔다. 이제 근대에 이르면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통해 정치적 결정권이 "사회 세력"들에게로 분산되며 이에 따라 "정치적인 것"은 "자유"나 "평등"과 같은 부르주아의 추상적 이념과 그들 개개인의 무책임한 사적 이익 추구에 의해 해소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자유주의적 "의회주의 입헌국가"의 이상은 의회가 민족의 정치적 통일성을 "대표"한다는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개별 사회집단이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장소로 기능했으며 결국 관료주의적으로 조직된 "대중정당"이 주도하는 "다원주의적 정당국가"로 변질되어버렸다. 슈미트에 따르면 한 국가가 "민족" 전체의 이해를 대표하기 위해서는 "총체적 국가"가 되어야 하며 "영도자 국가"야말로 그것의 이상적 형태라는 것이다.
카를 슈미트는 (...) 모든 종류의 허위 의식을 내던져버리고 오직 구체적 행동 노선으로의 과감한 결단을 촉구했다. (...) 그들이 현실 정치 체제에 대해서 품었던 불만이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정책적 대안과 결부되지 않을 때 그것은 행동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추상적인 문화 비판과 과격한 행동벽의 결합이야말로 바로 이 허무주의적 담론의 근본 특징이었던 것이다. (...) 전체적으로 볼 때 보수 혁명론자들의 정치관은 반정치적 참여의 성격을 띠었다. (책 82-4쪽)
샹탈 무페의 지적처럼, 인민주권이 독재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몽테뉴, 볼테르, 로크,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져 내려온 똘레랑스적 자유주의의 회복이 절실하다.
김상범, "자유주의적 관용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2012)도 참조.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120581/1/000000010130.pdf
책 69쪽의 다음 표는 대단히 유용하다(인용자 재작성, '게오르크 크바베'는 언뜻 찾아서는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