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의 승리라 이름할 수 있을 웅혼한 서사. 인문학자가 아니라면 이런 책을 도저히 생산해낼 수 없을 것 같다. 562쪽부터 647쪽까지에 걸친 미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발표지면은 책이 나오기까지 지은이가 인고한 세월을 응축하고 있는 것같아 자못 경이롭다. 책은 3·1운동이 어떻게 우리 "존재의 기초"이자, "불회귀적 사건"인지를 설득력 있고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책 543 ~ 544쪽). 우리 헌법이 왜 첫머리에 '3·1운동'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는지 이 책을 읽고서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작년 6월경 책의 80% 정도를 읽고 덮어두었다가 오늘 남은 부분을 마저 읽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전율이 돋았고, 마음에서 우러난 박수가 나왔다(당시에 남겨 둔 리뷰는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0923232).


  우리도 Project Gutenberg (http://www.gutenberg.org/)와 같이 여러 1차 자료와 문헌들을 디지털 아카이빙하는 작업에 더 투자하면 좋겠다. 20세기 이전 자료들이 대부분 한문으로 남아있는 탓에 우리 자신에 대한 연구에 진입장벽이 존재하지만, 중국, 대만, 일본과 협력하여 발전된 한자인식(OCR) 기술을 나누었으면 좋겠다(현재까지의 데이터베이스 구축 현황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http://archive.history.go.kr/ 참조). 여러 언어간 번역 자료를 부지런히 디지털화하여 번역기의 정확도를 높여나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이런 연구가 더 많이 쏟아지고 또 외국에도 소개되면 좋겠다. 자료 더미에 묻힌 원석을 발굴하여 빛나는 보석으로 꿰는 작업이 많아지면 좋겠다.


  국문학, 국어학, 국사학은 앞으로 어떻게 미래를 개척하여야 할까. 국어국문학의 소멸을 걱정하는 시대에 우리 정신의 근간이라는 당위적 언설만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국영수"의 앞자리를 아직 '국어'가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국어'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한 것이 도리어 혁신을 가로막아 도태를 초래한 것은 아닐까. 중고등학교 교과목으로서 '국어'는 미래세대에게 우리 말과 글의 비전을 충분히 제시하고 있는가. 아무리 가장 높은 비중을 둔들 2, 30대에 이르러 꾸준히 한국문학을 읽는 인구가 얼마나 될까. 우리말을 아름답게 살려 쓰려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문광호, "국어국문학, 미래 한국의 救命艇 될 수 있을까?", 교수신문 (2018. 10. 8.)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2793 등 참조.

  작가가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고, 문학이 시대정신을 구현하며, 문예지가 첨단 논쟁의 무대가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실기 위주의 문예창작학과로 변신을 꾀하기도 했지만, 문학도, 작가도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말과 글 자체가 20세기에 비하여 심각하게 쪼그라들어 있다. 이는 곧 사고의 단순화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우리말을 보존하는 노력에 동참한다는 차원에서 학술지에 우리 어휘를 살려 투고한 적이 있었는데, 가독성이 오히려 떨어진다고 수정을 권고받은 일도 있었다. 그만큼 우리 언어생활의 거대한 빙산이 급속히 녹아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호기,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20) 창작과비평 대 문학과지성", 경향신문 (2015. 8. 1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182207085&code=210100; 신효령, "[기자수첩]문학의 위기, 만화·영화는 멀쩡하건만···", 뉴시스 (2018. 10. 18.) https://newsis.com/view/?id=NISX20181017_0000444984 등 참조.

  [유수의 영어 언론과 잡지들은 영어 어휘를 풍부하게 구사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많이 쓴다. 아름다우면서도 위트 넘치는 문장들이 전 세계 독자들로 하여금 기꺼이 지갑을 열어 컨텐츠를 사보게 만든다. 우리도 순우리말 어휘, 옛말을 포함한 거대한 유의어 사전을 만들면 어떨까. 비슷한 단어들을 적절히 교차하여 구사하고, 또 전달하려는 뜻에 따라 그 단어들간 미묘한 차이를 가려쓰려는 노력이 많아지면 언어 세계의 지구 온난화를 늦출 수 있지 않을까. 영어로 글을 쓸 때 자주 참고하는 유의어 사전 사이트인데, https://www.thesaurus.com/을 써보면,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자질구레한 단어들까지, 비록 연결선의 강약은 다를지라도, 어휘의 그물망을 정말 촘촘하게 연결해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Merriam-Webster 사전을 보아도, 우리의 "표준국어대사전"과는 그 폭과 깊이에서 차원이 다르다. 예컨대 "love" 같은 말을 찾아보면, 이것이 라틴어나 고대 영어, 고대 상류 독일어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12세기 전부터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가 나온다. 최신 용례와 풍부한 유의어, 반의어 목록이 제공됨은 물론이다. https://www.merriam-webster.com/. 한글이 최고야 하면서 국뽕에 취해 있기에는, 우리말이 표현할 수 있는 생각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반백 년 전까지만도 우리말, 우리글을 지키는 것 자체가 과제였지만, 국립국어원(https://www.korean.go.kr/)에서 지금 벌이는 말뭉치 구축 사업 등 여러 사업에 더하여 어휘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보존하는 일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민간 활용이라는 측면을 더 신경써주면 좋겠다. 지금 웹상의 사전 시스템으로는, 예컨대, 처음부터 "다홈"과 같은 말을 모르면 이를 찾아 쓸 도리가 없다. '도리어', '오히려', '차라리', '그래도' 같은 말들을 찾았을 때 이들을 연결해서 보여주어야 비슷한 뜻을 가진 말들을 교환하여 쓸 수 있다. 언어 순수주의가 역설적으로 우리 언어를 빈약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여야 한다. 언어는 자꾸 이어 버릇하여야 풍부해진다. 유연석, "국립국어원, 중단됐던 '국가 말뭉치 구축사업' 10년 만에 재개", 노컷뉴스 (2018. 12. 6.) https://www.nocutnews.co.kr/news/5072089 참조.]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워낙 밀도가 높은 대작이라 선뜻 요약하기가 힘들지만 오늘 읽은 부분에서 몇 가지만 아래에 밑줄긋기 식으로 갈무리해 본다(제3부 제4장 이하에서 제4부 제2장 '이중어' 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당대의 잔다르크들을 복권시킨 제3부 제4장 '여성' 편은 감동적이었고, 이광수와 그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심훈, 또 제3의 길로서 엄상섭에 대한 서술도 흥미로웠다. 조소앙이 베르그송을 만나고 와서는 "쥐뿔도 모르는 놈!"이라고 내뱉었다는 일화도 나온다[책 442쪽, 「베르그송과 조소앙」, 『동아일보』(1936. 3. 18.), 이철호, 「한국 근대소설과 '의식의 흐름', 『상허학보』 36, 2012. 10.에서 재인용].


  권보드래 교수님도 정말 부지런히 쓰고 계신다. 공저가 많으신데, 이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들고 나오실지 기대가 많이 된다.


박원경은 19세 소녀로 "천황폐하께 불경이요 (...) 부모님께도 불효" 운운하며 설득하는 심문관에게 "내 앞에 천황폐하가 어디 있"냐고 반박하면서 "우리 부모님 생각은 (...) 칭찬해주실 테니까 나는 효녀"라고 당당히 진술했다는데, 그 소문이 당시 황해도에 파다했다고 한다. - P397

"나는 3·1 운동 없으면 오늘은 없다." -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저작집 6』, 한길사, 2009, 164쪽. - P431

엄상섭의 시각마따나 3·1 운동은 종착점보다 출발점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3·1 운동은 개인적·민족적 층위에서 공히 불회귀적 사건인 동시, 실패냐 성공이냐의 질문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종류의 사건이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나‘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존재의 기초이자 폭발적 성장의 계기인 것이다. 3·1 운동을 통해 조선인은 비로소 집단적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서의 정체성을, 즉 저항하는 존재로서의 자존을 형성할 수 있었다. 조직망도 통신망도 저발달한 상태에서 사실상 전국 모든 지역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운동은 지금까지도 부동(不動)의 민족적 알리바이다. ‘우리‘는 단연 일제에 반대했던 것이다. 비록 힘이 모자라 짓밟혔을지언정 그것은 식민지시기 내내, 그리고도 오래 더 살아남은 기억이었다. ‘3·1 운동이 없었다면 민족으로서의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 P543

그러나 동시에, 이광수 같은 인생과 대화하는 과정이 없다면 독립운동가들의 존엄마저 박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그렇다고 이광수를 망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광수를 몰아내는 대신 그와 대결하고 싶다. 그는 아직 내게 맞설수록 새로운 대상이다. 그러므로 적대와 분할이 기승스러워지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3·1 운동의 봉기 대중처럼, 대결할지언정 누구도 추방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죄를 묻고 벌을 정해야겠지만 궁극에는 모든 존재를 품는 그런 질서를. - P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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