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막하고, 술술 잘 읽히는 편이다. 책 초반부를 읽을 때 별 다섯 개를 매기고 시작하였는데, 한국사회에 대한 분석 부분이 지금 읽기에는 그리 와닿지 않고(소개된 연구들이 2012년 초판 1쇄 발행 당시로 보더라도 왠지 최신의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친절하게 소개하여 비교해볼 수 있게 해주시는 게 어딘가!), 뒤로 갈수록 해설서로서는 문장이 불친절해지는 것 같아 별 네 개로 마무리한다. 하지만 부르디외, 또 『구별짓기』에 관한 좋은 안내서임이 분명하고, 한국 학계에서 부르디외의 편향적 수용에 대한 홍성민 교수님의 비판에도 십분 공감한다. 아울러, 교수님 말씀처럼 한국판 『구별짓기』를 위하여, 부르디외에 대한 진지한 재전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2019. 8. 20. 발행된 6쇄까지 나와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대단한 일인 것 같다.


  부르디외를 잘 모르면서 그의 '상징자본'이니 '아비투스'니 하는 개념들이 다소 불명확하고, 또 한편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행동경제학을 파던 중에 칸트, 또 부르디외의 문제의식과 닿는 지점에 이르게 되어 논문과 책을 찾아 읽고 있는데... 벌써 20년이 지난 글이지만, 홍성민, "[인간과 사상] 부르디외", 사회비평 제25권 (2000)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006959이 부르디외 사상 전반의 얼개를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책 40쪽에 나오는 내용인데, 칸트의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은 프랑스어로는 Critique de la faculté de juger 또는 Critique du jugement로 옮긴다. 그리고 『구별짓기』의 프랑스어 부제가 다름 아닌 (La Distinction) Critique SOCIALE du jugement (강조는 인용자), 그러니까 칸트의 제목에 '사회적'을 수식어로 붙인 '판단의 사회적 비판'이다. 아무튼 한국에서는 부르디외가 주로, 미국에서 공부한 문화사회학자(소비사회학자)들을 통하여 단편적으로만 소비되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겠다.


[다만, 부르디외 식 구분에 따른 '중간계급' 내지 '프티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지식소비자 중에, '미국화로 인해 학문의 다양성이 죽고, 그것이 만악萬惡의 근원이다'라는 식의 주장을, 자신이 읽고 접한 구체적 학문적 근거에서가 아니라 어디선가 들은 남의 말을 토대로 과감하게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그 남들도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남의 말을 토대로...), 일부 진실이 없지는 않지만, 반드시 맞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분들은 동시에 '유럽 식 대안'으로 가야한다는 입장을 막연히 갖고 계신 경우가 또한 많고, 그것은 아마도 유럽 여러 나라들이 가진 사민주의적 전통과 그 연장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온건성'을 염두에 두신 것일 게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 꼼꼼히 따져보거나 깊이 숙고하지는 않은, 추상적 말씀이실 때가 많다는 것이 솔직한 인상이다. 그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미국은 전 세계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연구자와 이론을 게걸스럽게 흡수하고 있고, 특히 유럽의 논의라면 대개는 우리보다 훨씬 정치하게 꿰고 있으며('덕 중의 덕은 양덕'이라는 말도 있지만, 대학산업이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분야 중 하나이다 보니 연구자층이 워낙에 두텁고, 드넓은 미국 전체에서 찾으면 차원이 다른 덕후도 더 많을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다. 게다가 유럽 학자들이 우리나라보다는 결국 미국에 가서 자신의 이론을 프로모션하므로...), 그 밖에 다양한 경로로 받아들인 여러 나라의 논의가 그 자체로 미국 내에서의 다양성-혹은 제국-을 이룬다(그래서 차라리 비판을 한다면, 한국 연구자들이, 주로 미국, 그 중에서도 미국의 일부 경향만을 제한적으로 수입하였다고 비판함이 조금 더 정확한 것 같다. 그러나 인력과 자원의 한계로 미국에서 쏟아지는 논의들조차 온전히 따라가고, 소개하고, 때로는 돌아가는 판에 선수로 참여해 비판하고 한다는 것이 사실상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다. 우리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으려면, 맨날 세계 몇 위에도 못 들었냐고 욕하기 전에, 학자들이 교육과 행정, 심지어 입시에까지 들여야 하는 에너지를 잘 분배, 분산하여 누군가는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혜성같이 떠오른 싱가포르 난양공대(NTU) 같은 곳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운영방식이 우리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에 입시정책은 있어도 대학정책은 없고, 특히 각 대학의 자율성에 맡겨 스스로 경쟁력을 쌓을 수 있게 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부르디외가 세계적 학자가 된 것도 1980년대를 전후해 미국 대학을 자주 방문하면서부터였다. 그처럼 미국 대학들은 플레이어라기보다는 플랫폼처럼 되어있다(물론 분야에 따라 당연히 편차는 있다. 넘사벽으로 미국이 압도적인 분야들이 있지만, 그래도 구대륙이 여전히 우위를 가진 분야가 없지는 않다)어떤 이론과 주장이 지구적 단위에서 학문적 토론의 식탁에 논의거리로서 오르려면, 우선은 유수 저널에 영어로 논문이 등재되어야 한다. 부러운 일이지만 최근 세계사에서 영국, 미국이 연달아 헤게모니를 쥐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런 탑급 학회들이 미국에 근거를 둔 경우도 많고 미국 학자(전 세계에서 모여 미국에 자리 잡은 학자)들을 가장 비중 높은 구성원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학회들이 미국만의 학문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미국의 싱크탱크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저러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미국 인구는 전 세계의 4%밖에 안 되지만, 어떻게 나머지 96% 인구 중에서 똑똑한 인재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주저앉힐까'를 고민하고 있다. 에릭 슈미트가 위원장으로 있는, '인공지능에 관한 국가안보위원회(NSCAI)' 위원 중 한 분의 말씀에 따르면, '어쨌든 인공지능 개발도 사람 싸움이고, 미국의 가장 큰 전략적 목표는 중국이든, 러시아든, 인도든, 또 세계 어느 다른 나라에서든 제일 똑똑한 사람들을 모아 미국에서 활동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중국 상류층의 최대 인생목표는 사실 (미국 등으로의) '이민'이다]. 아무튼 백악관에서 나오는 인공지능 보고서들이 이분들을 거치는데, 개중에는 미국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국적 불문 미국 영주권을 줘야한다고 주장하는 분까지 있다고 한다(이민정책을 선택적으로 운용하자는 것이다). 그만큼 미국의 의사결정그룹 다수가 다양성을 전략적 가치로까지 생각하고 있는 판인데, '미국을 거친 이론은 무조건 다양하지 않다'고 하는, 20, 30년 전쯤부터 나오던 이야기를 만연히 반복하는 것은 편견의 산물일 수 있고, 아무튼 현실과 반드시 부합하지는 않는 것 같다.]


  책으로 돌아와, 문화 확산의 매체가 책이 다룬 프랑스 1970년대와는 현격히 달라진 마당에(질 리포베츠키 Gilles Lipovetsky의 표현에 따르면, 대중소비사회에서 이제 '과소비사회'로 넘어온 마당에, 책 172쪽), 부르디외의 이론이 오늘에까지 바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맥락에서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숨겨진 경로'를 찾아낸다"고 하는 문제의식과 방법론만은(최샛별, 2008),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데도 유효한 것 같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 성별, 세대, 직업, 지역, 경제력, 종교 등에 따른 한국적 아비투스가 너무나 복잡다단해졌기 때문에(책 43쪽에 정리된 '아비투스'의 개념적 활용 범위가 유용하다), 기존의 (계급/민족) 환원주의적 이론과는 다른 부르디외 식의 종합적 접근이 더 절실하다고 느낀다. '대중 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한 실증분석이라니!! 그런 점에서 책 46쪽 이하에 나오는 부르디외의 설문지는 무척 흥미롭다(예컨대, 아래 이미지와 같은 것들). 이전까지 부르디외를 문화이론가로서만 많이 접했지, 그의 실증연구방법론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저작들에도 관심이 간다. 책 103쪽 이하 '중간계급' 부분도 재미있게 읽었다.






  번역은 꽤 된 편인데도, 이상하게 한국에서 부르디외가 온전히 수용되거나 여전히 먹히지(?) 않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도 든다. 『구별짓기』 (하)권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셈인지? 이렇게 모으니 동문선 출판사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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