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이웃하여 산다는 것이 때로는 고생스럽고, 고통스러웠던 시기도 많았다. 그러나 (적어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우리보다 일찍 새로운 분야를 나름 소화하고 정리하여 이만한 (중급)입문서들을 내는 덕분에, 우리로서도 안목 있는 분들이 이를 발견, 번역하심으로써 비교적 쉽게 그 분야를 습득, 대중화할 수 있었고, 그 점은 '패스트 팔로잉 시대'에 학문, 예술, 과학기술 전반에서 적잖은 효용이었음이 틀림없다.
[지금은, 일본이 너무나 완벽한 번역 시스템으로 여전히 번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영어에 대한 '직접' 접근성이 '일본에 비해서는 그나마' 높은 것 같다. 일본은 어찌 되었든 중요한 문헌은 일단 번역부터 하고 본다. 그러나 번역 알고리즘 발달로 그 차이는 조만간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될 것이고(방대한 영어-일본어 번역 데이터로 인하여 번역기 정확도는 여전히 일본이 우리보다 높다), COVID-19 대유행으로 물리적 시공간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 '가상현실 시대', '온라인 수업 시대'가 강제로 앞당겨진 바람에(물론 알짜로만 추려진 대면접촉의 중요성은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우리와 일본의 신지식 습득, 창출 양상은 달라질 것 같다.]
허버트 사이먼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이 1978년이고, 대니얼 카너먼은 2002년에 받았다. 그 사이 1994년 존 내쉬가 하사니 등과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에서 인지심리학을 전공하고 1982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재직하신 이영애 교수님께서, 카너먼, 슬로빅, 트발스키가 편저한 1974년작 『Judgment Under Uncertainty: Heuristics and Biases』를 옮겨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편향: 추단'법'과 편향』을 소개한 것이 2001년 1월이다. 카너먼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이 결정되기 2년 전쯤 역서를 내셨으니 어찌 보면 대단한 일이고, 아카넷의 '대우학술총서' 또한 언제나 그렇듯 상찬받아 마땅하다. 사실 이 책은 다른 분야에 비해 뜬금없다 싶을 정도로 두드러진 번역 사례이다. 그러나 심리학 외에 경제학이나 법학 등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 위 책이 우리 사상계에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는지는 모르겠다.
* 이영애 교수님의 이화여대 30년 근속 기념 이대학보 인터뷰 http://inews.ewha.ac.kr/news/articleView.html?idxno=17192
게다가 폰 노이만과 오스카 모르겐슈테른의 『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가 1944년 프린스턴 출판부에서 처음 나왔고, 허버트 사이먼의 논문,「A Behavioral Model of Rational Choice」가 1955년 나온 것 등, 서구에서 1950년대부터 게임이론, 정보경제학과 결합한 온갖 실험과 연구가 쏟아진 것을 고려하면, 소개가 그리 빨랐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일본에서는 1960년대부터 허버트 사이먼의 책이 번역되기 시작하여 현재 수십 종이 나와 있는데, 우리는 1968년 나온 『Sciences of Artificial』이 1999년 『인공과학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가 절판된 것이 전부이고(오히려 지금 나오면 더 많이 읽힐 수도 있겠다), 2000년 『사회비평』 제23권에 함성득 교수와 사이먼의 대담이 실린 적이 있다. 일본에서 폰 노이만의 저작은 1970년대에 많이 번역되었다. 다만, 1944년작은 2009년 『ゲームの理論と経済行動』이라는 제목으로 세 권으로 나누어 나왔고, 특기할 만한 것은 60주년 기념판이 따로 번역되어 나왔다는 점이다. 『ゲーム理論と経済行動: 刊行60周年記念版』(2014). 『Psychological Analysis of Economic Behavior』(1951)로 유명한 George Katona의 책들도 일본에서는 1960년대에 이미 번역되었다. 『消費者行動 : その経済心理学的研究』 (1964), 『大衆消費社会』 (1966) 등.
한편 일본에서는 1992년에, 「判断と意思決定」이라는, 아마도 카너먼이 1991년 Psychological Science 제2권 제3호에 낸 논평 "Judgment and decision making: A personal view"에서 제목을 딴 것으로 보이는 '30분 분량 DVD'를 냈다.
* 카너먼 논문 pdf 링크 https://www.cs.cmu.edu/~jhm/Readings/kahneman-1991.pdf
* 일본 DVD 링크 https://www.maruzen-publishing.co.jp/item/?book_no=301832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2003년 7월호에 나온 Dan Lovallo와 카너먼의 "Delusions of Success: How Optimism Undermines Executives’ Decisions"가 같은 해 12월경 "バラ色の「色眼鏡」を外せ 楽観主義が意思決定を歪める"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한 것 같다(카너먼의 노벨경제학상 수상 이후의 일이다).
* 로발로 & 카너먼 원문 https://hbr.org/2003/07/delusions-of-success-how-optimism-undermines-executives-decisions
도모노 노리오(友野典男)의 『行動経済学 : 経済は「感情」で動いている(행동경제학: 경제는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가 2006년 5월에 나왔고, 이명희 님의 번역본 『행동경제학: 경제를 움직이는 인간 심리의 모든 것』이 6개월쯤 뒤인 2007년 1월 2일 '지형'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다. 내가 가진 책이 열흘 뒤인 2007년 1월 12일 이미 초판 2쇄를 찍은 것을 보면, 역서가 나오자마자 우리나라에서도 (그제야) 상당한 주목을 끌기는 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지형'은, 알라딘에서 2005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단 27권 정도 단행본을 낸 것으로 검색된다. 2012년부터 2019년 사이에는 상당한 공백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2019년 2월 어떤 이유에서(행동경제학이 뜨면서) 도모노 노리오의 위 책(리커버 에디션)을 다시 내며 활동을 재개한 것으로도 보인다. 전문가 두 분 감수까지 받아 나온 책인데, 더 큰 출판사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것을 보면, 2007년 초판이 나올 당시만 하여도 행동경제학이 팔리는 분야라는 생각은 출판계에 없었던 것 같다. 최근 번역서 출판에 관여하면서 외서 저작권 계약기간이 판권 확보 시점부터 번역기간을 포함하여 통상 5년 정도로 매우 짧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어쨌든 좋은 책이 더 좋은 시절을 만나 다시 나온 것은 다행한 일이다(분량은 340쪽으로 동일하다). 감수자인 안서원 교수님께서는 2006년 11월 선구적으로 사이먼과 카너먼에 관한 개론서도 내셨다.
한편 이준구 교수님께서 「행태경제학의 등장과 경제학의 미래」라는 논문을 서울대 경제연구소 경제논집에 내어 '행태경제학'이라는 옮김말로 Behavioral Economics를 경제학계에 본격 소개하다시피 하신 것이 2008년 3월이다. 2009년 9월에는 『36.5℃ 인간의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서도 내셨다(2017년 3월 개정증보판 출간).
그러나 그 전에 이미 최정규 교수님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이 2004년 12월에 나왔고(2009년 개정증보판 출간), 2007년 8월에는 리처드 탈러의 『승자의 저주』도 옮기셨다(최정규 교수님은 리처드 H. 세일러라고 쓰셨는데, 탈러, 세일러 모두 만족스러운 표기는 아니나 세일러 쪽이 조금 더 가깝다.). 이는 1991년에 나온 책인데, 일본에서는 1998년 이미 번역되었다. 『市場と感情の経済学 : 「勝者の呪い」はなぜ起こるのか』(ダイヤモンド社).
그 무렵부터 분위기가 일대 전환을 겪었음은 잘 아시는 바와 같다. 2008년 4월경 출간된 『넛지』가 2009년 4월 번역되어 나왔다.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9년 여름 휴가지에서 읽고 참모들에게 선물하였다고 하여 국내에서 화제를 모았다. 리처드 탈러와 『넛지』를 함께 쓴 선스타인 교수의 책도 많이 소개되었다(『최악의 시나리오』는 『넛지』 가 나오기 전 2008년 7월에 나왔고, 스티븐 제이 굴드, 마사 너스바움 등이 참여한 『클론 and 클론』은 1999년에 나왔다).
하지만 번역되어야 할 책이 아직 너무나 많다. 리처드 탈러가 2017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면서 유행을 다시 이어가고 있다.
카너먼의 책들도 덩달아 많이 소개되었다. 우선 이영애 교수님의 역서가 2010년 부제의 추단'법'에서 '법' 자를 떼고 다시 나왔다. 일본에서 도모노 노리오에 의해 『ダニエル·カ-ネマン心理と經濟を語る (單行本)』라는 제목으로 카너먼의 노벨경제학상 수상 연설과 에세이가 2011년에야 묶여 번역된 것을 고려하면, 결과적으로는 늦은 소개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유행을 조금 앞당기는 데 이명박 전 대통령의 기여가 상당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행동경제학을 정면에 내건 책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최정규 교수님도 여러 책에 관여하시며 비교적 활발하게 노를 젓고 계신다.
영어책은 어마어마하게 많고(실용적 학문이라 인정받은 덕분이다), 일본에서도 도모노 노리오 이래, 책이 상당히 많이 나왔다. 외서는 더 이상 열거하지 않는다.
여러 나라가 행동경제학적 사고와 접근을 공공정책, 법제도 마련에 응용하고 있다. 자유방임과 국가주의적 후견 양 극단 사이에서 시민의 창의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똑똑한 개입방식을 고민한다.
그러나 우리도 일본도, '넛징'이라는 말은 유행했지만, 그로부터 뭔가를 제대로 배우고 음미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어떤 문제에서든지 '형벌 강화' 외에 다른 대안을 사고하지 못하는 모습, 배달의 민족 수수료 인상에 대하여 독과점의 횡포라며 '공공 배달앱'을 개발하겠다고 엄포놓는 모습, 또 그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