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여유가 더 없어지기 전에 최근 읽은 책들에 관하여 메모를 남겨두려 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시는 책에 관한 그만한 생각을 떠올릴 수조차 없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문학작품을 많이 읽는 편도 아니고, 문학계 동향을 꾸준히 추적하여 온 것도 아니라서 최근 문학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 시인이 되겠답시고 기형도, 오규원 전집과 이성복, 문인수, 엄원태 등 시인들의 시를 필사하고, 시학회를 기웃거리며 신춘문예 일정을 챙기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먹고 살다 보니 흥미가 거의 떨어졌다. 한 달에 못 읽어도 한두 권은 꾸준히 읽던 시집도 요즘은 드문드문 읽을 따름이다. 책을 골고루 읽으려고 열댓 개 분야를 정하여 열다섯 권에 한 권꼴로는 문학 책을 꼭 읽게 되도록 배려(?)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 한가롭지(?) 않게 되었다. '쓸모'를 따지는 이런 말이 문학에 대한 모독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학을 펼칠 시간과 여유가 나더라도 汎用性이 상대적으로 큰 고전이나 세계문학을 집게 되지, 개중에서도 한국소설은 적어도 내게는 점점 순위가 많이 밀려나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의무감에서가 아니라면 작가가 창조한 세계와 문장에 빠져들 필요와 동기가 잘 일지 않는다. 긴 시간을 들이기엔 '가성비'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어느 작가의 이런저런 작품들은 다르더라는 것이 있으셨다면 추천해 주시길...)


  그렇게 내가 '편협한' 관점을 가진 '문외한'인 것을 전제로... 오늘날 '작가', '소설가', '문학'과 같은 말들이 주는 '아우라'는, 비교적 최근인 『토지』가 완성된 1994년 즈음과 비교하여도 상당히 왜소하고 스산해졌다. 30년 전, 50년 전, 100년 전과, 지금의 창작환경을 어떤 기준을 갖고 비교해야 하는지, 비교할 수나 있는지 어려운 문제지만, 문학이 지식의 최전선에 있고 작가가 곧 지식인이었던 시절과 지금은... 어떻게 보아도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이다. 은유, "[삶의 창] 작가의 연봉은 얼마일까", 한겨레 (2018. 10. 19.)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866586.html; 민동용, "억대 연봉에 수십만 독자… 우리도 베스트셀러 작가랍니다: 웹소설 작가 3인 ‘밀차-강하다-달콤J’", 동아일보 (2020. 1. 8.)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00108/99127701/1


  간혹 거리에서 사진기를 멘 모습을 뵙기도 했지만 조세희 선생께서도 '글로서는' 오래 침묵하고 계신다. 최재봉, "[최재봉의 문학으로] 조세희의 침묵", 한겨레 (2018. 1. 18.)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8404.html 87년 체제를 열어젖힌 데 대한 보상(?)으로 명예와 권력을 넘어 경우에 따라서는 富와 그 세습까지 보장받은 이들이,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자신들의 시대를 스스로, 비가역적으로 강제 '폐막'시키고 있는 동안, 보수주의자로 분류되었던 소설가 김훈이 오히려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추락사와 산업재해 문제에 관하여 꾸준히 발언하고 계신다. 김훈, "[왜냐면] 아, 목숨이 낙엽처럼", 한겨레 (2019. 5. 14.)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893771.html

  대하소설만 위대하고 거대담론을 다뤄야만 가치있는 문학은 아니지만, (또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오늘날 박경리 선생님이나 작가 최명희 님처럼 그야말로 목숨 걸고 쓰시는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다(오히려 만화 같은 장르에서 그 비슷한 경외감을 느낄 때가 있다). 박상현, "문학은 민족 생존권 깨닫게 할 거대담론 다뤄야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출간", 연합뉴스 (2020. 2. 24.) https://www.yna.co.kr/view/AKR20200224122300005정영훈, "사람들이 토지·태백산맥 안 읽는 진짜 이유는…", 프레시안 (2012. 9. 11.)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8066 (갈수록 갸웃할 때가 많아지는 것 같지만, 여러 논란과 평가는 일단 접어두고라도 40년, 50년 넘도록 꾸준히 '소설'을 내고 계시는 김주영, 조정래, 황석영 같은 분들은 가히 노익장이라 할 만하다. 문순태 교수님께서는 재작년 두 번째 시집을 내시기도 했다.)

  가치 혼란,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한때 존경받았던 분들이 다양한 갈래로 '흑화'하고 판단이 흐려진 모습, 혹은 민주-반민주의 단순한 전선하에서는 용케 덮일 수 있었던 진면모(?)를 드러내어 보이며 실망에 실망을 안기고 있다. 최근 '문학동네'는 젊은작가상 수상작에 대한 삭제와 수상 취소 요청, 또 이를 접한 독자들의 문제제기를 받고 입장을 조금씩 후퇴해가다가 어제는 판매중지를 공지하기까지 했지만, 그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지 모르겠다.


[『토지』와 『혼불』을 함께 다룬 논문들을 몇 개 발견하여 기록해 둔다. 김희진, "최명희 『혼불』과 박경리 『토지』의 인류학적 연구", 2013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search.html?dbGubun=SD&m201_id=10042338; 김희진, "최명희 『혼불』과 박경리 『토지』연구 - 풍속을 중심으로 -", 인문사회 21, 7(3), 2016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17170; 이경, "겁탈과 여성인물의 생존서사 : 『태백산맥』, 『토지』, 『혼불』을 중심으로", 여성학연구, 26(3), 2016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63871; 우수영, "박경리 『토지』와 최명희 『혼불』을 통해 고찰한 한국의 음식문화", 현대소설연구, 58, 2015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85392김순례, "한국여성대하소설을 통해본 ‘여성의 가문의식’ 연구 -토지와 혼불을 중심으로", 국제한인문학연구, 1(1), 2012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693603 오세은, "여성 가족사 소설의 '의례와 연대성'-토지미망혼불을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7, 2002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0888529; 이덕화, "『토지』와 『혼불』의 비교연구", 여성문학연구, 2, 1999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69184 (박경리와 최명희 두 여성적 글쓰기』, 태학사, 2002라는 책도 내셨다)]



  다시 찾은 박경리기념관에서 이 책이 눈에 띄어 샀다. 『토지』를 연재하면서, 또 『토지』 완간 이후에 틈틈이 쓰셨던 글들로, 직접 '미완'으로 표시하신 부분이 있는 등 계획을 갖고 '일본론'을 다듬어 나가셨던 게 아닌가 싶다. 어찌 보면 『토지』 자체가 '소설로 쓴 일본론'이고, 작가께서 일본 평론가와 인터뷰 자리에서 "나는 철두철미 반일작가입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기도 하다.

  책 끝에 실린 강원일보 인터뷰를 보면, 『토지』 완간 이후의 계획에 관하여 "앞으로는 실제적인 이론이 서는 일본론을 집필할 예정입니다. 우리 세대 지나면 쓸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두 번 입 못 떼게 철저하게 조사해 쓸 겁니다. 어중간하게 칼 뽑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말씀하신 대목이 나온다(책 205쪽). 말씀 그대로 통렬하다. 삶을 걸고 내뿜는 일갈 앞에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나 실증주의 같은 것을 차마 들이대지 못하겠다. 특히 일본 역사학자 다나카 아키라[田中明]의 「한국인의 '통속민족주의'에 실망합니다」(책 158쪽)에 대한 지상 반론(紙上 反論)인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책 173쪽)는, 정연한 글에서 벼락이 치는 것만 같다. 1부 다섯 번째 글 "출구가 없는 것"과 2부 "美의 관점"은 내용이 상당히 겹치는데, 뒤의 글이 좀 더 종합적이다. 일본문화를 분석한 글로, 대작가의 통찰이 빛난다. 책에서 글 하나를 고른다면 위 "美의 관점"을 추천하고 싶다. 일본문화의 허무주의와 탐미주의, 현실 도피와 쾌락 추구,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을 꿰는 논설로, 몇 문장으로 요약하기 힘든 글이다. 청산하는 독일과 청산하지 않는 일본의 차이를 '(진실을 추구하는) 철학의 부재'에서도 찾고 계신다(책 76쪽 이하).

  작가께서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우려하신 대로(책 17쪽), 일본 우익이 통치 위기를 모면하고자 혐한 감정을 조장하고, 한국 학자들까지 동원하는 양상이 걱정스럽다. "가는 시냇물처럼 이어져온 일본의 맑은 줄기, 선병질적이리만큼 맑은 양심의 인사(人士), 학자들이 소리를 내어보지만 날이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 반대로 높아져가고 있는 우익의 고함은 우리의 근심이며 공포다. 일본의 장래를 위해서도 비극이다. 아닌 것을 그렇다 하고 분명한 것을 아니라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그 무서운 것이 차음 부풀어 거대해질 때 우리가, 인류가, 누구보다 일본인 자신이 환란을 겪게 될 것이다. 씨가 마르게 사내들이 죽어간 제2차 세계대전, 일본의 악몽은 사람이 현인신(現人神)으로 존재하는 거짓의 그 황도주의 때문이다. 가타비라 같이 속이 비어 있는 신국사상에 매달려온 일본인의 역사의식 그것의 극복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으로, 야심 없는 이웃으로 마주 보기 위하여, 그리고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책 29~30쪽)


  "저는 과거에 원한을 갖고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본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일본의 민족성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 스스로도 희생자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체제입니다. 체제가 뭐냐를 물어야지요."(책 202쪽)


  박경리 선생님의 문장들이 반드시 어법에 맞지만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렇지만 끈덕진 말맛이 감돌고, 절로 설복되는 묵직함이 있다. "나는 인생만큼 문학이 거룩하고 절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책 148쪽)라고 말씀하시며 "결코 사사오입의 인생을 살지 않[고] 내부에서 가장 치열한 사고의 반란을 겪었던"(책 121쪽) 분이시기에, 역설적으로 문장에도 인생 그 이상의 무게가 실릴 수 있는 것 같다.

사람은 아니 모든 생명은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살기 위하여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도 삶의 투쟁, 삶의 인식, 삶의 조화 그 모든 삶에 수반되는 엄청나게 거대하고 신묘한 본질적 삶의 교향악 위에서 군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술은 삶의 추구며 방식이다. - P59

나는 철두철미 반일 작가지만 결코 반일본인은 아[닙니다]. - P84

일본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한국인의 분노를 지겹고 불쾌하고 귀찮아한다. 언제까지 이럴 것이냐, 하면서도 철도를 놓아주었느니, 학교를 세워주었느니, 아무도 그것을 부탁한 바 없는 일을 좀스럽고 쩨쩨하게 늘어놓는 데 대해서는 말이 없다. 간간이 들려오는 침략이 아니라는 망언에 대해서도 무반응이다. 그들의 계속되는 망언은 괜찮아도 한국인의 분노는 왜 지겨운가. 사리를 명백하게 하지 않는 이상 잘못은 되풀이된다. 과거지사보다 미래를 보는 데서 오는 근심이다. 장차 세계에서, 인류라는 차원에서 일본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 것인가. 인류에 속하는 일본인 역시 오늘 군비 확장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자결하지 못하는 모친의 목을 조르는 아들의 비극이 없기 위하여. - P87

후일 일본론을 쓸 생각입니다마는 너무나 학생들은 일본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고 사회 자체도 일본의 정체에 무관심하며 또는 일본을 모범으로 생각하는 부류의 확대되는 양상을 보며 걱정을 한 나머지 나로서는 이나마도 성급하게 엉성하나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학생들이 일본을 모른다는 것이 학생들의 잘못은 아닙니다마는 마지막 꼭 해두고 싶은 말은 결코 일본을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 P109

하기는 우리 민족 전부가 겸손하고 고상하고 객관적이고 했으면 오죽 좋을까마는 그렇지 못하다 해서 함구령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은 학자의 독점물은 아니며 사람마다, 너 나 할 것 없이 역사에 동참해온 것만큼 알 권리, 말할 권리는 있다. 설령 일부 지각없는 사람들이 우쭐해서 과잉 표현을 좀 했다 하자. 그들의 천진한 자랑 때문에 일본의 땅 한 치 손실을 보았는가, 금화 한 닢이 없어졌는가, 왜 그렇게 못 견뎌 할까. 그같은 자랑조차 피해로 받아들이는 그들이고 보면 우리 한국의 천문학적 물심양면의 피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안이 벙벙해진다. - P181

그러나 나는 어리석고 느슨한 내 겨레를 슬퍼하지는 않는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들도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P190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 P192

"나앉은 거지가 도신세 걱정한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이 얘기는 일본의 경우일 수도, 우리의 경우일 수도 있다. - P193

저는 『토지』를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토지에는 왜 농부가 주인공으로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 인류적인 삶을 다루었기 때문에 주인공이 따로 없다고 했습니다. 『토지』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나무나 돌도 제 역할합니다. 저는 바람과 물에도 다 필연성을 부여했습니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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