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묵향 > [마이리뷰] 오손웰스의 제인에어










위와 같이 여러 버전의 「제인 에어」영화, TV 시리즈가 있지만(IMDb를 검색하면 87개 결과가 나온다),
1943년에 나온 이 버전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무려 조안 폰테인과 오손 웰즈가 출연하였다.


「제인 에어」(1943)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36969/
네이버 무비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713
조안 폰테인은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1940)에서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데, 역시 히치콕 감독의 「의혹(Suspicion)」(1941)으로 1942년 제14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조안 폰테인은 「레베카」로도 1941년 제1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당시 「레베카」는 작품상을 받았다. 이 때 경합한 작품이 「분노의 포도」, 「위대한 독재자」 등이었는데, 존 포드 감독이 「분노의 포도」로 감독상을 받았고, 찰리 채플린에 대한 사상적 의구심 등으로 「위대한 독재자」는 상을 전혀 받지 못했다.
바로 다음 제1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시민 케인」이 9개 부문에 후보작으로 올라 겨우 각본상을 받는 데 그쳤는데, 영화사의 큰 이변으로 받아들여진다. 존 포드 감독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가 작품상,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하였다.









조안 폰테인은 1944년 제1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The Constant Nymph」(1943)로 다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때 「카사블랑카」가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을 받았고, 잉그리드 버그만은 「카사블랑카」가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트로피는 「베르나데트의 노래」 제니퍼 존스의 차지가 되었다. 이 해는 1935년부터 총 10번, 그 전해까지 5년 연속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이미 두 번이나 오스카를 거머쥔 베티 데이비스가 후보에 오르지 못한 해이기도 했는데, 그녀의 시대가 다했다는 식의 성급한 말들이 나오기도 했다. 베티 데이비스는 바로 다음 해에 「Mr. Skeffington」으로 다시 후보에 오르는데 「가스등」의 잉그리드 버그만에 밀려 수상하지는 못하였다.











































조안 폰테인 이야기를 하려다 잉그리드 버그만으로까지 샜는데, 의외로 빛을 못 본 책을 한 권 소개하고...

이런 것도...








다시 「제인 에어」로 돌아와서^^;;
오손 웰즈는 뭐 설명이 필요 없는 거장 감독이자, 명배우이다.
아래 영상의 인터뷰가 끝나고 12시간인가 후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오손 웰즈의 마지막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YZEWy--VsBQ&feature=youtu.b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