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묵향 > * 민주주의와 반증가능성

  이 날 책을 읽을 때 으슬으슬 춥더니 결국 몸살이 났던 기억이 난다.

  무리하게 1년을 쥐어짜내고 보면, 이맘때쯤 쉬면서 꼭 많이 앓곤 한다.
  여유가 너무 없다.

  여하간 북플 '지난 오늘' 기능을 활용하여 페이퍼처럼 쓴 리뷰들을 다시 페이퍼로 정리하려고 한다.

  (아래도 종전 글을 거의 그대로 옮겨오면서 보강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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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포퍼(1902~1994)의 말년 인터뷰와 에세이를 담은 책으로, 1992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1, 2부는 이탈리아 언론인 Giancarlo Bosetti와의 대담을, 3부는 '민주국가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반성', '자유와 지적 책임'이라는 두 편의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다. 칼 포퍼 정치사상의 완성되고 정리된 모습을 개략적으로 살필 수 있다.

 

  포퍼에 따르면, '누가 지배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서투른 정식화이다. 군주정, 과두정, 민주정을 비교하여 '철인통치'를 주창한 플라톤에서부터 비롯된 이런 형식의 물음과 해결책들은, 언제나 최악의 불행을 야기했다.

  민주주의의 본질 역시 '국민주권'이나 '국민에 의한 지배'가 아니다. 그는 과학철학에서 택한 전략대로 민주주의도 부정적(否定的) 방식으로 접근한다. 포퍼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은 '제거할 수 없는 정부', 다시 말해 '독재'와 '부자유', '법의 지배가 아닌 다른 지배의 형식'을 피할 수 있는 힘, 즉 '심판가능성(= 반증가능성)'에 있다. 사람은 언제나 틀릴 수 있고, 실수와 오류를 통하여 배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만이 폭력 아닌 이성으로 정치개혁을 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제공한다. 처칠의 표현처럼,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부 형태이다. 다른 모든 정부 형태를 제외하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공동의 노력으로 진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따름이다. 영구불변의 절대적 진리는 있을 수 없다. 얼마간 반증을 견디고 있는 잠정적 진실만 있을 뿐이다. 목표는 추상적 선의 실현이 아니라, 구체적 악의 제거에 놓여야 한다. 그 성패는 '의사결정의 제도적 틀로서 비판과 토론이 얼마나 현실적 힘을 가지고 작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 이성/합리주의, 즉 사실의 존중, 비판과 토론에 열린 태도, 오류 가능성에 대한 관용의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이타적 개인주의' 윤리이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국민법정(popular tribunal)'이어야 한다.

 

  칼 포퍼의 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번역되어 있다. 번역되지 않은 것은 The Self and its Brain (NY: Springer, 1977); The Open Universe: An Argument for Indeterminism (From the Postscript to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Totowa, NJ: Rowman and Littlefield, 1982); Quantum Theory and the Schism in Physics (Totowa, NJ: Rowman and Littlefield, 1982); 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From the Postscript to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Totowa, NJ: Rowman and Littlefield, 1983); The Myth of the Framework: In the Defence of Science and Rationality (London: Routledge, 1996); Knowledge and the Body-Mind Problem (London: Routledge, 1996) 등이다. (추가) 2018년에 『포퍼 선집』이라는 것이 나오기는 하였는데 어떤 글들이 수록되어 있는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현대과학철학 논쟁』은 토머스 쿤과 임레 라카토슈, 파울 파이어아벤트 등의 논쟁을 담은 책이다.



"우리의 문명이 살아 남으려면 우리는 먼저 위대한 인물에 맹종하는 습관부터 타파해야 한다. 역사에 관한 예언자로 행세하기를 중지할 때, 우리는 운명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 (...) 사회가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워야 한다는 견해는 흔히, 너무나 쉽게 폭력적 조치를 초래한다. 지상에 천국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인간만이 그의 동료를 위해 준비하는 지옥을 만들 뿐이다.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은 오히려 어떤 선한 의도에서, 즉 동료들의 참담한 운명을 개선하고자 하는 우리의 조급함에서 비롯되었다." (4쪽)

"통치자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평균 이상인 자가 거의 없었고, 더러는 평균 이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론 최선의 통치자를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최악의 통치자에 대비한 원칙을 채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탁월하고 유능한 통치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가냘픈 희망에 우리의 모든 정치적 노력을 건다는 것은 나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인다." (41쪽)

"인류의 구체적 역사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의 역사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망과 투쟁 그리고 수난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155쪽)

"합리적 접근법은 내가 틀릴 수 있고 네가 옳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공동의 노력에 의해서 진리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60쪽,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재인용)

"이 책을 이루고 있는 논문들과 강의는 매우 간단한 주제의 변주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182쪽, 『추측과 논박』 머리말 중에서)

"우리의 행정은 소수 대신에 다수를 옹호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라 불리는 이유이다. 법률은 개인들의 사적 분쟁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정의를 행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탁월한 자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는다. 어떤 시민이 뛰어나면, 그는 다른 사람에 앞서서 국가에 봉사하도록 요청된다. 그러나 그것은 특권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장점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 페리클레스(203쪽)

(7-1) "우리는 마르크스의 성실성을 인정하지 않고서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 그의 열린 마음과 사실에 대한 감각, 그리고 쓸데없는 말장난에 대한 혐오, 특히 도덕적 훈화조의 말장난에 대한 혐오는 그를 위선과 표절에 대해 싸우는, 세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투사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불타는 열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입으로써가 아니라 행위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를 깊이 느꼈다. 그의 재능은 주로 이론적인 데 있었으므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투쟁을 위한 과학적 무기라고 그가 믿는 것을 주조해 내는 데 엄청난 노력을 바쳤다. 진리를 모색하는 성실성과 지적 정직성은 그를 그의 많은 추종자들로부터 구별해 준다. (7-2로 이어짐)

(7-2) 지적 원천에서는 헤겔의 철학과 거의 동일하다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인도주의적 충동이 밑에 깔려 있다. 더구나 헤겔 우파와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회적 문제 가운데 가장 절박한 문제에 합리적 방법을 적용하려는 정직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가치는 그 노력이 대부분 실패에 그쳤다는 사실에 의해 감소되지 않는다. 과학은 시행착오에 의해서 진보한다. 마르크스는 그런 시행착오를 시도해 보았던 것이다. (7-3으로 이어짐)

(7-3) 경제적 힘이 모든 악의 뿌리에 놓여 있다는 독단은 없애버려야 한다. 오히려 모든 악의 뿌리에 놓여 있는 것은 모든 형태의 통제되지 않은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 경제적 힘이 위험스럽게 되는 것은 돈이 직접 권력을 살 수 있게 된다든지, 생존하기 위해 자신을 파는 경제적 약자를 노예화함으로써 권력을 간접적으로 살 수 있게 될 때이다. (...) 우리는 경제적 힘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제도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경제적 착취를 방어할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상 7-1~3은 239쪽에서 인용)

"선거일은 새로운 정부에 적법성을 부여하는 날이 아니라, 과거 정부를 우리가 재판하는 날, 즉 과거 정부가 그동안 자신들이 해왔던 일들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 날이다." (249-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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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용 2019-01-06 0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번 연휴때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었는데 말이죠 ㅎㅎ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1부밖에 읽지 못하고 다시 생산에 집중을..

묵향 2019-01-06 12:42   좋아요 0 | URL
영어로?? 단숨에 읽기는 좀... 옛날 판 민음사 한글 책이면 더더욱ㅎㅎ 씩씩하게 생산하시기를 응원함!